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명인간의 묘약 고비 (표지사진:양세훈작가)
만약 누군가 나에게 “이 세상에서 가장 신기한 것이 무엇이냐”라고 묻는다면, 나는 망설임 없이 대답할 것입니다.
“바로 고사리나 고비의 잎, 혹은 줄기에 맺힌 그 경이로운 포자덩어리입니다.”
혹시 여러분은 양치식물의 포자를 본 적이 있는가요?
고비는 새순을 틔울 때, 마치 세상에 비밀을 간직한 아기 주먹처럼 잎을 꼭 말고 있습니다. 고비는 뭔가 보여줄 것이 있는 듯 때가 되면 천천히 몸을 펴며 연둣빛 생명으로 지역을 넓혀갑니다. 그리고 어느 날, 고비의 잎과 줄기가 충분히 자라면 그 뒷면에 놀라운 포자주머니(포자낭)를 보여주지요. 이건 정말 경이로운 '우주 서커스'입니다. 네, 빅뱅으로 인한 우주탄생도 놀랍거니와 그 우주탄생의 산물인 식물이 보여주는 또 다른 묘기는 지상의 어느 서커스보다 경탄스럽습니다.
나에게 식물 하나하나는 움직이는 동물보다도 훨씬 더 경이롭고 온통 놀라움으로 가득한 서커스단 같은 존재이지요. 비록 나에게 식물에 대해 깊은 지식과 경험이 박약해도, 저는 고집스럽게도 무의도자연휴양림에서 ‘숲 속에서 보는 우주 서커스’라는 주제로 탐방객에게 저와 같은 놀라운 경험을 공유하고자 노력합니다. 탐방객에게 얼르기도 하고 호소하기도 하고 별로 반응이 없을 땐 좀 놀랍지 않냐고 부추기기도 하지요.
이 특별한 서커스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고사리와 고비의 포자입니다. 물론 이끼나 버섯 그리고 고비와 같은 양치식물처럼 포자로 번식하는 식물들은 꽃을 피워 번식하는 현화식물에 비하면 원시적인 식물입니다. 그러나 시선을 바꾸어 보면, 꽃도 열매도, 씨앗도 없이 오직 눈에 보이지 않을 만큼 미세한 포자로 생명을 이어간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 경이로운 존속유지의 하이테크닉이 아닐 수 없지요.
오늘날 식물학자들은 분자생물학과 유전학의 발전 덕분에 식물의 기원과 진화의 비밀을 한층 깊이 밝혀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과거에는 고사리나 고비의 포자는 눈으로 보기에도 너무 작아, 사람들은 고사리가 어떻게 번식하는지 알 수 없었고, 그 신비로움은 오랫동안 호기심의 대상이 되었지요.
그런 이유일까? 셰익스피어의 희곡 『헨리 4세』에는 이런 시대의 궁금증을 엿볼 수 있는 한 장면이 등장합니다. 이야기는 사기꾼들이 모여서 작당을 하는 장면인데 극 중 등장인물 가드실(Gadshill)의 대사를 들어보면 당시 사람들이 고사리나 고비와 같은 양치식물을 어떻게 생각했는지 엿볼 수 있습니다.
"She will, she will. Justice hath liquored her. We steal as in a castle, cocksure. We have the
receipt of fern seed; we walk invisible."“그녀는 그래, 그래 할 거야. 판사가 술로 매수했거든. 우린 성 안에서처럼 안전하게, 확신에 차서 훔치지. 고사리 씨앗의 비밀을 가졌으니, 눈에 띄지 않고 걸어 다닐 수 있어.”
당시 사람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고사리나 고비의 씨를 품고 있으면 자신도 보이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을 한 것입니다. 고사리의 포자가 지면에 떨어지면 전엽체를 형성하고, 그 전엽체의 장정기와 장란기에서 각각 정자와 난자가 생성됩니다. 이후 정자가 난자에 접근하여 새로운 고사리 개체로 발달하게 되지요. 고사리의 정자는 수영선수와 같이 헤엄을 쳐서 난자에 접근합니다. 양치식물은 이끼도 그렇거니와 고향이 바다라 태생부터 물을 헤엄쳐 번식을 하였거든요. 고사리나 고비는 그 습성을 버리지 못하고 오늘날까지 이어오고 있는 것입니다. 어쩨튼 과거에는 이러한 번식 과정을 전혀 알아차릴 수 없었습니다. 고사리의 포자는 극히 미세하여 육안으로 식별하기 어려웠고, 전엽체 또한 쉽게 눈에 띄지 않아 사람들은 고사리가 ‘보이지 않는 씨앗’을 통해 번식한다고 여겼거든요.
한편, 중국문학의 걸작 '시경'에 고비와 고사리가 나옵니다. 시경에는 고비나 고사리가 사랑하는 '님'에 대한 그리움과 애틋한 사랑이나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는 소재로 삼곤 했습니다.
시경 <<소아>> <곡풍지습谷風之什> 사월(四月)의 한 구절에
산에는 고사리와 고비가 있고 (山有蕨薇산유궐미) / 들에는 구기자와 대추 있네 / 군자는 노래 불러서 / 슬픈 마음 말하고자 함이네 (시경강설 이기동)
谷風之什:남녀 간의 사랑과 이별의 정한(情恨)을 노래한 시편들을 모은 것.
