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5월 이맘때쯤 열리는 MVA (Marianas Visitors Authority) 주최'Tourism Month 5K Run'.
순수하게 달리기 기록으로 승부를 가리는 부문과, 여행과 관련된 코스튬 콘테스트 경쟁 부문으로 나눠진 이 대회는, 관광산업이 섬 경제의 주축을 담당하는 사이판에서 꽤나 중요한 이벤트인지라 가끔은 주지사를 비롯한 정부 인사들도 함께 참여해서 행사 분위기를 북돋우며 관계자들을 독려하곤 한다.
대회 시작 한 시간 전에 도착해 웜업으로 10분 정도 행사장 주변을 달리며 몸을 푼 후, 각자 개성 있고 재밌는 코스튬을 차려입은 참가자들을 구경하며 인사를 나눴다. 각 부문의 1등부터 3등까지 제법 큰 액수의 상금이 걸려있어서 그런지, 코스튬에 진심으로 공을 들인 참가자들의 노력과 성의가 돋보이는 훌륭한 작품들이 많이 보였다.
작년에 이어 올해도 달리기 경쟁 부문에 참가한 나는,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상금에 욕심을 내며
내심, 이번 대회에는 나보다 빠른 여자부 경쟁자들이 참가하지 않기를 은근히 바랬었지만
역시나...
그동안 다른 자잘한 대회에는 얼굴을 비추지 않았던 고수들이 이번에는 상금을 챙기러 나왔다는 듯 여유 있는 모습으로 하나둘씩 등장했다.
대회에 나왔다 하면 무조건 압도적인 기록으로 1등을 독차지하는 37세의 미국인 여의사이자 철인 3종 경기 챔피언이기도 한 닥터 Lilly는 다행히도 이번 대회에 출전하지 않았지만, 왕년의 일본 여자 국가대표 육상 선수 출신에 현재는 사이판 중 고등부 육상 코치로 활동 중인 50대 초반의 아줌마 아키코가 위풍당당하게 나타났으며, 아키코와 늘 선두 자리를 번갈아가며 차지하는, 비슷한 연배의 일본인 아줌마 노리코의 모습도 보였다.
'젠장, 오늘은 1~2위 하긴 글렀군.'
그렇다면 뭐, 아쉬운 대로 3위라도 노려보자 마음먹으며 열심히 준비 운동을 하고 있는데, 작년 여름에 미국에서 사이판으로 이주해 온 Taflinger 가족이 저 멀리서부터 등장했다.
사이판에서 교편을 잡고 있는 이 부부에게는 큰 아들과 두 딸, 이렇게 세 자녀가 있다.
유전자의 힘인지, 다섯 명의 가족 구성원 모두가 달리기에 뛰어난 재능이 있어서 각종 대회가 열릴 때마다 온 식구가 열심히 참가하곤 하는데, 아빠와 15살짜리 아들은 어차피 남자 선수들과 경쟁하니 상관없지만,
아직 어리긴 해도 꽤 빠른 스피드와 에너지를 가지고 있으며, 유소년 축구팀에서 공격수로도 맹활약 중인 둘째, 13살 딸내미는 나를 능가하고도 남을 만큼 위협적인 실력자였으니...
3위 자리라도 지켜내고 싶었던 나의 야무진 바람에 적신호가 켜졌다.
'아, 오늘 여러 가지로 안 도와주는 날이네.'
한동안 잠잠하던 갱년기 불면증이 하필 대회 전날 밤 다시 도지는 바람에밤새 거의 한 시간도 자지 못하고
그로 인해 머리가 띵하고 멍하다 못해 어질거리는 상황에서도, 어떻게든 죽기 살기로 뛰어 보겠다 마음먹은 방년 50세 아줌마의 다리에 힘이 풀리는 걸 느끼는 순간이었다.
드디어 출발 신호가 떨어지고 늘 그렇듯, 초반 오버 페이스를 조심하면서 어쨌든 최선을 다해 달렸다.
두 일본 아줌마들은 진작에 내 시야에서 총총히 사라져 갔고, 이미 아침 7시가 넘어 뜨거운 햇살이 이글거리는 주로에는 13살 소녀와 50세 아줌마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치열하게 달리고 있었다.
약 2킬로미터 지점까지는 그래도 서로 엇비슷하게 달릴 수 있었지만, 그 이후부터는 확연히 실력과 체력 차이가 나기 시작했다.
거친 숨을 몰아쉬고 헉헉대며, 이미 지쳤다는 티를 팍팍 내는 나와 달리여전히 기운 팔팔해 보이는 13살 소녀는, 발바닥에 용수철이라도 달린 듯 통통 거리며 쌩하니 나를 앞질러갔다.
사력을 다해 어떻게든 따라잡아 추월해 보고 싶은 마음이 없진 않았지만, 그러기엔 이미 무거워질 대로 무거워진 다리와 점점 더 벌어지는 소녀와의 거리가 그것이 결국 불가능한 일이라는 걸 깨닫게 해 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