떨어지는 낙엽은 女心을 흔들고
가을이면 낙엽 밟히는 '바스락'소리에 온 정신이 집중된다. 집중은 몰입이며 몰입은 곧 힐링이다. 잎과 낙엽이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효용은 헤아리기 어렵다. 침엽수와 활엽수에서 뿜어져 나오는 피톤치드는 많은 부분이 잎에서 나온다. 숲 속의 잎은 도시의 그것보다 100배에 가까운 미세먼지를 거른다. 잎은 지구온난화의 주범인 이산화탄소를 가장 효율적으로 흡수하는 고마운 존재다. 잎은 매년 4,600만 톤의 이산화탄소를 흡수하고 3,400만 톤의 산소를 생산할 뿐만 아니라 각종 대기오염물질을 제거한다.
시시각각으로 변해가는 나뭇잎을 보노라면 우리의 뇌의 반응도 무언가 새롭게 출발하고자 하는 의욕을 느끼게 한다. 색의 조합으로 이루어진 다양한 낙엽은 긍정적인 신호를 보내온다. 마음을 겸손하게 만들고 영감을 주는 건 낙엽이 우리에게 건네는 보너스다. 잎은 다양하고 풍부한 선물을 자연에 건네주고 시들어가 낙엽으로 떨어진다. 연구에 의하면 봄, 여름의 녹색을 접촉한 후 긴장감이 명백히 해소되었고 빨강, 노랑, 주황이 우세한 가을에도 긴장감이 낮은 것으로 조사되었다.
땅에 떨어진 잎은 낙엽의 이름으로 헌신을 지속한다. 겨울잠을 자는 곤충들의 이부자리가 되어주기도 하고 마지막까지 제 몸을 부수어 여러 생물의 먹이가 되어주고 토양을 비옥하게 한다. '분골쇄신'이라는 말은 낙엽의 훈장이다. 떨어진 낙엽을 자세히 관찰해 본 일이 있는가? 여기저기 구멍 나고 찢기어진, 그만큼 수고와 헌신의 징표인 상처투성이인 낙엽을.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시인이 일갈했듯, 우리는 효용을 다한 것들에게 너무도 쉽게 ‘쓰레기’라는 낙인을 찍는다. 한여름 내내 공원 위로 초록의 그늘을 드리우며 바람결에 팔랑이던 나뭇잎도 땅에 닿는 순간, 기다리고 있는 것은 굉음으로 몰아붙이는 송풍기의 바람이다. 윙윙대는 기계음 속에서 이리저리 흩날리다 결국 포대자루에 쓸려 담겨 어디론가 끌려가는 낙엽을 보면 괜스레 측은한 마음이 드는 건 인지상정인가 보다.
나뭇잎이
벌레 먹어서 예쁘다
귀족의 손처럼 상처 하나 없이 매끈한 것은
어쩐지 베풀 줄 모르는 손 같아서 밉다
떡갈나무 잎에 벌레구멍이 뚫려서
그 구멍으로 하늘이 보이는 것은 예쁘다
상처가 나서 예쁘다는 것은 잘못인 줄 안다
그러나 남을 먹여가며 살았다는 흔적은
별처럼 아름답다
(이생진, 벌레 먹은 나뭇잎)
낙엽은 연탄재인가 제 할 일을 다하고 썩어간다. 낙엽은 이미 떨어지기 이전부터 온갖 생물의 먹이가 되어주기도 하고 보금자리가 되어주었다. 온갖 성가신 잎벌레와 딱정벌레들을 몸으로 키웠고, 새들에게는 그늘과 안식처를 제공했다. 잎(낙엽)이 인간을 포함해 지구상의 생명체에 기여한 공로는 이루 헤아릴 수 없다.
지구상에 살아 숨 쉬는 모든 생물은 떨어진 낙엽에 감사해야 한다. 숲은 일차생산자로서 수많은 소비자를 먹여 살찌워왔다. 뒹구는 낙엽이 없었다면 인간조차 존재할 수 없었으리라. 낙엽은 생산자로서 광합성으로 소비자인 모든 생물에게 에너지를 제공해 왔으며 살아 숨 쉬게끔 산소를 제공해 왔다.
낙엽에 경의를 표해야 하는 또 다른 이유는 잎의 조상은 우리 인간보다 무려 4억 년 이전부터 지구상에 나타난 대선배이기 때문이다. 육상에 이끼가 바다로부터 출현한 뒤 식물은 관다발의 혁신을 이루어 줄기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줄기만으로는 생장의 한계가 있었다. 이때 식물은 경이로운 '잎'을 만들어 본격적인 광합성이 가능하게 되었다. 이후로 잎은 수억 년 이상 지구의 생태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쳐왔고 그 속에서 인간은 출현하고 오늘에 이르렀다. 인류의 기원이 700만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고 현생인류인 호모사피엔스가 고작 30만 년 전에 출현한 것을 보면 얼마나 잎이 우리보다 앞서 살아왔는가를 짐작케 한다.
