짐을 싸는 일은 이제 익숙했다.
20대 초반 처음 혼자 호주에 갔을 때,
커다란 수트케이스에 옷가지를 가득 넣고
다시 돌아가지 않을 곳을 떠나는 사람처럼
그렇게 떠나고 돌아가기를 반복하면서,
나는 언제든 떠날 준비가 된 사람처럼 살고 있었다.
우리는 벨기에 2주, 한국 2주 정도로 계획을 세웠고
여행에 필요한 것들을 제외한 짐은
그가 일하던 회사 창고에 맡기고 떠났다.
나는 비행기에서 항상 숙면을 하는 편이었지만
벨기에로 가는 비행에서는 거의 잠을 자지 못했다.
그동안은 캐나다 비자 연장 같은 것들만 생각하다가
처음으로 그의 가족을 만나
그 집에 머물러야 한다는 사실이
비로소 실감 났기 때문이다.
직항이 없어 네덜란드 공항에서 환승을 해야 했다.
네덜란드에 살고 있는 미카엘 형의 여자친구가
벨기에 그의 아빠 집까지 데려다 주기로 했다.
공항에 도착해 엘리사와 짧게 인사를 하고
차로 이동했다.
그녀는 빠르고 거칠게 수동 기어를 바꿔갔다.
수동차는 소음이 컸고 창밖은 밴쿠버의
겨울처럼 흐리고 비가 내리고 있었다.
나는 어색할 때면 나오는 특유의 실없는 말들을 했다.
그녀는 우리의 나이 차이를 듣더니
미카엘이 놀랄 때 하는 표정과 소리를 내었다.
3시간이 지나고
급격히 졸음이 밀려올 때쯤
그들은 거의 다 왔다고 말했다.
국경을 넘는다는 표지도, 변화도 없어서
언제 나라를 넘어왔는지 알 수 없었다.
차를 세우고 조금 기다리자
빨간색 컨버스를 신은 한 남자가 조수석에 올라탔다.
그의 형 루크였다.
그는 뒤를 돌아 내 얼굴을 빤히 바라보며 인사했다.
미카엘과는 별다른 인사를 나누지 않았지만
서로 반가워하는 기색은 분명했다.
아빠 집으로 이동하는 동안에도 그는 뒤를 돌아앉아
내 눈을 맞추며 비행은 어땠는지 등에 대해 물었다.
미카엘과는 다른 생김새였다.
그는 아이와 노인을 섞은 얼굴도,
파랗다고 느껴질 정도로 흰 피부도 아니었다.
짙은 녹색의 눈동자에 검은 머리카락과 수염이 있었고,
누가 봐도 호감형의 미남이었다.
그가 말할 때 가끔 보이는 어딘가 불편해 보이는 표정은
미카엘과 닮아 있었다.
차는 도시처럼 보이는 풍경을 지나 한적한 주택가로
진입했고, 마당이 넓은 정사각형의 집에 도착했다.
대문을 열자 절뚝이는 여자와,
멀리서도 미카엘이 나이 들면 저 모습이겠다고 상상할 수 있을 만큼 닮은 중년의 남자가 함께 나왔다.
미카엘은 아빠에게 인사하는 대신 나를 밀어 보였다.
나는 어색함을 감추듯 인사를 했고
우리는 안으로 들어갔다.
거실 중앙에는 벽난로가 있었고,
벽에는 그의 4남매의 어릴 적 사진이
콜라주 되어 걸려 있었다.
스위트한 패밀리 영화에 나오는 사진이라기보단
어딘가 살짝 뒤틀린 악동들 같이 개성이
가득한 표정을 짓고 있는 모습이었다.
그중에 미카엘의 남동생의 사진만 그림자 진 상태로
얼굴이 또렷이 보이지 않았다.
그는 가족들과 전혀 연락을 하지 않고
혼자 포르투갈 어딘가에 살고 있다고 했다.
거실 발코니 창 밖으론 뒷마당이 보였다.
핼러윈 때 장식해 놓을 법한
머리가 아주 길거나 몇 가닥 없는 마네킹 머리들이
마당 여기저기에 걸려 있었다.
미카엘의 아빠와 새엄마 벨은 영어를 잘 못한다고 하며
또박또박 몇 마디 건넸지만,
문법은 내 영어보다 정확했다.
그들은 한참 동안 네덜란드어로 대화했다.
내가 알아들을 수 있는 건 잘 먹겠습니다(스마클릭)
밖에 없었는데
밥 먹을 시간이 아니라 쓸 수도 없었다.
영어를 거의 알아듣지 못하던 시절 외국에 살 때,
사람들이 대화를 하면 그 속에 조용히 쪼그라져 있던 때의
감정들이 스쳐갔다.
중간중간 마— 하는 추임새 같은 음성 이외에
악센트가 세지 않은,
듣기에 불편하지 않은 언어의 소리였다.
미카엘이 생소한 언어로 빠르게 말을 이어 나가는
모습이 낯설게 느껴졌다.
발 두 쪽이 겨우 들어가는 비스듬한 나무 계단으로
두 개의 슈트케이스를 들고 위층으로 올라가
미카엘이 어릴 적 살았다던 방으로 들어갔다.
오래된 나무 바닥에서 삐걱거리는 소리가 났고,
문을 열자 2인용 침대,
작은 책상과 장롱이 있었다.
창문이 완벽히 닫히지 않아 방의 공기가
밖과 거의 비슷했다.
우리는 간단히 샤워를 하고 저녁때까지 쉬겠다고 했다.
비행기에서 거의 잠을 자지 못한 탓인지,
쓰러질 것처럼 피곤했지만 쉽게 잠들지 못했다.
저녁을 먹으러 내려왔을 땐 미카엘의 아버지는
TV를 보고 있었고,
벨은 부엌에서 요리를 준비하고 있었다.
짧은 금발 머리에 그녀는 목발에 한쪽어깨를
의지한 채 담배를 피우며
동시에 감자 껍질을 벗겨내고 있었다.
나는 도울 게 없냐고 물었고
그녀는 괜찮으면 감자를 깎아 주겠냐고 했다.
벨이 나에게 말을 할 때면 영어 단어가 생각이
안 난다는 듯 잠시 멈추거나 눈을 위로 굴리다가
다시 말을 이어갔다.
저녁은 매쉬포테이토와 토마토 파스타였다.
그들은 내가 모르는 언어로 대화했지만
미카엘이 그들을 대하는 모습은
최대한 예의를 갖춰야 하는
사람들을 대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미카엘의 아버지는 볼수록 그를 닮아 있었다.
흰머리와 갈색 머리가 섞인 어깨까지
오는 긴 머리를 뒤로 묶고 있었고,
마른 체형에 설명할 때 커지는 손동작과 목소리 톤도 비슷했다.
저녁을 먹고 술에 조금 취한 듯한 그는
집 마당에서 키우는 돼지와 닭들을 보여줬다.
나는 몹시 피곤했지만 그의 뒤를 쫓아다니며
신기하고 재밌다는 표정을 지었다.
가까이서 보니 마네킹 머리들은
나름의 규칙을 갖고 배치되어 있는 듯 보였다.
그는 내가 포토그래퍼라고 하자
오래된 카메라를 보여주고 냉장고에
보관해 둔 필름도 주었다.
그가 카메라에 대한 설명을 이어가려고 하자
미카엘은 말을 끈으며 자러 가겠다고 했다.
우리는 다시 비주를 하고 위층으로 올라갔다.
내가 왜 아빠 말을 자르냐고 묻자
그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불을 끄고 누웠다.
아래층에서 작게 티비소리가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