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와의 만남 1

우연뭉치 속에 피어난 운명

by 진민

3/10

10시에 첫 수업이 있었다. 1시간 일찍 집에서 나온 나는 여유롭게 걷고 있었다. 오늘은 마침 수업이 연달아 있는 날이기도 하고 시간도 충분했기에 학교 안에 카페에 들어갔다. 키오스크 앞에는 사람이 줄 서 있었다. 내 앞에서 주문을 하던 그녀는 분홍색 가디건을 입고 있었다. 뽀글한 단발머리였다. 그녀는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고르는 것 같았다. 나도 같은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골랐다. 아르바이트생이 신입인 것 같았다. 머신을 다루는 게 미숙한지 주문들은 점점 밀리기 시작했다. "주문하신 아이스 아메리카노 나왔습니다." 수업시간이 거의 다 된 나는 커피를 받아서 가려던 참이었다. "이거, 제 커피인데요?" 분홍색 가디건의 그녀가 말을 걸어왔다. 사실 말을 걸었다가 아니라 의견을 제시했다라고 해도 될 것 같다. 주문번호를 보니 이건 그녀의 커피가 맞았다. 얼굴이 붉어진 나는 연신 미안하다고 했다. 그녀도 수업시간이 거의 다 된 모양이었다. 먼저 커피를 받아간 그녀는 그렇게 서둘러 카페를 나섰다. 다음 커피를 받은 나도 한 손에는 커피 한 손에는 아이패드를 들고서 서둘러 수업으로 향했다. 푸르른 나무들과 노란 꽃들이 가득 핀 캠퍼스는 봄이 왔다는 것을 외치는 것 같았다.



다행히 늦지는 않았지만 강의실 안은 시끌벅적한 분위기였다. 나는 2학년이지만 이번 수업은 전과를 하고서 듣는 첫 전공이었다. 다들 서로가 반가운 얼굴들인 모양이었다. 하지만 나는 아무도 몰랐기에 조용하게 구석자리에 앉았다. 아이패드를 피고 수업준비를 하려던 참에 낯익은 색이 눈에 들어왔다. 흰색, 검은색, 회색 무채색의 재킷들 사이에 분홍색 가디건이 눈에 들어온 것이었다. 뽀글한 단발머리의 그녀였다. 왠지 모르게 설렘이라는 감정이 피어오르며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빈속에 커피를 마셔서 그런 것 같기도 했다. 용기를 내서 말을 걸어볼까 고민하던 차에 교수님이 들어오셨다. 교수님은 출석을 부르기 시작했고 그녀의 이름은 OO이었다. 그녀의 이름은 흔한 듯 흔하지 않았다. 교수님의 목소리가 지루한 탓인지 그녀가 자꾸 눈에 띄어서 인지 수업에 집중이 되지가 않았다. 갑자기 다시 시끌벅적 해졌다. 10분 쉬었다 시작한다고 한다. 깜빡 졸았나 보다. 역시 교수님의 졸린 목소리 때문이었나 보다.



잠도 깰 겸 화장실에 다녀왔다. 다시 구석자리에 앉았다. 시끌벅적한 소란들 속에 분홍색 가디건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사실 그녀가 어디 갔는지 궁금해할 필요는 없었다. 그녀는 모르는 사람일 뿐이었다. 하지만 무채색 속에서 피어난 분홍색이라는 색깔은 눈앞에서 계속 아른거렸다. "아까, 커피?" 뒤에서 누군가 말을 걸어왔다. 단발머리의 그녀였다. 그녀의 얼굴은 처음 봤다. 뽀글한 단발머리와 동그란 얼굴과 분홍색 가디건 그리고 OO이라는 이름 그 모든 것이 조화로웠다. 멋지게 일어나 대답을 하려던 찰나에 교수님이 들어오셨다. 그녀는 빠르게 자리로 갔고 나는 엉거주춤 자리에 앉았다. 잠을 깨고 온 나는 졸리지는 않았지만 교수님의 말씀은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이제 분홍색의 색깔이 아니라 그녀 자체가 눈앞에서 아른거리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고민이 되기 시작했다. 이름을 물어봐야 하나? 나는 그녀의 이름을 알지만 그녀는 내 이름을 모를 것이었다. 내가 그녀를 이름으로 부르면 굉장히 당황할 것 같았다. 갑자기 왜 말을 걸었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과를 받고 싶은 것인가? 아니 근데 내가 아까 그렇게 잘못한 것도 아니었는데? 머릿속은 이런저런 상상들로 파도가 치는 중이었고 그렇게 수업이 끝났다.



