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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 라디오, 군대가 만나면

펜 끝에 스며든 추억

by 장시무

외박을 갔다가 들어올 때 필수품이 있다. 선임들 사제비누, 전화카드, 최신 유행 가요 테이프, 그리고 잡지. 어떤 제목인지 잘 기억은 나지 않는데 그 잡지 가장 뒷면에 펜팔친구를 맺길 원하는 사람들의 이름과 주소, 간단한 자기소개하는 페이지가 있었다. 아직 편지감성이 살아있던 시절이다.


매일 그렇지만 버라이어티 한 취침점호가 끝나고, 한바탕 소등쇼(점호가 끝난 후 우리만의 특별한 시간- 다음에 다른 글에서 소개하기로 한다)가 끝난 오후 11시, 불 나오는 펜(군필자는 다 안다) 끝에 내 마음을 새겨본다. 당시, 여자 친구가 없어서 편지 한 통 받지 못한 설움이 많아 후임병들 갈굼만 늘어가던 그들을 진정시키고자 대표로 내가 나서야 했다. '대신 적어 드리지 말입니다. 한봉이면 되지 말입니다(한봉은 냉동만두 한 봉지를 의미한다).'



저 바다 수평선 위로 해가 저물어 갈 때쯤, 하루 과업을 끝내고 내부반 옥상에 올라가 지는 해를 바라보며, 당신을 생각해 봅니다. ㅇㅇ 님은 지금 무엇을 하고 계실까요? 나라를 지킨다는 숭고한 목적도 중요하지만, ㅇㅇ님 같이 아리따운 분 한 명을 지킨다는 마음으로 오늘도 저는 이 바다에 저의 청춘을 바칩니다.



뭐 이런 식이었다. 21살, 뭘 알까?(그때 우리가 그랬다는 말) 왜 오그라들지? 편지도 안 써보고, 글 자체를 좋아하지 않았던 선임들은 이런 표현을 상상조차 해 본 적이 없다며 아주 좋아라 했다. 어쨌든 그녀의 마음에 제발 들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으로 한 땀 한 땀 써내려 갔다.

기다린다. 나도 살짝 긴장되고, 황병장님은 더 초조하다. 여자에게 편지 받아보는 게 소원이다.

몇 주가 지난 후, 어느 날 일과를 마친 저녁, 놀라운 소식이 들려왔다.


황병장님, 편지 왔습니...다!(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발신자는 '잡지의 그녀'다. 내무반에 잔치가 열렸다. 아니 기적이 일어났다. 황병장이 받아본 일생일대의 첫 편지. 그것도 어머니 아닌 여자가 보낸. 그날 나는 질리도록 냉동 음식을 먹는 호사를 누렸다. 그런데소문은 늘 확장되고 편집되기 마련이다. 졸지에 밤마다 대필하러 다닌다. 이럴 줄 알았으면 두봉으로 계약할걸. (혼자) 사랑에 빠진 남자는 거울 보고 웃는 습관이 생긴다(만날 일도 없는데). 최고참 임수병 님이 째려보며 한마디.


도~랐나(돌았나의 경상도 버전, 얼굴은 분명 부럽다인데 자존심 때문에 부탁하진 않더라. 곧 제대하면 많이 만날 거라나...)


시간이 지나고 모든 남녀가 그렇듯이, 황병장과 펜팔녀가 시들어 갈 때쯤, 어느 날 김수병 님이 불렀다. '야 여기 사연 하나 보내볼래?' 가끔 같이 듣던 '손미나의 밤을 잊은 그대에게', 우리 이야기 뭘 보내도 되지 않겠니 하는 마음이다. 쉬운 줄 아나? 참... 그래도 돼도 그만 안 돼도 그만이니 한번 도전!


보낸 내용은 잘 기억나지 않지만, 다양한 캐릭터가 공존하는 군생활의 이면, 나라도 지키고 나도 지켜야 하는 이중고, 냄새나는 남자들의 지독한 생존경쟁, 철저한 계급사회 속에 피어나는 인간애, 그리고 없어선 안될 황병장의 러브스토리(MSG 가득) 등등, 뭐 그런 내용이었을 것이다.


기적이 일어났다. 사연이 당첨되었다! 아쉽게도 그 사연이 읽히는 것은 실시간으로 듣지 못했다. 매번 귀구녕에 이어폰 꼽고 하는 군생활은 아니었으니. 어떻게 알게 되었을까? 어느 날, 선물이 도착했다.


지오디 정규 4집, '길'


그런데 시디로 왔다. 당시 내부반에는 카세트 플레이어 밖에 없어서 듣지 못했고, 곧 누군가 테이프를 구해와서 듣게 되었다.


내가 가는 이 길이 어디로 가는지

어디로 날 데려가는지

그곳은 어딘지

알 수 없지만, 알 수 없지만, 알 수 없지만

오늘도 난 걸어가고 있네


뭐지 이 묘한 분위기는? 다 같이 듣고 있는데, 먹먹한 침묵이 흐른다.


오, 지금 내가

어디로, 어디로 가는 걸까?

나는 무엇을 위해

살아야, 살아야만 하는가


잠을 청한다. 창 밖에 달이 환하다. 곧 제대하는 임수뱅님은 아직도 류상병 잠 못 자게 데리고 논다. 뭐가 그리 재밌을까? 얼른 자고 당직근무 가야 하는데. 저 까막 득한 김이병은 오늘도 슬리퍼 세례각이다. 코를 너무 곤다. 코골이 때문에 꼬였다. 밤마다 후임병 귓속에 설교하는 박수병 님. 이제 레퍼토리 나도 외우겠다. 오늘 하루 잘 보냈는데, 또 내일은 어떤 일이 벌어질까? 전쟁도 안 났는데, 한 치 앞을 모르는 군생활이다.


지금 나는 뭐 하고 있지? 여긴 어딘가? 나는 잘하고 있나? 잘 가고 있나?

내가 묻고, 내가 찾아야 한다. 제대한 지 한참이 지났지만, 아직도 그 고민이다.


사실 마음이 안 좋았다. 지오디 시디를 그 김수병 님이 지꺼라고 들고 갔다. 자기가 제안했다고. 미친놈. 내가 얼마나 고심하면서 썼는데, 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은 되놈이 번다더니. 그래 네가 가져라. 한 달은 편하겠지. '김수병 님. 시디 하시지 말입니다.' 쿨하게(속은 마지못해, 군생활 잘해야지)드렸지만, 그 노랫말은 제가 가지겠습니다.


사람들은 길이 다 정해져 있는지

아니면 자기가 자신의 길을 만들어 가는지

알 수 없지만, 알 수 없지만, 알 수 없지만

이렇게 또 걸어가고 있네


이렇게 내부반에서의 하루가 또 간다.

그래도, 그들이 있어서 재밌다. 차암~ 재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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