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프터 양

"There is no something without nothing"

by 진민

기억의 조각들(無)로 본질(有)을 꿰뚫는다.



<애프터 양>이라는 영화를 보았다. 영화자체는 굉장히 단순한 이야기를 지니고 있다. 주인공이 가정용 안드로이드 로봇을 수리하는 과정을 담은 영화이다. 큰 사건이나 감정변화들이 나타나지 않기에 정적으로 느껴질 수도 있는 영화이다. 잔잔한 감정과 함께 영화가 진행된다. 영화의 진행에 여러 가지의 시선이 충돌되어 진행되기 때문에 구조적으로 직관적인 영화는 아니다. 그리고 이 영화의 감정자체도 굉장히 오묘한 감정의 흐름을 보여준다고 생각했다. 여러모로 깊은 영화라고 생각했다.


“양”은 입양된 딸을 위해 만들어진 중국계 안드로이드다. 딸은 흑인 어머니와 백인 아버지 사이에서 입양된 중국인으로, 부모는 그녀에게 뿌리를 느끼게 해 주기 위해 ‘중국인 오빠’를 만들어준 것이다. 이 "양"이 고장이 났다. 댄스배틀 도중 양은 과부하에 걸리게 되고 그대로 전원이 꺼졌다. 이 로봇을 수리하기 위해 아빠는 이 제품을 구매한 상점을 찾아갔지만 판매처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그래서 아빠는 사설 업체를 찾기로 하고 사설 업체에서 "양"의 내부를 열어본 결과 내부에 스파이웨어가 있다는 말을 듣는다. 이 스파이웨어를 들고 박물관에 찾아간 아빠는 이 부품은 스파이 웨어가 아닌 기억장치라는 이야기를 듣는다. 이 기억장치를 돌려받은 뒤 아빠에게는 두 가지 선택지가 생겼다. "양"을 사설 업체를 통해 수리해서 다시 사용하거나, 이 기억장치와 "양"을 박물관에 기증하는 것이다. 기억장치가 살아있는 로봇은 보존 가치가 있다는 식의 내용이 있다. 그래서 집에 돌아온 아빠는 이 기억장치에 접속해 "양"의 시선을 둘러보기 시작한다.




"양"은 본인이 기억하고 싶은 부분이 있으면 그것을 3~5초 정도를 기억장치에 저장하도록 설계가 되어있는 로봇이었던 것이다. 기억하고 싶은 부분이라고 하면 세상의 아름다운 요소들을 담았다고 해도 될 것 같다. 기존 SF 영화들에서 표현되는 로봇들은 감정을 지니지 않은 채로 나타나곤 한다. 이 영화의 아빠도 그런 생각을 지니고 있었다. "양"이 고장 났으니 이를 고쳐서 사용해야겠다는 생각이 우선이었다. "양"은 딸의 오빠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하나의 가전제품일 뿐인 것이다.

하지만 "양"의 시선을 둘러보면 "양"은 모든 것을 기록한 것이 아니다. 어떤 충격이 있어야 기록하는 것도 아니다. 본인이 생각하기에 아름답다고 여기는 것들을 저장했다고 생각한다. 아빠는 가장 최근의 기억부터 찬찬히 둘러보기 시작한다.



이 저장소의 기억은 주인공 가족의 가족사진을 찍는 것에서 시작한다. 자연의 빛, 나뭇잎의 흔들림 같은 찰나들, 가족의 다양한 모습들이 짧은 순간의 연속으로 저장되어 있다. "양"의 시선으로 세상을, 그리고 자신의 가족을 다시 돌아보는 아빠이다. "양"의 시선에서 본 세상을 바라보며 그저 물건이라고 여겼던 "양"이 남겨둔 감정들을 느끼게 된다. 수많은 감정들과 기억들은 각각 연결성이 없어 보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 기억들을 모아서 보면 "양"이라는 인물을 형성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가장 기억에 남는 대사가 있었다.

"There is no something without nothing."

"무가 없으면 유도 없잖아요."