*蕨고사리 궐 , 薇고비 미
이 노래는 여러 가지로 해석을 할 수 있겠습니다만 사월의 봄의 따뜻한 풍경 속에서도 임을 그리워하는 여인의 마음을 노래한 시로, 자연의 생명력과 사랑의 그리움이 교차하는 작품입니다. 봄의 아름다움이 오히려 이별의 슬픔을 더욱 깊게 느끼게 합니다. 여기에서 ‘고사리’와 ‘고비’를 나타내는 한자는 각각 궐(蕨)과 미(薇)인데, 고대 중국인들이 이 식물들을 정확히 어떻게 구분하여 표기했는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蕨과 薇를 모두 ‘고사리’로 번역하기도 합니다. 이는 아마도 우리나라에서는 ‘고비’보다 ‘고사리’가 대중에게 훨씬 더 익숙하기 때문일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시경 <소남> 초충(草蟲:풀벌레)에 고사리와 고비라 함께 언급됩니다. 일찍이 공자님께서 모름지기 시경을 열심히 읽으면 온갖 산천초목의 식물과 동물을 두루 알 수 있다고 하여 권유한 바 있습니다. 여러분도 기회가 되면 잘 번역된 시경을 한번 읽어보시기를 추천드립니다.
풀벌레가 웁니다 메뚜기도 뛰놉니다 / 우리 님이 아니 오니 상한 속이 아픕니다 / 한번 만나 보았으면 보기라도 했으면 / 이 내 마음 놓일 텐데
저 남산 올라가서 고사리를 뜯습니다(言采其蕨) / 님 오시나 보느라고 상한 속이 쓰립니다 / 한번 만나 보았으면 보기라도 했으면 / 이 내 마음 기쁠텐데
저 남산 올라가서 고비나물 뜯습니다(言采其薇) / 님 오시나 기다리다 내 속이 다 탑니다 / 한번 만나 보았으면 보리가도 했으면/ 이 내 마음 풀릴 텐데 (시경강설 이기동)
이 시를 읽다 보면 가슴이 찡해집니다. 사랑하는 님을 집안에서만 기다리다 보면 정말 답답해 죽을 지경이지요. 그래서 문을 박차고 동산에라도 올라봅니다. 동산에 올랐건만 내 님은 보이지 않네요. 시인은 답답하고 속 타는 심정에 고비라도 뜯으며 마음을 달래 봅니다.
양치식물 이전에는 원시식물로서 쿡소니아(Cooksonia)가 있었습니다. 이 식물은 이렇다 하게 잎이나 꽃, 뿌리 등은 없었습니다. 이러한 가지 끝에 포자를 형성하는 식물이 양치류로 진화했습니다. 고비와 고사리를 포함하는 양치식물은 식물 진화의 역사에서 결정적인 전환점을 이룬 식물군으로 평가됩니다. 그 이유는 이들이 광합성의 효율을 높이기 위해 최초로 ‘잎’을 발달시킨 식물이었기 때문이지요.
초기 육상식물은 줄기와 유사한 구조만으로 광합성을 수행했으나, 그 효율에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이에 따라 양치식물은 보다 넓은 표면적을 가진 잎을 형성함으로써, 태양 에너지를 보다 효과적으로 이용할 수 있게 된 것이지요. 식물이 잎을 발명한 것은 그야말로 대혁신을 이룬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놀라운 진화에도 불구하고, 양치식물은 여전히 포자로 번식하는 원시적 방식을 유지하였습니다. 포자는 수분을 통해 정자가 이동해야 하는 구조적 특성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양치식물은 생식 과정에서 여전히 물에 의존적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정자가 난자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물이 매개되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한계는 양치식물이 육상 환경에서 완전히 독립하지 못한 중요한 이유였습니다.
하지만 약 3억 7천만 년 전, 식물 진화의 흐름 속에서 획기적인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바로 ‘종자고사리(Seed Ferns)’의 등장입니다. 종자고사리는 번식 과정에서 물의 매개가 필요하지 않도록 종자를 발달시킨 식물로, 이는 생식의 완전한 육상화를 의미했습니다. 종자는 내부에 배아와 영양분, 그리고 이를 보호하는 단단한 종피를 지니고 있어, 수분이 부족한 환경에서도 장기간 생존이 가능했지요. 이러한 구조적 혁신은 식물의 생존 전략을 근본적으로 변화시켰습니다.
이후 종자고사리로부터 침엽수(겉씨식물)와 꽃피는 식물(속씨식물)이 진화하면서 식물계는 더욱 다양하고 복잡한 형태로 발전하였습니다. 결과적으로 양치식물은 이끼류로부터 이어진 포자식물의 계통을 계승하면서도, 종자식물로 이어지는 진화적 교량 역할을 수행한 것이지요.
따라서 양치식물은 단순히 고대의 포자식물로 머물지 않습니다. 이들은 식물이 육상 환경에 적응하고, 잎과 관다발, 그리고 종자라는 구조적 혁신으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핵심적인 연결고리로 기능했습니다. 오늘날에도 고사리나 고비와 같은 양치식물은 포자로 번식하는 독특한 생명 전략을 유지하며, 생명의 다양성과 진화의 경이로움을 상징하는 존재로 우리 곁에 남아 있습니다. 그러니 다음에 고사리를 보면 그것이 우리 지구가 지금과 매우 달랐던 시대를 살아 숨 쉬는 연결고리라는 걸 기억해 주시면 더욱 좋겠네요. 물론 고비와 고사리의 그 신비스럽고 경이로운 포자낭의 배치나 배열도 함께 감상하는 것을 잊으면 안 되겠지만 말입니다.
저도 어릴 땐 아버지와 같이 가끔은 앞산에 올라 고사리를 뜯었습니다. 아버지는 고사리 뜯는 걸 멈추고 슬며시 담배 한 대 피워 물곤 했습니다. 아버지는 먼 이북녁의 고향 평양쪽을 을 바라보며 그리운, 그러나 가보지 못할 고향생각에 젖어드는 듯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