님 그리는 원추리 (사진 양세훈작가)
본격적으로 여름이 가까워질 때면 원추리의 노란 꽃잎이 마치 나팔을 불어 대는 듯 존재감을 과시한다. 본격적인 더위의 시작을 알림과 동시에 건강하고 힘차게 여름을 이겨내자는 외침이기도 하다. 내가 숲해설가로 근무하고 있는 국립무의도자연휴양림에도 어느덧 곳곳에 노란 꽃 들이 피어난다. 원추리꽃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으려니 꽃의 아름다움에 가려진 식물의 경이로움이 슬그머니 느껴진다.
원추리꽃은 단 하루정도 피고 이내 진다. 원추리꽃은 며칠이고 피워 있는 듯하나 여러 개의 꽃봉오리가 지속적으로 시간차이를 두고 피는 것일 뿐 실상은 꽃다운 나이에 절명하고 마는 것이다. 여러 종의 원추리 학명에 어김없이 나타나는 Hemerocallis는 하루(hemera)와 아름다움(kallos)의 조합으로 “하루 동안의 아름다움”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시인 윤호는 다음과 같이 읊었다.
비록 하루밖에 못 사는 꽃을 피우지만, 원추리는 높다란 꽃대 위에 예니레쯤 꽃을 매달 줄 안다.
예닐곱 개의 봉오리들을 하루씩 차례로 피우기 때문이다.
누구도 그 꽃이 하루살이라는 것을 알지 못한다.
원추리가 이렇게 한여름의 시작에 때를 맞추어 피고 지는 것에는 원추리 고유의 악보를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식물이 성장하며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 일련의 과정은 잘 짜인 악보를 바탕으로 연주되는 오케스트라와 같다. 악보의 수많은 음표가 순서대로 연주되듯 식물도 일련의 성장과정에 때를 맞추어 작용하는 유전자나 호르몬이 타이밍 좋게 발현한다.
원추리의 잎에서 개화유도 유전자인 파이토크램이라고 하는 빛수용채가 빛을 인식하면 플로리겐이라고 하는 개화유도 호르몬에 의해서 본격적으로 꽃을 피우는 작업에 돌입한다. 이때부터 원추리가 고용한 리피(LEAFY)라는 유전자가 꽃을 피우기까지 맹활약을 한다. 리피는 3개의 유전자(A,B,C유전자 라고 칭함)에게 명령하여 각각 꽃의 기관 즉 꽃받침과 꽃잎 그리고 수술과 암술을 만들어 간다. 지휘자와 연주자가 하나라도 실수하면 음악의 완성도가 없어지는 것과 같이 LEAFY와 A, B, C 유전자의 완벽한 타이밍과 조화가 없다면 정상적인 꽃은 만들어지지 않는다. 꽃의 아름다움 이면에 보이지 않는 식물 개화과정의 경이로움이 숨겨져 있다.
원추리가 하루 만에 꽃을 지우는 이유는 꽃이 핀 후 약 24시간 후에 노화와 세포 사멸을 유도하는 유전학적 프로그램이 작동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원추리는 장엄한 오케스트라와도 같이 고유의 새겨진 악보에 따라 정확하게 피고 지는 것을 반복하는 것이다.
원추리가 시경에 훤초로 소개된 이후 많은 문인들의 대화와 시가문학 등에 원추리가 등장하게 되었다. 먼저 시경에 소개되는 원추리의 한 구절을 감상해 보자. 시경에는 <<국풍>> <위풍> 백혜(伯兮남편)에서 원추리가 훤초(蘐원추리훤草)로 소개되고 있지만 萱草(훤초)로도 쓰인다. 시경의 원추리를 감상하고 있노라면 우리네 평범한 서민의 애틋하고도 서정적인 감성이 순수하고 과장됨 없이 고대로 묻어 나온다. 이러한 특징이 곧 시경을 돋보이게 하는 중요한 요소임에 틀림없다.
어떻게하면 원추리 얻어다가 / 뒤꼍에 심을까? / 내 님을 그리워하기에 / 내 마음까지 아프다네
*시명다식:훤초
시의 제목 백혜(伯兮)는 곧 작자의 남편을 뜻하는 것이니 이 시는 전쟁터에 남편을 보낸 후 오매불망 돌아오지 않는 님을 기다리는 안타깝고도 애절한 작자의 심경이 고스란히 읽힌다. 원추리는 심신을 안정시켜 주는 효과가 있어 근심걱정을 잊게 해 주니 망우초라는 이름도 갖게 되었다. 어떻게 해서라도 원추리라도 심어 님의 생각에 사무친 마음을 위로받고자 하는 작자의 염원이 느껴진다.
시경에서 원추리를 뒤꼍에 심어 심신을 달랜 연유로 수많은 문장가들에 인용되었으니 바로 훤당(萱堂원추리가 심어져 있는 거처)이다. 원추리가 심어져 있어 훤당이요 훤당은 집의 북쪽에 위치하여 북당(北堂)이라고도 하며 좌우 문맥상 당(堂) 모두 같은 뜻을 가지고 있다. 정조 18년 그러니까 정조의 어머니인 혜경궁홍씨가 예순에 이르자 정조가 ' 북당(北堂)에 푸른 훤초(萱草 원추리)가 우거지니 .... 60세에 이르셨고'(1)라고 하여 예순이 된 것을 경축하였는데 시경의 훤초를 인용한 것이었다. 고려시대의 대학자인 목은 이색도 시경의 시를 인용하여 취기도는 시를 지었다.
오늘 밤이 바로 어떤 밤인고 / 즐거울사 내 마음 쾌적도 해라 / 북당 앞에는 원추리가 자라고( 堂前萱草長)/
당(堂)위에는 술동이가 향기롭구나 (2)
원추리는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리는데 시름을 잊게 해 준다고 하여 망우초(忘憂草)요, 의남초(宜男마땅히남자草)라고 해서 비록 여자아이를 갖고 있어도 아들을 낳아준다고 하였다. 원추리의 뿌리는 훤초근(萱草根)이라 하여 약재로 쓰이는가 하면 서민들에게도 매우 유익하게 사용되어 산림경제, 의방유취, 의림촬요에도 소변이 안 나오는데 효과가 있는 등 다양한 효험이 소개된다.
무려 500여 년 전에 신사임당은 그녀의 초충도에서 원추리와 곤충 등을 묘사했다. 신사임당은 그림에서 그녀의 자연에 대한 세밀한 관찰력과 여성고유의 섬세한 아름다움을 붓끝에서 유감없이 발휘하였다. 초충도는 우리가 주변 생물들과 어떻게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야하는지에 대한 메시지를 들려주는 듯하다.
8월 중순의 전국을 할퀴고 간 세찬 비바람의 기세에 눌렸는지 무의도 자연휴양림의 숲에 원추리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자세히 보니 다시 피어날 꽃봉오리가 매복한 양 웅크리고 피어날 기회를 잔뜩 노리고 있었다. 원추리 꽃망울 안에서는 이미 꽃을 피우는 악보가 순서대로 그리고, 소리없이 연주되고 있었다.
(1)(2)한국고전문학D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