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뉴질랜드는 여름이다. 시간은 흐르고 계절은 변한다. 나의 딸은 점점 더 밝아져 우주를 뚫고 나갈 기세다.
나의 시간은 매일 특별할 것 없이 잔잔하게 흐르는 물처럼 흘러간다. 가끔 그런 걸 느낄 때가 있다.
지금 내가 속한 이 세계의 시간은 천천히 느리지만 익숙하게 흘러가고 있어.
새파랗고 높다란 하늘과 푸르고 깊은 바다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기분이 좋아진다. 즐겨 듣는 노래를 흥얼거리며 멍하니 바라보게 된다.
나이 40대가 되고 보니 인생에서 원하는 것들을 조금씩은 이루어졌고, 지금은 20대 때보다는 안정적으로 살아가고 있다. 20대 때는 무언가를 이루어 내기 위해 계획하고, 노력하고, 치열하게 경쟁했었다. 그 시기를 지나고 지금은 평화롭기 그지없다. 요즘 나의 가슴을 두근거리게 하는 일은 무엇일까?
바로 해루질! 해루질로 잡은 생물을 집으로 가져온다. 식재료로 손질이 끝난 생물은 곧장 보글보글 물이 끓어오르는 냄비와 기름을 두른 팬으로 직행한다. 각종 야채, 소스와 함께 조리가 된다. 마지막 마무리는 다시다 한 숟가락 뿌리면 끝이다. 마침내 완성된 근사한 요리는 나의 식탁에 오른다.
나는 해루질을 하러 가기 전에 항상 구글에서 Low tide를 확인한다. 시간대별로 바닷물의 높이가 자세히 나와 있으니 체크를 하고 가면 허탕 치는 경우가 작다. 바다에 갈 때 필요한 도구들이 있다. 나는 반드시 집게와 뜰채, 잡은 생물을 들고 올 수 있는 뚜껑 달린 큰 통, 장갑을 챙겨 간다. 뉴질랜드의 바닷속에는 한국인이 좋아할 해산물들이 많이 있다. 논현동에 가끔 가던 해산물집이 있었다. 가난했던 20대는 오징어회를 주로 먹어야 했지만 말이다. 어쩌다 한 번씩 먹어봤던 해삼, 성게가 뉴질랜드 집 근처 바다에 살고 있다. 문어도 산다. 문어의 반질 반질한 민머리가 보인다. 문어를 발견하면 그 즉시 맨 손으로 미역줄기 잡아 뜯듯이 잡아 건져 올리면 된다.
그냥 줍고 건지자.
눈을 크게 뜨고 보면 보인다. 가끔 스노클링으로 더 많이 다양한 품종을 잡아가는 한국인들도 있다. 하지만 우리는 3 식구니까. 많이는 필요 없다. 굳이 잡아서 냉동실에 얼려서 꺼내 먹고 하는 수고로움은 필요가 없다. 그날그날 먹을 만큼만 잡으면 그만이다.
다음에 또 잡으러 오지 뭐. 다음에 또 잡아서 먹으면 되는데 뭐.
살다 보니 조금은 알 것도 같다. 가족과 함께 하는 이 순간이 얼마나 행복하고, 지금의 청춘이 얼마나 빛이 나는지 말이다. 20대처럼 맑은 빛을 내는 청춘이 아니더라도 40대의 청춘도 지금 이 순간인 것이다.
나의 사랑하는 가족과 함께 바다를 누비는 자유를 누릴 수 있다니. 얼마나 멋진가.
가끔은 있는 자채만으로도 존재 자체 만으로도 위로를 받을 때가 있다. 해루질을 막 끝내고 나무 그늘 아래 앉아 도시락을 먹으며 바다를 바라보고 있을 때가 그럴 때다.
누군가를 카페에서 만나 2시간, 3시간 주제 없이 그냥 주저리주저리 정신없이 수다를 떨고 싶을 때가 있다. 불행하게도 뉴질랜드에서는 불가능하다. 나의 영어가 원어민 처럼 되지 않으니까. 그럼에도 최선을 다해 수다를 늘어놓으려 애쓴다. 언젠가는 영어가 늘겠지만, 영어가 늘려면 나의 노력이 필수로 필요하다. 학원도 다니고, 적극적으로 키위 친구도 만들고. 그런 노력이 있어야 비로소 영어가 늘기 시작한다. 영어가 늘지 않는다 하여 조급해할 필요도 상처받을 필요도 화를 낼 필요도 없다. 좌절감도 느낄 필요가 없다.
영어는 나의 모국어가 아니다. 나의 제2의 언어이다.
종종 키위 친구들과 파티를 할 때가 있다. 처음에는 당연히 어색하고 위축되고 긴장한 채로 파티의 즐거운 분위기를 충분히 즐기지 못 했다. 지금은 어떨까? 지금은 한층 뻔뻔해져서 정신없이 틀리든 맞든 그냥 이야기를 늘어놓는다. 키위 친구들과 함께 파티를 하며 다 알아듣지 못하더라도, 그때의 그 분위기, 웃음소리로 기억 남는다. 그날 충분히 즐거웠고, 행복했고, 편안했으면 된 것이다. 그런 분위기에서는 충분히 나의 입이 따발총이 된다. 맥주도 한잔 했겠다, 친구들이겠다, 편안하니까. 나의 스피킹이 문법에 맞지 않더라도 주저리주저리 입 밖으로 튀어 나가 진다. 실제로 나의 영어가 목구멍에서 그대로 튀어 나간다.
