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자주 갔던 집 앞 공원에서 만나기로 했다.
몇 개월 내내 내리던 비가 잠시 그쳐 있었고,
봄비에 젖은 흙냄새가 올라왔다.
공원을 걸으며 헤어지던 날 밤, 그의 눈동자를 떠올렸다.
그 밤 이후로 한 계절이 지나가고 있었고,
이제는 발목이 보이는 컨버스 스니커즈를
신어도 추워 보이지 않을 날씨가 되었다.
자주 갔던 꼭대기 야경이 보이는 곳에 도착하자
벤치에 앉아 있는 축 처진 미카엘의 뒷모습이 보였다.
안아주고 싶었던 모습 그대로였다.
우리는 가볍게 포옹을 했고, 그는 나에게 길에서 꺾어 온
노란 튤립을 건넸다.
봄이 되자 밴쿠버 곳곳에 피어나 자주 보던 꽃이었다.
그 흔한 튤립 한 송이를 받은 순간, 지난 4개월 동안
영상을 훔쳐보며 느껴왔던 수치심과 원망이 한순간
사라졌다는 걸 그는 몰랐을 것이다.
난 매일 너를 훔쳐봤고 낮과 밤, 이 공원을 혼자 걸으며
네 생각을 했다. 며칠 일하던 데서는 잘렸다는
말을 할 수 없어서, 나는 그저 이사 갈 집을 구했고
카페에서 일하고 있다고, 밴쿠버에 사는 것이 꽤 괜찮다고 둘러댔다.
우리는 처음 이케아에 갔던 날처럼
나무 실루엣만 보이는 밤의 공원을 걸었다.
윌로우 트리를 지나고
그가 탔던 나무를 지나쳐 걸으며
몇 시간 동안 이야기를 했다.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그는 레이자가 떠나던 날 영상 속 얼굴처럼
어딘가 힘겨워 보이는 모습이었다.
밤이 깊었고, 그는 나를 집 앞까지 데려다주었고,
우리는 집 앞에서 다시 입을 맞췄다.
그게 어떤 의미인지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그는 잠깐 더 같이 있고 싶다는 식으로 말했지만,
나는 거절했다.
이번엔 미안하지 않았다.
아니, 화가 났다.
그의 얼굴을 보자 잠시 잊고 있었던
감정이 올라왔다.
그는 내가 지난겨울을 어떻게 보냈는지 모를 것이다.
그저 나를 좋아했던 잠깐 스쳐 간 사람 정도로만
생각했던 것인지 모른다.
아마 그는 레이자와 있으며 나를 잊어버렸을 것이다.
그는 그녀가 떠날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을 것이고,
마음이 가도 친구 사이를 유지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며칠 전 그녀가 떠났고, 그는 슬펐을 것이고,
그래서 문득 내가 생각났을 것이다.
나는 그가 만나자고 문자를 보냈을 때부터 이미 이런
상상을 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그를 만나러 갔다.
나는 지하방으로 들어와 버렸다.
그는 한 시간쯤 뒤에도 “I’m still here.” (아직 여기 있어.)라고
문자를 보냈고, 나는 답하지 않았다.
그대로 그가 다시 사라져 버릴까 봐 두려웠지만,
내 감정을 이길 수 없었다.
선잠에서 깨어 “Did you get home okay?” (집에 잘 갔어?)
라고 문자를 보냈지만 답장은 없었다.
밖을 나와 봤지만 그는 가고 없었다.
다음 날 아침, 나는 다시 4개월 전 그가 나를 갑자기 떠나던
그날 아침의 기분으로 되돌아 가 있었고
서랍장 위엔 시들어 버린 노란 튤립만 남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