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학창 시절 일반 학교를 다녔고 공부방도 다녔습니다. 부모님께서는 저를 비장애인들과 다르게 대하지 않으셨고 똑같이 대했습니다. 그 덕분에 더 강인하게 자랄 수 있었지만 그 과정에서 억울하고 힘든 것이 많았습니다. 지금도 보조기기에 대한 사람들의 이해와 용인이 부족하지만 이때만 해도 보조기기는 그저 신기한 구경거리였습니다. 그런 데다가 휴대가 용이한 보조기기가 제대로 없었기 때문에 집을 제외한 다른 장소에서는 보조기기를 사용하기 어려워 거의 맨눈으로 공부했습니다. 또한, 입시전략을 장애구분모집에 맞게 설정했어야 했지만, 그에 대한 정보를 알려주는 사람도 없었고 스스로도 알기 어려웠습니다.
처음 초등학교와 중학교 때까지만 해도 반에서 상위권이었지만 고등학교에 올라오니 눈에 대한 제약으로 격차가 점점 차이가 벌어져 갔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모르겠고 누구를 위해서 공부를 하는지도 모르겠어서 고1 때에 방황을 했습니다. 누구도 저의 처지를 이해해주지 않았고 다들 1, 2등급 나온다는데 너는 뭐냐며 무시만 했습니다. 저의 부족함은 스스로 알아서 보완했어야 했습니다. 거기에서 많은 자괴감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고2가 시작되는 봄에, 성적 높은 사람들 위주로 합의 없이 시간을 조정하는 등 대놓고 차별하는 공부방 원장과 대판 싸우고 다녔던 곳을 나왔습니다. 그리고 학교자습실에서 주간스케줄을 짜며 홀로 공부했습니다. 전 눈이 안 좋다 보니 언어와 외국어를 집중해서 읽기도 어려웠고 제시간에 풀기도 어려워서 읽는 훈련을 반복적으로 했습니다. 그리고 수리영역은 과외를 받았고 사탐영역은 보충수업을 듣고 복습했습니다. 다행스럽게도(?) 수능시험에 EBS 출제율이 높았기에 반복학습하고 학교 선생님들에게 질문하면 점수를 올릴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렇게 6개월 공부하니 내신이 2등급까지 올라갔고 친구의 권유로 학교 특별반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곳에 들어가 보니 공부 잘한다는 애들이 다 모여 있었고 그곳에서 전 맨 꼴찌였습니다. 그렇게 고2 여름부터 1년 동안, 학교에서 밤 11까지 공부하고 집에 가서 야식을 먹고 2시까지 집 앞 독서실에 서서 2까지 공부했습니다. 수능능 100일을 남았을 때에는 혼자 공부하기 위해 특별반을 나왔습니다. 다들 그렇게 하다 패턴이 무너져서 시험을 망한다고 걱정을 했지만 저는 보조공학기도 써야 했고 시험시간도 1.5배였기 때문에 저만의 페이스를 만들어 놓아야 했습니다.
그렇게 수능당일이 되었고 시험장으로 향했습니다. 아직도 여의나루공원을 지났던 공기와 분위기, 감정이 생생합니다. 시험당일 아침엔 공기가 유독 더 추웠고 마주 편에 분주했던 응원에 비해 제가 갔던 수함장 학교는 응원하는 사람들이 없어 조용했습니다. 1교시 언어영역을 보고 2교시 수리영역을 볼 때는 시험에 집중하느라 주위를 신경 쓰지 않았는데 점심을 먹고 시험장을 둘러보니 전맹인 분들이 많았고 나름의 방법으로 다들 시험을 보고 있었습니다. 시험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는 길 홀가분한 마음보다는 이렇게 나의 학창 시절이 지나갔구나라는 아쉬움이 들었습니다. 얼마 후 시험점수가 나오고 고등학교 교사셨던 교회선생님의 입시지도로 대학에 들어가게 됐습니다.
일반 학교를 다니며 더 많은 것을 보고 배울 수 있어서 좋았지만, 제 밥그릇을 찾는 것이 어려웠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게 뭔지, 잘하는 게 뭔지를 알아볼 수 있는 환경이 아니었습니다. 그저 비장애인들의 루트를 흉내 내는 게 최선이었습니다. 지금은 정보의 접근성이 더 좋아지고 다양성도 이전보다는 인정받을 수 있어서 나만의 전략을 짜기가 더 수월해졌지만 제가 입시준비할 때는 입시담당 선생님께서 관심을 가져주지 않는 한 자세한 정보를 알기가 어려웠습니다. 비록 아쉬웠던 부분이 있었지만 전 스스로 살아남는 방법을 배우며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