목구멍식 영어가 필요해. 머리로 하는 영어 말고. 깊게 생각하지 말고 그냥 툭툭 뱉어 보는 거야. 까짓 거 어때.
외국인인 나를 파티에 초대하는 키위들은 이미 나를 이해하고 있잖아. 그러니까 걱정이나 긴장은 잠시 내려놓고 그 안에서 충분히 파티를 즐기면 된다. 그럴 수 있다. 왜냐고? 키위가 초대한 파티니까. 그 키위는 언어의 장벽을 뛰어넘어 한국에서 온 나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니까. 부족한 영어여도 이해하니까.
개떡 같이 말해도 찰떡 같이 알아듣는다. 키위들은 그렇다. 물론 처음 낯선 이를 만났을 때의 경계심은 있지만 말이다. 그 경계심은 이내 호기심이 되고, 그 호기심은 우정으로 이어지곤 한다.
나를 둘러싼 모든 시간은 나를 감싸 안아 준다. 바다, 키위, 나무, 숲, 동물, 이웃집 머피까지 말이다.
언젠가 내가 나이가 들어 할머니가 되었을 때 눈을 감으면 오늘이 보일 것이다. 파도치는 바다를 자유롭게 거닐고,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을 느끼고, 새까만 하늘을 수놓은 수많은 별들을 바라보며 오늘을 지냈던 뉴질랜드 타우랑가에서의 삶이 그려질 것이다.
영원히 기억될 추억이다. 추억은 위대하다. 나는 무엇으로부터 위로받을까? 나의 추억으로부터다. 모든 기억의 시작과 끝은 추억에서 시작한다. 눈을 감으면 보일 것이고, 귀를 닫으면 들릴 것이며, 손을 뻗으면 감촉이 전해질 것이다. 바로 그 순간 나는 저장된 기억 속으로 들어가 그날을 그때를 느끼고 만지고 볼 수 있다.
시간이 흐른다. 그 시간만큼 나의 사랑하는 딸, 리나의 영어도 쌓여간다. 친구와의 추억도 쌓여간다. 지금 방학기간이다. 요즘 더 자주 친구들이 놀러 온다. 친구집에 놀러 갈 때도 있다. 한국에서는 친구가 집에 자유롭게 자주 놀러 와 놀던 때가 언제였을까? 내가 어릴 때였나? 요즘은 한국에서는 아이만 덜렁 친구집에 몇 시간씩 보내기 어려운 현실이다. 뉴질랜드 타우랑가에서는 자유롭게 오고, 자유롭게 간다.
Hi, THen. Whould you come over after 12:00?
아침에 눈을 뜨면 문자가 와있다. 아침 7시. 리나의 키위 친구들 부모는 아침 일찍 일어나 하루를 시작하니까 문자도 당연히 아침에 보내놓는다. 그들은 알고 있다. 우리가 8시에 일어난다는 사실을 말이다. 내가 진작에 말을 해뒀다.
나는 주말에 아침 8~9시에 일어나. 네가 아침 7시에 문자를 보내도 내가 바로 답장을 못할 수도 있어. 괜찮아?
그러면 키위 친구 부모는 대답한다.
당연하지. 괜찮아. 나도 아침에 일어나서 아이들과 바다도 가고 트레킹도 하니까. 네가 일어나면 답장해도 시간은 충분해.
답장이 왜 안 오지 휴대폰을 들여다보며 스트레스받을 일 도 없고, 문자를 늦게 보냈다고 해서 가슴 졸일 일도 없다. 시간이 흐르는 데로 자유롭게 하면 그만이다. 아무도 늦게 확인했다고, 늦게 답장했다고 보채지 않는다.
휴식이 필요하다면 지금 당장 잠시 일어나 건물 밖을 걸어 나가 햇살 아래 잠시 서 보자. 그리고 몇 발자국 걸어보자. 그냥 가만히 주위를 응시해 보자. 그것만으로도 위로가 될 때가 있다.
스트레스 타파~!
스트레스는 만병의 근원! 그냥 멍하니 흘러가는 시간대로 스쳐 지나가는 이들을 바라만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지나가는 이들의 모습을 보며 지난날 나의 추억이 떠오를 테니까. 행복하고 즐거운 추억이 많을수록 우리는 비워내기가 가능하다.
원래의 나의 모습을 찾아 가는 일. 세상에 지쳐 나의 빛을 잃지 말자. 어느 곳에 있던지, 무엇을 하든지 나의 세계는 나를 위해 존재해야만 한다. 그래야만 온전한 나의 빛으로 이 세계를 가득 채워 나갈 수가 있으니까.
가끔은 우리 모두 비움으로 가득한 햇살 맑은 날을 보내야 할 때가 있다. 그래야만 한다. 그래야 우리는 비워낼 수 있다.
타우랑가의 눈부신 햇살을 카메라에 담을 수만 있다면 좋겠다. 모두와 함께 공유하고 싶다. 눈물이 날 만큼 쨍한 빛의 기운이 이런 것이란 걸 보여주고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