다음 수업까지 시간이 좀 있었기에 천천히 나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마침 그때 본홍색이 시야에 비쳤다. 그녀가 나가려는 것이었다. 새 학기 봄내음의 캠퍼스는 나에게 먼저 다가가라고 부추기는 것 같았다. "아까는 죄송했어요" 나는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아니에요 괜찮아요" 그녀는 웃으며 답했다. 그녀는 웃을 때 참 예쁜 것 같았다. 그녀의 웃음소리에는 향이 나는 듯했다. 그렇게 우리는 밖으로 나갔다. 흔들리는 풀소리와 시원한 바람소리와 함께 나와 그녀는 캠퍼스를 걸으며 수많은 이야기들은 나눴다. 그녀는 인디밴드를 좋아한다고 했다. 나는 국내 인디밴드보다는 해외 락밴드를 좋아하긴 하지만 그 자리에서 만큼은 나는 인디밴드를 좋아했다. 그녀는 음악을 들을 때 가사를 곱씹어 듣는다고 했고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노래를 알려주었다. 그녀는 이 밴드에서 작사를 하는 사람이 너무 좋다고 말했다. 이런 가사를 쓰는 사람은 어떤 사랑을 한 남자일지 너무 궁금하다고 했다.



그녀는 영화도 좋아한다고 했다. 나의 유일한 취미인 영화가 겹쳤다. "가장 좋아하는 영화가 뭐예요?" 나는 그녀에게 물었다. 이 질문은 내가 새로운 사람을 만나면 꼭 하는 질문 중 하나이다. 영화를 좋아하는 입장에서 가장 좋아하는 영화라는 것은 영화자체로만 고를 수 없는 법이다. 그 영화에 나의 삶의 결핍이나 이상향이나 추억들이 결합되어 공감했을 때 가장 좋아하는 영화가 생긴다고 생각했다. 그렇기에 나는 그녀가 궁금했다. "저는 미드나잇 인 파리 좋아해요" 그녀의 대답은 나의 마음속을 요동치게 했다. 예전에 한창 영화를 많이 볼 때 누가 이상형을 물어보면 나는 "우디앨런 영화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대답한 적도 있었다. 우디앨런의 로맨스에는 유치하지만 낭만 넘치는 운명 같은 만남이 이야기를 주로 이룬다. 그런 유치한 운명을 좋아하는 사람과는 이야기가 잘 통할 것만 같은 이유였다.



나는 연애경험이 아직 없다. 그 이유는 내가 소극적 낭만주의자로 살아왔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항상 나는 적극적으로 다가갈 생각은 하지 못한 채 그저 운명 같은 만남이 찾아오기만을 기다리며 살아왔다. 그런 나에게 운명 같은 만남이 찾아온 것 같았다. 그녀가 강의실을 나갈 때 말을 걸지 않았다면 이 만남이 성사되지 않았을 것이다. 소극적이지만은 않았던 나의 태도에 낭만 넘치는 운명 같은 만남이 성사되었다. 이 운명 같은 만남은 마치 우연들 사이에서 피어난 것 같았다. 만약 아침에 커피를 사지 않았더라면, 만약 전과를 하지 않았더라면, 만약 내가 수능을 망쳐서 이 학교를 못 왔더라면, 만약 내가 다른 나라사람이었다면. 이런 상상들부터 만약 강의실을 나갈 때 말을 걸지 않았더라면, 만약 말을 걸고 대화를 했는데 영화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내가 음악 듣는 것을 매우 싫어하는 사람이었다면. 이런 우연의 결과들이 중첩되어 우연뭉치들 사이에 운명 같은 만남이 성사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한참을 떠들다가 그녀는 다음 수업을 들으러 갔다. 가기 전에 나는 그녀에게 인스타를 물어봤다. 그녀는 흔쾌히 인스타를 알려주고 팔로우를 걸었다. 나는 이번에 전공을 2개밖에 못 잡았다. 하지만 다행스러운 점은 이 2개의 전공을 다 그녀와 함께 듣는다는 점이다. 물론 나의 전과의 목적이 그녀는 아니었지만 지금은 그녀와의 만남이 나의 목표가 되긴 했다. 다음 수업 때 보자는 말을 남긴 체 그녀는 수업에 들어갔다. 오랜만에 만난 설렘이라는 감정은 내 마음속 깊숙이 들어왔다. 당황스러울 정도로 갑자기 깊숙이 들어온 것 같다. 이 감정을 나는 마음속에 감정저장소에 저장하였다. 운명 같았던 그녀와의 만남은 푸른 나무들과 봄내음의 캠퍼스, 노란 꽃들 그리고 분홍색 가디건과 같이 다채로운 풍경과 함께 설렘이라는 감정으로 나의 마음속 깊숙이 저장되었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우리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