낙엽이 전해주는 감상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는 듯하다. 뒹구는 낙엽은 때로는 쓸쓸함을 더하고 순박한 사람의 마음을 흔든다. 색깔과 모양이 서로 다른 낙엽을 바라보면 여러 잔상이 느껴진다. 불현, 빛보다 더 빠른 속도로 생각은 과거를 뒤지는가 하면 어느새 현실로 돌아와 미소를 짓기도 하고 아쉬움의 한숨을 내쉬기도 한다.
시경 <소아> 사월 (四月)의 한 구절에 때가 되면 산천초목도 그 역할을 마감하듯 사람들도 세월이 흐르면 낙엽 지듯 병이 들기도 하고 갈 곳을 잃어버리는 처량한 신세를 노래했다. 낙엽이나 사람이나 종국에는 회한만 남기고 사라져 가는 '동병상련'의 운명인 것인가?
가을이라 쌀쌀한 날씨 되더니( 秋日淒淒추일처처) / 초목들이 다 함께 시들어가네(百卉具腓백훼구비) / 난리로 흩어져서 병든 이 몸이 / 돌아가 쉴 곳은 그 어드메뇨
(淒:쓸쓸할 처, 卉:풀 훼,腓:시들 비)
시경 <<국풍>> <정풍> 탁혜(蘀兮)에 시인은 지는 낙엽에 급기야 몸과 마음이 불타올라 그리운 님을 애타게 찾아보는 여인의 심정을 노래했다. 창피함을 무릅쓰고 말이라도 걸어보고 싶지만 차마 용기가 나지 않는 순박한 여인의 마음이 가을 분위기에 더욱 가련함이 느껴진다.
(蘀兮:낙엽 탁, 감탄사 혜)
낙엽이 지네 / 우수수 떨어지네 / 멋쟁이 선비들 신사들이여 / 말만 해주오 따라가리다
낙엽이 지네 / 우수수 흩날리네 / 멋쟁이 선비들 신사들이여 / 말만 해주오 맞이하리다
(시경강설:이기동)
공자 말씀 중 “《시경》 삼백편의 뜻을 한마디로 단정하면 ‘생각에 간사함이 없다.”라고 했던가, 순박한 여인의 가슴은 불타오르지만 기교를 부린다거나 술책을 써서 선비를 유혹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다만 간사함이 없으니 마음으로 애만 태우는 순박한 장면은 시경을 감상하는 또 다른 묘미가 아닐 수 없다.
시경에 비유에 가까운 시가 대부분인 듯, 탁혜(蘀兮)에서도 정치적인 장면이 묘사된다. 곧, 군주가 약하고 신하는 강대하니 군주가 선창 한들 화답 않는 신하를 묘사한 것이라고 한다. 멋쟁이 선비와 신사들이 신하를 이름이요 태자 홀의 말을 듣지 않음을 이야기한 것이라고 한다. '홀(忽)'은 정(鄭)나라 장공(莊公)의 아들인 태자 홀, 즉 훗날의 정 소공(昭公)을 가리킨다.
주자는 그의 <시경집전>에서 이 시는 음탕한 여자의 말이라고 했듯 시경 정풍의 시에는 이러한 음란하고 색욕적인 시가 많은 것도 사실이다. 有女同車 (유녀동거:수레 함께 탄 여자),褰裳(건상:치마를 걷고서),風雨(풍우:비바람이 서늘하고),野有蔓草(야유만초:들에 있는 넝쿨 풀)과 같은 작품들이 그러한 예다. 이 시 탁혜에서는 의견이 갈리거니와 나는 차라리 공자의 말씀처럼 생각에 간사함이 없이 님을 향한 애타는 마음을 읊은 시라고 생각하고 싶다. 비록 음탕하더라도 인간의 정서를 노래한 것인바에야 이 음탕함이 나와는 전혀 무관한 양 팔짱을 끼고만 있을 수 없기 때문이기도 하리라.
모파상의 <여자의 일생> 마지막 부분에 낙엽을 묘사한 대목은 보통 낙엽이 주는 잔상을 대변해 주는 듯하다.
'나뭇잎들은 하나하나, 천천히, 사라져 가는 삶들처럼 떨어지고 있었다. 잔느는 차가운 땅 위로 스쳐 지나가는 바람에 실려, 긴 길을 따라 내려가는 잎들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자신이 사랑했던 모든 것이 이렇게 하나씩 떨어져 버렸다고 생각했다.'
낙엽은 땅에 닿는 순간 비로소 생의 막을 내리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 순간은 끝이 아니라 다른 역할의 시작이다. 바람에 밀려 땅 위를 떠돌면서도, 낙엽은 마지막까지 자신의 존재를 다 태워 주변과 교감한다. 서서히 스스로를 흙으로 돌려보내며, 작은 생명들에게는 양분이자 안식처가 되어준다. 그리하여 낙엽은 다른 생명을 품는 방식으로 제 역할을 마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