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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원 May 19. 2023

해맑아지고 싶은 우울감.

  아이들은 여전히 밝다. 물론 초등 6학년 딸아이는 간혹 날카로운 말들을 뱉어내지만, 동생과 놀 때의 모습을 보면 영락없이 어린이이다. 지난 5월 5일은 친구들은 마지막 어린이날이라고 하지만 자기는 아직 어린이라서 내년 어린이날에도 선물이 필요하다며 깔깔깔 웃으며 얘기하기도 한걸 보니, 아직은 해맑은 어린이가 맞긴 하나보다.

  주짓수를 배우는 두 아이들은 틈이 나면 집에서 주짓수 기술 연습을 하듯 둘이 놀곤 한다. 장난꾸러기 아들 녀석은 자기 누나에게 지나가다 툭 장난을 치고, 그것을 가만두지 않겠다는 딸아이는 주짓수 기술을 넣어 아들 녀석을 혼낸다. 그러면서 둘은 깔깔깔 웃으며 또 주짓수를 한다.

  아이들의 밝음을 볼 때면 그래도 안심이 된다. 누군가가 우울은 바이러스 같은 것이라며, 특히 집에 우울증을 앓고 있는 사람이 있으면 그 집의 분위기는 암울 그 자체라고 얘기한 걸 들은 적이 있어서 아이들이 제일 걱정이 되었다. 아이들에게 나의 우울감이 전이가 되어 있으면 무슨 수로 이 아이들의 얼굴을 볼까,를 생각해 본 적이 있다.

   그래도 아이들의 밝은 웃음소리에 정신을 차려보고, 이겨낼 힘을 내본다. 참 아이러니하다. 내게 가장 힘들고,  날 가장 힘들게 하고,  가장 자신감이 떨어지는 분야가 육아인 것 같은데.... 아이들이 내게 가장 큰 힘이고, 힘을 내게 하는 원천이 되기도 하니 말이다.  육아를 하지 않았다면, 내 첫째 아이가 공부에 조금의 재능이라도 있었더라면 난 이런 우울감은 느끼지 않았을까? 아니, 내가 육아에 혼혈의 힘을 기울이지 않았더라면, 육아를 대충 하기로 마음먹었더라면 이런 절망감, 우울감을 겪지 않아도 됐을까?

  더 행복하고 싶어 결혼을 했고, 둘 보다는 셋이 더 좋을 것 같아 첫째 아이를 낳았고, 셋보다는 넷이면 얼마나 좋을까 희망을 가지고 둘째를 낳는 어려움을 이겨냈다. 난 희망만 보았었다. 희망이 있었기에 독박육아를 할 때의 몸이 힘든 것은 얼마든 이길 수 있었다. 넷이서 정말 더  잘 살기 위해 내 몸이 좀 더 움직이고, 만성피로가 생기는 것 따위 두려워하지 않았다.  어두움을, 잘못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보지 못했다.

  그런데 그 희망이라는 커튼이 조금씩 찢겨감을 느끼게 되는 순간부터 마음이 조금씩 가라앉고, 못된 생각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땅으로 점점 가라앉으려는 안개처럼.  내 욕심이었을까? 내 만족을 채우기 위한 가족 형성이었나? 혼자 반성해 본다.


  아이들의 해맑음을 지켜주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 "현대인에게 우울증은 감기 같은 것이다. 그러니 난 나을 수 있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 성적보다 행복이 먼저니까.

내가 행복해야 아이들을 지킬 수 있으니까.

내 아이들을 지켜야 내가 사니까.



나는 내 우울에게 말을 걸어본다.

"힘들지? 너도 네 모습이 힘들지?

너무 애쓰면 살았다. 그래서 그래. 누구보다 열심히 살았으니 그만큼 삶에 대한 기대가 있었겠지.

그런데 지금만 살다 오늘 죽을 거 아니니,

지금 현재만 보는 어리석음은 떨쳐버리자.

똑똑하잖아. 그리고 너 자신을 많이 사랑하잖아.

그러니 내일을 위해 오늘의 해맑음을 포기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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