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뒤 미카엘이 다시 연락해 왔다.
나는 그에게 그 친구는 어떻게 됐냐고 물었고,
그는 끝냈다고만 말했다.
나는 너의 마음이 확실하지 않다면
더 이상 만나지 않겠다고 했지만,
그 말을 하는 나조차 그럴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었다.
카페에서 일하던 중 그에게서 문자가 왔다.
“I’m not sure if I’m ready to commit to someone.
I need time to think.”
(누군가와 진지하게 관계를 시작할 준비가 됐는지 잘 모르겠어.)
생각할 시간이 필요해.)
나는 함께 일하고 있던 마리아에게
우리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마리아는 우리 사이를 알고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녀는 내 한국 이름을 발음하기 어려워해
“마이윤~” 하고 내 성으로만 불렀다.
내 이야기를 들은 그녀는 안쓰러운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My Yoon… love yourself as much as you love him.”
(마이윤… 네가 지금 미카엘을 사랑하는 마음만큼 너 자신도 사랑해 줘.)
또래였지만 마리아는 세상을 오래 겪은 어른처럼
느껴질 때가 많았다.
그 말은 가슴 깊은 곳에 박혔다.
무슨 뜻인지는 알 것 같았지만,
어떻게 해야 하는지는 몰랐다.
우리는 그렇게 애매한 관계로 다시 함께 시간을 보냈다.
그의 룸메이트들과 하이킹을 가거나
그의 집에 머물기도 했지만,
그는 자주 무신경했고 피곤해 보였다.
나는 그가 우리가 연락하지 않는 동안 만났다던
그 여자와는 어떻게 된 건지 알고 싶었지만,
계속 묻기에는 자존심이 상해
그가 잠든 사이 휴대폰을 몰래 봤다.
확실히 알아야 내 마음도 정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당연히 그 여자는 전 룸메이트 레이자일 거라고 생각했다.
매일 드라마를 보듯
그녀의 스토리 속 그와 함께한 모습들을 지켜보며
그에게 남아 있던 마음이 아직 클 거라 생각했으니까.
그런데 그의 문자에는 레이자가 아닌
다른 여자와 주고받은 메시지와 사진이 남아 있었다.
문자 내용은 초기 연애의 남녀가 나누는 대화 같았지만,
깊은 마음처럼 느껴지진 않았다.
마지막 대화에선 그녀는 다시 밴쿠버로 돌아왔고,
둘은 다시 만난 것 같았지만 그 뒤의 내용은 없었다.
미카엘은 나에게 했던 방식으로 그녀와도 헤어진 걸까.
그는 왜 누구에게도 마음을 정해 주지 못했던 걸까.
이유를 알 수는 없었지만,
나는 결국 그가 나를 그만큼 사랑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받아들이는 순간,
마음 한쪽이 깊이 가라앉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그와 시간을 보내다가도 밤이 되면 집으로 돌아갔다.
그가 새벽에 일어나야 해서 일찍 잠들기도 했지만,
그렇지 않은 날에도 그는 나를 데려다준 적이 거의 없었다.
함께 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어떤 순간에는 깊은 곳에서 수치심이 불쑥 올라왔고,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외로움이 따라왔다.
그가 무신경하게 굴면 참기 어려웠고,
나는 종종 화를 냈다.
하지만 다시 연락이 오고 그의 얼굴을 보면,
나는 다시 그를 사랑하는 사람으로 돌아갔다.
집 근처 언덕에는 성당이 하나 있었는데
입구의 큰 십자가상이 가로등에 반사되어
바닥에 길게 그림자를 만들었다.
나는 그를 만나고 집에 가는 길에
그 그림자 위에 종종 서 있었다.
이 관계가 계속 이어져도 괜찮은 건지,
아니면 여기서 멈춰야 하는 건지,
답을 알고 싶었다.
나는 어느새 미카엘에게 맞춰 움직이고 있었다.
그가 원하는 것을 먼저 알아차리고,
자연스럽게 그에 맞게 행동하고 있었다.
그가 그렇게 보는 건 괜찮았지만,
다른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볼지는 신경이 쓰였다.
그의 룸메이트들은 내가 어떤 상태로
그 집에 오게 되었는지,
그전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다 알고 있을 것 같았다.
미카엘은 항상 침대 옆 협탁에 캔들을 켜두고,
그 불빛을 바라보다 잠들었다.
촛불을 보고 있으면 마음이 편해진다고 했다.
그의 불안정한 모습을 느낄 때마다
나는 더 단단해져야 할 것 같았다.
그가 육체노동을 하고 있었고,
학생 비자로는 파트타임으로밖에 일할 수 없어
밥도 제대로 먹지 못하고 렌트비도 밀려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나는 티 나지 않게 라면이나 마카로니 같은
간단히 먹을 수 있는 것들을 사서 가져다주었다.
그는 내 생일에 와인 한 병과 카드를 건넸다.
물질적으로 줄 수 있는 건 많지 않지만,
우리가 함께 바라볼 수 있는 것들이 남아 있다는
문장이 적혀 있는 , 별이 반짝이는 그림이 그려진 카드였다.
그가 직접 쓴 말은 아니었지만,
그 안에서 처음으로 그의 마음을 본 것 같았다.
미카엘이 잘 타는 나무가 있었던 것처럼,
나에게는 자주 안는 나무가 생겼다.
우리가 처음 함께 갔고,
그 뒤로는 혼자서도 거의 매일 가던 공원 안의 나무였다.
처음에는 손을 올려봤고,
그다음에는 귀를 대봤고,
어느 순간부터는 자연스럽게 안고 있었다.
그 나무를 안고 있으면
조금은 가라앉는 느낌이 들었다.
미카엘은 그런 나를 웃으며 바라봤고,
친구들에게 나무를 안는 사람을 본 적 있느냐고 묻기도 했다. 친구들은 무슨 소리냐며 웃었다.
내가 미카엘이 나무를 타는 모습을 보고 반했다고
말하고 다녔던 것과 비슷한 마음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그의 쉐어 하우스에서 함께 살기로 했다.
그가 처음 제안했을 때는 내키지 않았다.
함께이고 싶었지만, 그 집에 머무는 것은 불편했다.
그리고 그 제안이 렌트비 때문인지,
아니면 나와 함께하고 싶은 마음 때문인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를 사랑하는 마음에 대해서는 확신이 있었지만,
그의 마음은 여전히 분명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하늘이 붉지도 파랗지도 않던 어느 저녁에
나는 다시 두 개의 수트케이스에 짐을 쌌다.
미카엘과 나는 가방을 각자 하나씩 끌고
내가 자주 안는 나무를 지나, 언덕 위의 성당을 지나
그의 집으로 함께 걸어갔다.
조용한 밤길에는
수트케이스 바퀴 소리만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