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서 완벽한 여행

나의 계절은 봄이다

기나긴 겨울은 마침내 봄을 데려 온다. 언제나 그러했듯 봄을 쫓아 여름도 오고 있다.

봄을 따라 길을 떠났고, 봄을 찾아 길 위를 헤매었고, 마침내 뉴질랜드에서 답을 찾아가고 있다. 어느 햇살이 눈부시던 날, 나는 집 근처 공원을 걸었다. 곧게 뻗은 길 양쪽에는 하늘이 닿을 만큼 훌쩍 커버린 커다랗고 높은 나무가 줄 지어 서 있다. 한국에서는 길을 걸을 때 습관적으로 땅을 딛고 있는 아래쪽, 그러니까 발 쪽을 자주 보며 걸었다. 뉴질랜드에서는 저 멀리 먼 곳을 응시하며 걷곤 한다. 어느 때와 같이 먼 곳을 보며 걷다 보니 햇살에 반짝이는 잎들이 하늘의 반짝이는 별처럼 보인다. 나는 걷던 길을 멈추고 잠자코 눈을 감았다. 바람이 지나가는 소리가 아주 먼 곳에서 메아리치는 파도처럼 잔잔하게 귓가를 스쳐 지나간다.


한참을 듣고 있다 눈을 떠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을 바라보면 나를 향해 '너는 괜찮아. 지금 길을 잃지 않았어. 너는 지금으로도 충분해.'라고 속삭이는 것 같다.


여행이 길어지다 보면 나를 잃어 가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 그럴 때는 가만히 눈을 감고 피부로 귀로 느껴본다. 직접 경험하여 느낄 수 있는 뉴질랜드의 삶, 온전히 느낄 수 있는 여행의 소중함을 다시금 느끼게 한다.


완벽한 여행은 없어. 모든 것이 계획한 대로 검색한 대로 이뤄지지 않아.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행은 완벽해. 내 안에 새로움으로 가득 차 낯선 곳을 떠날 때 즘에는 익숙함으로 새겨지거든. 그런 게 여행이야.


스쳐 지나가는 인연으로 채워지는 여행과 한 곳에 짐을 풀고 멈춤으로 이어지는 여행은 다르다. 멈춤은 곧 새로운 시작이다. 내가 자유로이 할 수 있었던 곳을 떠나 낯선 곳으로의 여행은 나를 새로 태어나게 한다.


낯설음으로 채워지는 시작은 그러하다. 자유롭지만 어색하고, 두렵지만 용감해지고, 새로움에 주저하지 않는 것.


이것이 멈춤으로 이어지는 여행에 필요한 것들이다.


가끔은 길을 걷다 보면 잔디에 피어 있는 노란 꽃, 보라색 꽃, 주황색 꽃을 만난다. 각자 다른 빛깔의 꽃들이 길가에 모여 피여 난다. 따로 또 함께 인 것. 인생의 빛깔과 닮았다. 모두가 함께 인 것 같지만 그렇지 않은 것. 한국은 모두가 공부를 해야 하고 모두가 좋은 성적을 내야만 하는 '모두'의 잣대로 삶을 제단 한다. 모두라는 것 안에서 안정감을 얻고, 경쟁도 해야 한다. 모두가 좋은 성적을 내고, 좋은 대학을 가고, 좋은 직장을 얻기 위해 경주마처럼 달리기를 한다. 자칫 잘못하여 주저앉기라도 하면 조바심이 나 가슴이 턱턱 막힐 때가 있다. 어른이 되어도 마찬가지였다. 자녀를 낳아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나의 자녀는 다른 삶의 방식을 살아가길 원했다.


지나가는 바람, 흘러가는 구름, 피고 지는 수많은 꽃들을 바라보며 자라나기를 원했다.

나의 딸은 매일 아침 7시 45분에 일어난다. 일어나자마자 간단하게 고양이 세수를 한다. 학교를 가기 위해 교복을 입고 맨발로 집을 나선다. 양치는 무조건이다. 학교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가며 길가에 핀 이름 모를 꽃들을 꺾어 작은 손에 맞는 작은 꽃다발을 만든다.


'엄마, 이건 이건 딜런 꺼. 이건 애슐리 꺼. 이건 하퍼 꺼. 이건 릴리 꺼... 친구들이 좋아할 것 같아. 빨리 가서 줘야지. 엄마. 내 친구들은 정말 좋은 아이들이야. 나는 언제까지 이 친구들과 함께 할 수 있을까? 나는 이곳에 있는 게 정말 행복해.'

