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키 17

죽기 위해 산다는 것

by 진민

철학적인 고민들로 둘러싸인 영화는 항상 무겁게 느껴진다. 하지만 그것을 약간의 코미디와 SF 적인 연출로써 관객들로 하여금 조금 더 손쉽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한 것이 참 좋았던 것 같다. 확실히 이 영화는 대작이라고 느껴졌다. 스케일이며 배우들 모두 대단해진 것은 분명하다. 한국인 봉준호 감독이 아닌 그냥 영화감독 봉준호의 작품처럼 느껴졌다. 커진 스케일만큼이나 영화 속 의미도 커진 것 같다. 이 작품은 무엇인가 자꾸 전하려는 것 같다. 감독이 생각하는 인류애에 대한 가치를 자꾸 전달하고 싶어 하는 느낌을 받았다.



술자리에서 가장 꼴 보기 싫은 사람은 인생 조언하는 사람이다. 술자리는 오락성이 짙은 자리이다. 그 자리에서는 이 시간을 이 사람들이랑 즐기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런 자리에서 본인의 철학을 통해 인생 조언을 내뿜는 사람은 꼰대, 진지충 이런 칭호를 받으며 그 자리에서 좋지 않은 이미지로 남아버리게 된다.



물론 영화를 오락성으로만 치부하는 것은 영화라는 매체에 대한 모욕이다. 하지만 나는 이 영화는 오락성이 충분한 영화라고 생각이 들었다. 철학적으로 무거운 주제들을 오락성과 함께 풀어내는 것은 굉장히 매력적이다. 하지만 그 속에서 의미를 찾으려 하고 그 의미를 관객에게 전달하려는 시도들이 조금 거북하게 느껴졌다. 술자리에서 인생상담을 해주는 고학번 선배님 같았다.




이 영화에서는 복제인간의 존재와 죽음에 관한 철학적인 질문을 자꾸 던진다. 죽음 앞에서 모든 인간은 두려워한다. 죽는 과정에서 생기는 고통 때문일까? 아니면 이루지 못한 것에 대한 후회 때문일까? 아니면 놓아버려야 되는 사랑 때문일까? 하지만 만약 미키처럼 죽음이 반복된다면 앞서 말한 것들 중 첫 번째만 감수하면 되는 것이다. 나머지 두 개의 질문들은 해결이 된다. 고통은 어느 순간이 되면 익숙해지기 마련이다. 그처럼 미키도 어느 순간이 되자 죽음에 익숙해지기 시작했고 본인의 상태가 어느 정도 이하로 약화되면 차라리 다시 프린팅 되는 것이 더 현명한 선택임을 깨달았다.



그러나 그가 멀티플이 된 순간 그는 죽음이 두려워졌다. 그가 2명이 되어버린 것이다. 17번과 18번의 미키 둘 다 같은 미키이다. 하지만 그 둘은 각각 존재하는 동안 서로의 기억이 점점 차이가 나기 시작한다. 서로 각자의 기억을 통해 살아가게 되었다. 그리고 지금 본인이 죽는다면 본래의 기억으로 다시 되살아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지금까지는 내가 지내온 기억들을 그대로 이식해서 살았지만 지금 죽는다면 또 다른 내가 죽을 때까지는 다시 돌아오지 못하는 것이다. 복제인간으로서가 아닌 인간으로서 죽음에 가까워지는 순간이었다. 그 순간 미키는 고통을 참기 시작했다. 자신의 삶이 끝나는 것보다는 고통을 참는 게 더 현명하다는 판단이었을 것이다.



죽지 못해 살아간다는 말에 나는 매우 공감한다. 죽음을 물론 본인이 선택할 수 있기는 하지만 그 가능성은 배제하고 생각하는 것이 좋은 것 같다. 우리는 죽지 못해 항상 고난과 고통 속에서 살아간다. 그 고통과 고난 속에서 살아가는 과정에 성취와 행복을 느낀다면 그것은 분명 이상적인 삶의 모습일 것이다. 미키는 죽기 위해 살아간다. 명목상 대의를 위한 희생이다. 본인의 죽음으로 더 나은 삶의 터전을 만드는 데에 기여한다. 개인의 입장으로 본다면 죽지 못해 살아가는 삶만큼이나 의미 없는 삶이 죽기 위해 살아가는 삶이라고 생각한다. 삶의 의미를 찾는 것이 무슨 소용이겠냐만은 죽기 위해 사는 삶만큼이나 허무한 삶이 존재할까? 죽지 못해 사는 우리의 삶이 마냥 허무하지만은 아닌 것 같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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