나의 일

by 재인

나는 열심히 최선을 다해 살고 있는데 세상이 나만 몰라 주는 거 같고 세상이 나에게만 가혹한 것 같다고 느낄 때가 있었다. 하지만 나이가 들고 어느 날 주위를 둘러보니 나를 포함한 거의 모든 보통 사람들이 열심히 자기 일에 최선을 다해 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세상은 그렇게 조용히 흘러간다는 것을.

대학을 졸업하고 바로 사회에 나가기가 두려웠다. 그래서 대학원에 갈까 생각했다. 공부가 딱히 싫지도 않았고. 여기서 공부를 더 해도 괜찮을 거 같았다. 하지만 지금까지 내가 하는 일은 무조건 들어주시던 부모님이 반대하셨다. 특히 아버지가 여자가 더 공부하면 시집 못 간다면서. 이게 무슨 쌍팔년도 얘기인지. 나도 꼭 대학원에 가야겠다고 결심을 한 것은 아니었기에 미련을 버리고 한 무역회사에 취업을 했다. 그리고 거기서 남편을 만나 결혼을 했다. 남편을 따라 서울로 와 시어머니와 함께 살게 되면서 나는 새로운 일을 구해야 했다. 그렇게 급히 구한 직장은 YBM 시사영어사였다. 출판사이기에 월급은 적었지만 영어학원 수강을 아주 적은 금액이거나 무료로 할 수 있어서 좋았다. 그때는 새벽 영어학원을 수강할 정도로 파이팅 넘치는 20대였다. 내 주된 업무는 YBM에서 새로 출시한 영어 학습지에서 교사들을 서포트하는 일이었다. 말이 서포 트지 학습지 교사들은 곧잘 수업을 펑크내기도 해서 대리 수업을 다니기도 했고 학부모들의 컴플레인도 많아 힘들었다. 그러다 출산으로 일을 접게 되었다. 7년 만에 시험관 시술로 아이를 가지게 되었고 어렵게 출산했지만 한 번도 쉬어 본 적이 없는 나로서는 출산 후 아이와 집에만 있는 시간들이 힘들어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어느 날 무작정 아이를 업고 나갔다가 학원 구인 광고를 보게 되었고 얼떨결에 나는 면접까지 보게 되었다. 그리고 원장님의 양해로 나는 하루 3시간 파트로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 출산한 지 6개월 만이었다.


영어를 좋아했고, 영어에 자신 있었고, 전 직장에서 아이들을 가르쳐본 경험이 있었기에 시작한 일이었지만 막상 10명 남짓한 아이들이 있는 교실에 들어가서 수업하는 일이 처음에는 공포스러웠다. 그것도 남자아이들의 짓궂은 농담을 받아내기에는 나는 너무 초보였다. 그때는 초보인 티를 내지 않으려고, 당황한 티를 내지 않으려고, 울지 않으려고 이를 악물었었다. 그랬던 시간이 어느새 20년이 훌쩍 지났다. 영어를 좋아해서 시작한 일이지만 세상 모든 일처럼 영어학원 일도 아이들에게 영어를 가르치는 일보다 더 많은 업무들이 있다. 시험 때 아이들 시험 자료 만드는 일부터 시작해서 방학 때는 또 방학 특강 교재 만들기, 어린이날을 비롯한 핼러윈데이, 크리스마스까지 특별한 날 행사까지 챙겨야 하고 분기별로 아이들과 부모님 상담도 해야 하고 때마다 보고서나 일지도 써야 하고 그중에 수업은 오히려 제일 쉬운 편에 속하는 것 같다. 하지만 내가 가장 어려웠던 것은 아이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일이었다. 아니 사람의 마음의 움직이는 일이었을 거다. 공부는 아이들 자신이 하는 거라서 누가 얼마나 잘 가르치는지는 크게 중요하지 않은 거 같다. 결국 좋은 선생님이란 아이들 마음을 움직이게 해서 스스로 공부하게 하는 사람이 아닐까 생각을 했다. 그래서 아이들과 소통하려고 했던 일들이 아이들과 부딪치게 되었고 때로는 그 안에서 상처도 받았고 힘이 들었던 것 같다. 나도 그 시절을 분명 지나왔는데 나와는 또 다른 시대이다 보니 나도 모르게 꼰대가 되기도 했고 아이들의 마음을 읽기가 정말 어렵게만 느껴졌다.

근데 20년이 지나고 보니 이제는 억지로 아이들의 마음을 움직이려고도, 아이들과 어렵게 소통하려고도 하지 않는다. 하나라도 더 알게 해 주려고 쉬는 시간까지 끌어다 쓰면서 아이들의 눈총을 받지도 않는다. 잘 되라고 했던 끊임없는 잔소리도 하지 않는다. 무엇보다 이제는 좋은 선생님이 되려고 애쓰지 않는다.

그저 주어진 시간을 재미있게 수업하며 지내려고 한다. 자연스럽게 지내는 것이 제일 좋은 것 같다. 그래서 요즘은 아이들과의 수업이 행복하기도 하다. 이제야 진정한 수업의 의미를 찾은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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