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 여행으로 들렀던 시애틀과 나이아가라 폭포 근처에서도 달렸다. 캐나다 온타리오의 깊은 숲 속을 달리는 트레일 러닝 대회에도 참가했었다
알래스카로 가는 수천 톤급 크루즈의 조깅 트랙 위에서 빙하의 냉기가 서려있는 칼바람을 맞으며 뛰어도 봤다.
어디 그뿐인가. 13시간 장거리 비행의 피로가 채 가시기도 전, 해뜨기 전이라 아직 어두운 새벽 로마의 거리를 내달리며, 그 시간대가 아니면 도저히 한가할 수가 없는 조용하고 한적했던 트레비 분수 앞에서 인생샷도 남겼으니 말이다.
시간과 장소를 가리지 않고 어디든 가는 곳마다 열심히 달리고 소소한 마라톤 대회까지 참가했던 나였지만 아직 한국에서 레이스에 참여해 본 적은 없었기 때문에, 이번 한국 방문은 어찌 보면 내게 '마라톤'이라는 큰 목표가 포함된 여행이기도 했다.
총 8박 9일 동안 이탈리아를 포함한 프랑스, 스페인 등을 크루즈로 여행하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대장의 묵은 찌꺼기를 남김없이 쏟아내는 약을 먹고 쉽지 않았던 하룻밤을 보낸 후, 4년 만의 건강검진까지 개운하게 마친 그 주 일요일, 6월 11일. 한국에서의 첫 마라톤 대회가 열리는 날이었다. 전날밤 폭우가 내렸고 남편과 함께 대회장으로 향하는 아침나절에도 야속한 장대비가 퍼붓고 있었다.
'이거 꼼짝없이 신발 젖어가며 우중런을 해야겠군.'이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레이스 출발 시간이 30분 후로 미뤄질 예정이라는 안내방송이 들려왔다.
방송이 들려오는 행사장 메인 부스를 바라보는데 거기 떡하니 앉아있는 국민영웅 마라토너 이봉주 선수의 모습!
평소에 진심으로 이봉주 선수의 팬이었던 나는, 이게 웬 횡재냐 싶어 냉큼 달려가 줄을 섰고, 얼마 기다리지 않아 드디어 이봉주 선수와 사진도 찍고 친필사인도 받으며 간단한 인사와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예전에 방송에서 보던 것보다는 훨씬 안색이 좋아진 듯한 이봉주 선수.
개인적으로 그의 겸손하고 따뜻한 인성과 끈기 있는 레이스를 정말 좋아하고 존경한다. 하루빨리 쾌차해서 다시 힘차게 달리는 그의 모습을 볼 수 있길 기대해 본다.
그 사이에 내리던 비는 거짓말처럼 그쳤고 비는 오지 않으면서 적당히 선선한, 달리기에 아주 적합한 날씨로 바뀌어 있었다. 생각보다 많은 참가자들이 출발선 주변으로 모여들었고 살짝 긴장을 했는지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출발 준비를 해본다.
고단함을 무릅쓰고 아침 댓바람부터 마누라 마라톤 대회까지 함께 따라나서 준 고마운 남편의 힘찬 응원을 받으며 드디어 출발.
21킬로, 하프 마라톤이 시작됐다. 한국에서의 첫 대회.
날씨 좋고 분위기 환상이고 레이스 코스는 완벽했다.
아직 장거리 비행으로 인한 시차적응도 안된 듯하고 여독이 완전히 풀리지 않아서 다리가 무겁게 느껴지긴 했지만, 욕심부리지 않고 즐기며 달리려고 했다. 뛰는 내내 너무 행복했고 너무 행복해서 실감이 나지 않았던 나의 첫 대회. "드디어 내가 이곳에서 뛰고 있구나!'
다른 어느 곳에서 달릴 때보다 더 기쁘고 행복했던 한국에서의 첫 대회, 뚝섬마라톤.
2시간 5분으로 나쁘지 않았던 기록과 함께 하프마라톤 여자부 19위로 골인해 메달과트로피까지. 내 인생의 마라톤 수첩에 또 하나의 소중하고 행복했던 추억으로 남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