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늦더위가 기승을 부려 가을다운 맛이 나지 않는 날들이 계속되다가 갑자기 뚝 떨어진 기온에 하늘이 어쩜 가을을 잊어버렸나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러다 기온이 좀 올라 여느 가을날처럼 맑고 깨끗한 날, 나는 설악산 백담사 가는 길에 올랐다.
평일 오전 일찍 출발하니 길도 막히지 않아 2시간 남짓 걸렸다. 서울에서는 맑고 청아한 날씨였는데 설악산에 도착하니 잔뜩 흐리고 가느다란 보슬비가 내리고 있어 꽤 쌀쌀했다. 아무래도 산이라 추울 것 같아서 목 폴라티에 여러 겹 껴입고 온 것은 잘한 일인 거 같았다. 예전에는 이곳 입구에서 백담사까지 2시간은 족히 걸어가야 한다고 했는데 요즘은 셔틀버스를 이용한다고 한다. 버스로는 한 15분 정도 걸린다고 하니 얼마나 다행인지. 흐린 날씨에도 관광객이 많아 버스 타는 데에 30분이나 기다려야 했다. 버스를 타고 내설악으로 올라가는 길은 아직 완연하지는 않으나 군데군데 울긋불긋 단풍이 물들어 가고 있었다. 흐린 날씨 때문에 단풍색이 선명하게 보이지는 않았지만, 저 멀리 산에 걸린 운무가 내 마음을 달래주는 듯했다.
마침내 도착한 백담사는 과연 장관이었다. 마치 큰 산 아래 포근하게 안겨있는 느낌이랄까? 백담사 전각에서 보면 산이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아. 이곳에서 만해 한용운 선생님은 “님의 침묵”을 쓰셨구나. 나는 시인은 아니지만 이런 곳에서 있으면 어쩐지 시가 써질 것 같은 기분마저 들었다.
백담사에 부주지스님이신 광일 스님과 1시간 정도 법회를 가지고 나니 맛있는 공양 시간이었다. 사찰에서 먹는 밥은 정갈하고 담백함 때문인지 언제 먹어도 맛있다.
기념품도 휙 둘러보고 진하게 우러난 걸쭉한 대추차도 한 잔 마시고 지인과 나는 천천히 산책에 나섰다. 단풍나무 아래서 사진도 여러 장 찍고, 다리 밑에 사람들이 쌓아놓은 돌탑도 구경하다 나도 돌 하나를 놓아 보자 생각했다. 혹여 무너질까 걱정되어 두근대는 마음을 안고 살살 돌 위에 얹어 보았다. 다행히 무너지지는 않았다. 다리 아래, 이 많은 돌탑은 누가, 언제, 왜, 이렇게 많이 생겨났는지 참 궁금해졌다. 누가, 언제 이 많은 돌탑을 세웠는지는 모르겠지만 돌탑을 쌓았을 마음만은 왠지 알 것도 같았다.
백담사 안팎을 다 구경하고 나서 우리는 산신각, 극락보전을 거쳐 나한전으로 갔다. 바로 108배를 하기 위해서다. 이것이 내가 오늘 이곳에 온 이유이기도 하다. 나한전은 부처님의 나한(아라한)을 모신 법당으로, 나한은 공양받을 자격과 진리에 도달한 성자를 뜻해 깨달음의 지혜를 위해 이곳에서 아이의 수능을 기원하는 기도를 하기로 했다.
근데 절을 시작하자마자 내가 108배를 다 할 수 있을까, 생각이 들었다. 몸도 무겁고, 다리는 더 무거웠다. 절을 하면서 숫자를 셀걸, 어느새 땀이 한가득하고, 간절히 기도하는 마음으로 절을 해야 하는데, 언제 끝나나 하는 생각뿐이었다. 그리고 더는 못할 것 같다는 마음이 들 무렵 108배는 끝이 났다. 나 때문에 같이 108배를 해주는 동생에게 고마운 마음과 미안한 마음이 동시에 들었다. 힘든 마음에 나는 자식이 한 명이라 다행이야 라는 농담을 했다.
산에서 내려오니 언제 그랬냐는 듯 하늘을 맑게 개어 있었다. 그리고 내 마음도 더할 나위 없이 맑아졌다. 힘든 것을 이겨냈을 때 뿌듯함이 오듯 나는 오늘, 이 단순한 진리를 몸으로 체험한 것 같다. 집으로 돌아오며 오늘은 아들을 위해서 기도했지만, 다음에는 나를 위한 기도로 108배를 다시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