양이 엄마에게 나비 설화를 이야기하던 장면이었다. 엄마가 “끝은 곧 시작이라고 믿냐”라고 묻자, 양은 “나는 그런 프로그래밍이 안 돼 있어서 모르겠어요. 하지만 괜찮아요. 끝에 아무것도 없어도.”라고 답하고 "무가 없으면 유도 없잖아요"라는 대사로 이를 잇는다.



이 대사가 왜인지 머릿속에 계속 남았다. 그리고 이 대사를 인터넷에 검색해 보고 노자의 도덕경의 유무상생(有無相生)에 대한 강의를 찾아보았다. 세상은 있는 것과 없는 것의 긴장 속에서 유지된다는 것이. '유'와 '무' 두 개념이 서로 대립하며 공존한다는 것이다. '유’는 눈에 보이는 실체이고, ‘무’는 형태는 없지만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는 공간이다. 예를 들어 '방'은 벽이 아니라 그 안의 비어있는 공간, 즉 '무' 덕분에 존재한다. 강의 속에서는 '시작'이라는 상태에 관한 이야기를 했다. '시작'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시작은 준비와 출발 단계의 교차지점일 뿐이다. 이는 우리의 눈으로 관측될 수 없으며 실존하지 않는 존재이다. 하지만 이 시작이 없다면 어떠한 결과도 나타나지 않는다.




'끝'이라는 단어는 불확실함을 낳는다. 끝이라는 것은 미지의 세상 앞에 존재하는 문과 같다. 이 문을 열었을 때 밝은 내일 존재할 수도 있다. 하지만 문을 열기 전까지 우리는 불확실함의 두려움을 느낄 뿐이다. 이 '끝' 또한 바로 '무'의 형태라고 생각한다. "양"은 "끝에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아도 괜찮다"라고 말하며 '무'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 같았다. '무'가 있어야 '유'가 있고 '유'가 있어야 '무'가 있는 법이다. 이 서로는 무엇이 좋고 나쁘고 가 아닌 서로 공생하는 관계임을 "양"은 이미 알고 있는 듯했다. 그는 인간보다 더 깊은 통찰을 지닌 것처럼 보이기도 하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을 정의하려는 시도는 종종 허무로 귀결된다. 삶에 대한 목적과 의미를 쫒는 행위가 그렇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불확실함을 확실한 언어화, 시각화를 하여 우리의 두려움을 해소하려 한다. 하지만 삶의 목적과 의미에 대해 고민을 하면 할수록 우리는 공상과 상상의 굴레를 벗어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결국 세상에는 우리 눈에 보이며 우리의 통제하에 존재하는 '유'의 영역과, 보이지 않으며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무'의 영역이 공존하고 있다. 통제할 수 없는 영역을 인지하는 순간 우리는 불확실함에서 벗어날 수 있으며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 긴장상태의 두 영역의 조화를 우리는 '아름다움'이라고 부른다고 생각한다.

끝이 있음을 인지한 순간 우리는 시작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끝을 인지하는 순간 우리는 아름다움을 향한 여정을 떠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아빠는 "양"을 그저 물건으로만 생각해 왔다. "양"이 고장 난 뒤 로봇으로써 그의 가치는 없어졌다. 수리를 하거나 폐기처분 하던가 둘 중에 하나이다. 하지만 "양"의 기억들을 감상한 뒤 아빠는 양을 박물관에 기증하기로 한다. 박물관에 기증한다라는 의미는 "양"의 죽음을 인정한다는 의미라고 생각한다. 죽음을 인정한다는 것은 로봇이나 물건으로 대하는 것이 아닌 같은 가족 즉 인간으로 대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양"의 기억들은 단순한 시선과 감정의 저장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 기억들은 "양"의 존재이며 "양" 그 자체라고 생각한다. 이 기억들도 실체는 없는 존재이다. "양"의 본체도 이미 사라졌다. 이제 '무'의 형태로 남아버린 "양"이다. 하지만 그는 아직도 가족들과 보이지 않는 관계를 맺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이는 그의 존재에 대한 매우 영화적인 존경의 표시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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