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정의 끝에 놓여있는 상자
2달 동안 2편의 영화를 찍었다. 하나는 동아리 친구들과 찍은 Amateur hour: A shot이다. 동아리 친구들과 짧은 영화를 하나 만드는 것이 이번 상반기의 나의 목표였다. 그를 위해 4월부터 기획을 하기 시작했다. 기획을 하면서 느낀 것이 나는 영상을 찍고 싶지만 좋은 스토리텔러는 아닌 듯싶다. 나에게는 이야기를 만드는 능력이 부족하다는 것을 느꼈다. 가끔 기발한 아이디어들은 나의 머리를 두드린다. 하지만 이를 꺼내 하니의 멋진 이야기로 만드는 것은 잘 안되는 것 같다. 어려서부터 독서를 가까이하지 않은 탓이기도 하지만 내 생각에는 감정의 부족도 큰 이유인 것 같다. 수많은 감정을 이야기에 녹여내기 위해서는 일단 나의 마음에 수많은 감정 주머니들이 많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사실 핑계일지도 모르겠다. 그냥 사실 무능력한 것일지도 모른다. 뭐 하나쯤은 잘하겠지 라는 생각이 나를 더 미궁에 빠트리는 것은 아닐지 모르겠다. 생각해 보면 오타니처럼 완벽한 사람도 있는데 세상에 잘하는 거 하나 없는 불완전한 사람이 없을 이유는 없다.
일단 나는 나의 영화의 대한 열정을 연료 삼아 영화를 찍어가고 있다. 이 번 것은 실험적인 다큐멘터리이다. 실험적인 영화를 촬영하는 다큐멘터리에 가깝다. 전부터 찍어보고 싶었던 종류의 영상이긴 했다. 이 영상에서는 7분짜리 실험적인 영화를 만드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7분짜리 영화는 "010"이라는 제목으로 찍었다. 이 영화로 전형적인 모호함을 표현하고 싶었다. 가면을 쓰고 사는 사람들 사이에서 진짜 나를 찾아가는 과정을 그린 내용이다. 하지만 이 내용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이 영화는 이 다큐멘터리에 쓰일 하나의 소재에 불과했다. 다큐멘터리에서는 이 실험적인 영화를 만드는 우리들의 모습을 굉장히 자유롭고 발랄하게 표현하고 싶었다. 위스키도 하나 챙겨 술과 농담 그리고 웃음과 함께 하는 분위기 속에서 모호한 영상을 찍어내며 그 분위기상 대비를 주고 싶었다. 그냥 우리가 혹은 내가 영화를 대하는 방식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다. 그 방식이 어떻든 그냥 내 마음에 있는 이야기를 꺼내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두 번째로는 술병이라는 영화를 찍었다. 스마트폰 영화제에 출품해 보기 위해서이다. 사실 스마트폰 영화제 라고 하면 더 제한적일 것 같지만 나의 입장에서는 오히려 반대이다. 지금까지 사용하던 빈티지한 캠코더보다 훨씬 좋은 렌즈가 이 작은 스마트폰 안에 내장되어 있다. 이것도 큰 내용이 있는 것은 아니다. 술에 취해가며 점점 미쳐가는 남자에 대한 이야기이다. 하지만 미쳐감과 동시에 묘한 자유와 해방감을 느끼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점점 미쳐가는 모습에서 느껴지는 리듬감과 긴박감 그리고 결국 선을 넘어버린 광기가 자유로움으로 표현되는 이 감정이 영화의 포인트라고 생각한다. 이 영화는 편집이 90% 끝난 상태이다. 이번에는 음악 선정에 신중을 요하고 있다. 마지막 장면에 넣을 음악을 고르는데 가장 많은 시간이 든다. open ai의 도움을 받아보려고 해도 이 친구는 내가 원하는 감정을 정확하게 인지하지 못하는 것 같다. 사실 나 자신도 잘 모르는 것 같기도 하다. 이 주인공이 도대체 어떤 감정으로 달리기를 하는지 명확하게 이야기할 수는 없다. 그 모호함을 표현할 만한 음악이었으면 좋겠다. 모호함을 표현한다는 것이 참 아이러니한 일이지만 이 부분이 가장 강조하고 싶은 부분이다.
열정의 세기가 분명 약해졌다. 의미나 목적에 종속되지 않은 채 마음에 집중해 달려 나가기로 한 다짐이 점점 뭉개지는 느낌이다. 이 영상들을 찍는 이유, 의미를 계속 찾으려고 하는 것 같다. 분명 나는 좋아서 하는데, 이렇게 영상 하나 잡으면 밤새서 편집하고 촬영하고 하는 것이 나의 열정을 대변해 주는 나의 행동이지 않을까 싶은데, 마음속에서 아니라고 말하는 소리가 환청처럼 들리곤 한다. 지금은 마음이 가는 데로 무작정 달리는 중이기는 하다. 하지만 맞바람이 쌘 건지 아니면 현실의 끈이 나의 마음을 잡아당기는 장력이 쌘 건지 자꾸만 주저하고 망설이게 되는 듯한 기분이다.
그러다 어느 순간 열정의 불꽃이 사그라들었을 때 주위를 둘러보면 텅 빈 공간에 놓여있을 듯싶다. 아무것도 없는 허무함 그 자체의 공간이다. 그 공간에는 박스 하나가 놓여있을 것 같다. 그 박스의 사이즈는 생각하기 나름이다. 박스 앞에선 나는 마치 평온해 보이기도 하다. 사실 그 속은 누구보다 빠른 심장운동을 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박스를 열고 싶은 마음은 없지만 이 텅 빈 공간에서는 박스를 열어야 할 것만 같은 운명이다. 그 박스 안에 무엇이 들어있을까? 혹시 텅 비어있지는 않을까? 정말 텅 비었다면 박스를 연 순간 나는 어떤 반응을 해야 할까? 대단한 발견을 한 것같이 환호를 하면 어떨까? 아니면 주저앉아 울어버리는 것이다. 환희인지 좌절인지 모르는 눈물말이다. 아니면 혹시 대단한 환호의 덩어리가 들어있을지도 모른다. 불투명한 박스의 외면은 그 속을 철저히 보여주지 않는다. 아니 사실 박스는 투명한데 불투명한 것은 나의 마음일지도 모르겠다.
내가 찍은 영화들이 혹은 영상들이 지금은 그저 돌멩이 같이 가치 없어 보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 박스 앞에선 나는 이 영상들이 박스 안에 고스란히 자리 잡고 있기를 바랄 뿐이다. 이 영상들은 박스 안에서 나를 바라보며 나의 식어버린 불꽃을 다시 점화시켜 줄지도 모른다는 작은 소망이다. 영화 속에는 이야기만 있는 것이 아니다. 영화를 찍은 순간이 담겨있기도 하다. 이 영상만으로는 나의 불꽃을 점화시키기에는 역부족 일 수도 있다. 하지만 영상을 찍던 순간들은 분명 나를 위로해 줄 것 같다. 아니 위로해 주기를 바란다. 영화를 찍으며 영화에게 위로받는 삶은 내가 정말로 바라던 영화 같고, 영화다운 삶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