나의 딸은 작은 새가 되어 쉴 새 없이 이야기를 한다. 신나게 꽃다발을 만들며 걷다 보면 자주 커다랗고 선명한 무지개를 만난다. 운이 좋으면 쌍무지개가 아닌 3개의 무지개를 만날 때도 있다. 작은 손에 든 꽃다발과 무지개를 향해 걷다 보면 건널목에 선다. 선생님과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길을 건너면 어느새 학교 정문이다. 맨발로 성큼성큼 교실을 향해 걸어 들어간다. 언제나 그렇듯 선생님은 환한 미소로 인사를 하고, 친구들은 달려와 안긴다. 나의 딸은 등교하는 길에 만든 작은 꽃다발을 하나씩 나눠 준다. 친구들은 하나 같이 너무 예쁘다며 환한 미소로 다시 한번 안아 준다.


이름 없는 들판의 꽃들은 소녀들의 가슴에 사랑으로 내려앉는 순간이다. 작은 선물에도 행복해하고, 이름 모를 꽃들을 엉성하게 만든 꽃다발에 행복이 뚝뚝 묻어난다. 아이들의 순수함은 이런 것이다.


아이들의 순수함이란 서로의 것을 깎아 내리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것으로 받아들여 행복과 사랑으로 가슴에 쌓이는 것.


어른인 내가 만들어 줄 수 있는 행복과 사랑과는 결이 다르다. 멈추어 여행을 하는 우리는 봄날이다. 봄을 따라 밝은 빛을 향해 걸어가는 중이다.

위대한 여행은 위대한 사람을 만든다. 지금 이곳의 봄은 나의 가슴을 웅장하게 만든다. 몇 달 전 나는 남편과 함께 딸기 모종과 당근 모종을 사서 큰 화분에 심었다. 봄 햇살에 나의 딸기는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었고, 당근은 화분 깊숙한 곳으로 자라나고 있다. 요즘은 매일 아침 딸기 3~4개를 딴다. 흐르는 물에 슥슥 대충 씻어 우리 집에서 가장 예쁜 그릇에 담아 둔다. 아침에 나의 딸과 함께 3 식구가 간 밤에 익은 딸기를 먹는다.

학교를 마치고 돌아오면 나의 딸과 함께 당근 2개를 뽑는다. 작지만 알차게 주황빛을 띠는 당근의 흙을 털털 털어 흐르는 물에 슬렁슬렁 씻어 아그작 씹어 먹는다. 나의 딸의 얼굴은 어느새 반달눈에, 입안 가득 주황빛으로 가득 찬 작은 입을 활짝 벌린 채 웃는다. 작은 손으로 뽑은 당근을 먹으며 집 앞 나무에 집을 짓고 알을 품고 있는 어미 새와 눈이 마주친다.

바다에서 주워온 작은 돌멩이가 있다. 집에 돌아와 정리를 하고 보니 나의 딸이 화장실에서 콧노래를 부르며 무언가를 열심히 씻고 있었다.


"뭐 해? 예진아?"

라고 물었었다.


"엄마. 내가 이 돌멩이에게 향기를 입혀주고 있어. 그리고 얼굴도 그려줄 거야. 향기와 얼굴을 선물할 거야."


바다에서 한참을 찾아 주워온 돌멩이에게 새로운 삶을 선물하려는 나의 딸. 라벤더 향을 입은 고양이 돌멩이는 그렇게 나의 딸의 친한 돌멩이 친구가 되었다. 다음날 학교 책가방에 넣어 친구들에게 보여줬다. 나중에 보니 친구들도 하나씩 고양이 돌멩이를 들고 다니고 있었다. 그리고 아이들은 각자 만든 고양이 돌멩이로 오랫동안 스낵타임의 쉬는 시간에 고양이 가족 놀이를 했다.

미니어쳐 장난감을 사준 적이 있다. 미니어쳐 그릇을 깨끗이 씻어 엄마를 위한 떠먹는 초콜렛을 만들어 준 적이 있다. 미니어쳐로 떠먹는 초콜렛이라니!! 너무 맛있잖아!!

가끔은 이 모든 것이 현실인가 싶을 때가 있다.


현실적이지는 않은데 그렇다고 가족 영화는 아닌데 동화같은 상황.


나의 봄날 여행은 미완성이다. 진정한 삶을 위한 멈춤의 여행은 계속이다. 이 여행이 언제 끝이 날지 알 수는 없다. 애초에 기약 없이 떠난 여행에 짐을 풀고 눌러앉았으니까. 나의 딸과 함께 하는 이 여행은 행복과 웃음으로 가득 차 있다. 매 순간을 즐기고 느끼며 살아가는 여행은 후회가 없다. 여행의 즐거움을 온몸으로 표현하는 나의 딸이 있다.

지금 나는 가장 완벽한 여행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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