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세 생일이었던 올해 3월 27일, 그렇게 생애 첫 50km를 고작 한 번 뛰어 보고는, 이번엔 100km에 도전하겠다는 야무진 꿈을 꾼다.
그리고 나름의 계획을 세워본다. 아이들 방학을 이용한 두 달가량의 한국 체류 기간 동안, 훈련 삼아 매주 여러 대회에 참가해 본 후 100km 대회에 도전해 보자고 말이다.
하지만 기대에 찬 첫 도전이었던 문경 울트라 마라톤 대회는 폭우로 인한 대회 강제종료로 좌절됐고, 실망이 컸지만 내년을 기약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내게 8월 3일에 열리는 서평 울트라 마라톤 100km가 눈에 들어왔다.
경기도 파주 임진각 평화의 종 앞에서 출발, 서울 응봉 체육공원 종료.
사이판으로 다시 돌아가는 출국일인 8월 11일, 그 바로 일주일 전에 열리는 대회.
시기상 장마가 끝난 직후라 당연히 엄청난 폭염이 불을 보듯 뻔히 예상되는 날씨.
첫 도전으로는 너무도 어렵고 힘든 조건임에는 틀림없어 보였지만, 왠지 욕심이 났다.
'시간이 맞지 않는다면 모를까, 시간도 딱이구만.
'뭘 내년까지 미루고 기다리냐! 쇠뿔도 단 김에 뺀다고 그냥 이번에 해치우고 들어가! 너도 그러고 싶잖아!'
대회 홈페이지가 마치 나에게 이렇게 속삭이는 듯했다.
2~3일 정도 고민하던 나는, 서평 울트라 마라톤과 같은 날 열리는 트레일런 대회를 취소하기로 결정했다.
이미 접수완료하고 입금까지 마친 상태였는데 말이다.
그리고 오로지 8월 3일을 위해 나름의 노력을 했다.
74 호랑이 친구들과 함께 했던 트레일런과 둘레길 코스 달리기, 남한 산성 트레일런, 대전 갑천변에서 열렸던 폭염 속의 10km 레이스, 갑작스럽게 언택트 대회로 바뀐 해피레그의 기록을 위해 트레드밀 위에서 50km 달리기, 새벽 양재천 15km 조깅 등... 무덥고 습한 날씨였지만, 단 한 주도 그냥 지나가지 않고 매 주말마다 이런저런 대회나 그룹런에 참가하며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훈련했다.
그리고 그날이 왔다.
이미 예상은 했지만 날씨가 무서울 정도로 위협적이었다. 생전 처음 가보는 파주 임진각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을 만큼, 어마어마한 습도와 뜨거운 열기는 내 정신을 혼미하게 만들고 있었으며 숨이 턱턱 막히다 못해 호흡이 곤란할 지경이었다.
마치 시합 전 상대의 기를 꺾어 놓으려고 갖은 수를 쓰며 위협적인 제스처와 포효를 하는 선수처럼, '네가 이런데도 해보겠다고?' 하며 날씨가 나에게 심술을 부리며 조롱하는 듯했다.
핸드폰으로 쉴 새 없이 들어오는 폭염 경보는 대회를 시작하기도 전에 참가자들의 마음을 어지럽히고 있었다.
마음을 독하게 먹었다. '절대 무리하진 말자. 하지만 기어서라도 꼭 피니쉬 라인에는 들어가고야 만다!'
문경 울트라 마라톤 참가를 계기로 인연이 된, 베테랑 선배님이 동반주까지 해 주시겠다며 저렇게 든든하게 앞에서 이끌어 주시는데 뭐 겁날 게 있겠나 싶은 마음도 있었다.
일단 출발하면 골인할 때까지, 그 누구의 힘이나 도움 때문이 아닌, 오로지 주자 자신의 의지와 힘으로 가는 것이기에 완주자에게 주어지는 울트라 마라톤 완주의 위업은 본인이 실컷 만끽하시길!
영원히 끝날 것 같지 않게 징글징글하고 힘들었던 100km를 끝끝내 완주한 후, 동반주를 해 주신 선배님께 진심으로 고개 숙여 감사의 인사를 드렸더니 내게 해 주셨던 말씀이다.
참으로 존경스럽고 멋진 선배님이 아닐 수 없다.
총 대회 참가자 282명, 최종 완주자 178명, 완주율 63%의 대회였던 서평 울트라 마라톤.
8월 3일 토요일 오후 5시에 출발해서 다음날인 8월 4일 일요일 오전 10시 전에 도착해야 하는, 제한시간 17 시간의 레이스.
살인적인 폭염으로 인해 중도포기자나 컷오프 타임에 걸려 탈락한 참가자들도 적지 않았던 대회.
경험 많은 울트라 마라톤 베테랑들도 힘들다고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던 대회.
그 힘든 대회를 울트라 마라톤 생초보인 내가 기어이 완주했다.
비록 82km 지점부터 속이 울렁거리며 뒤집어지기 시작했고, 90km 이후엔 이글거리는 아침 햇볕 아래 그늘 한 점 없는 주로를 끙끙 앓는 신음 소리와 함께 이를 바득바득 갈며, 제한 시간인 17시간에 거의 임박한 16시간 44분 만에 걸어서 피니쉬 라인까지 들어갔지만... 결국엔 기어이 끝을 보고야 말았다.
내 인생에 두 번의 울트라 마라톤은 없다며, 다시는 이런 미친 짓을 하지 않겠다고 애꿎은 선배님께 짜증을 내기도 하고, 바짝 예민해져 있는 내 신경을 거슬리도록 긁어대며 유난히도 요란하게 울어대던 매미들에게 욕까지 해가며 정말 너무도 힘들게 완주를 했지만, 한편으로는 기억에 남는 일들도 많다.
하늘을 온통 붉게 물들이고 뉘엿뉘엿 아쉬운 듯 넘어가는 석양을 바라보며 묵묵히 달리던 순간, 내가 농촌의 대표적인 냄새라고 자부라도 하듯 깊고 진하게 풍겨오는 거름 내음을 맡으며 비닐하우스들이 옹기종기 모여있는 어느 시골 마을 길을 지나가던 일, 식사 제공을 해 주는 52km 지점에서 그래도 먹고살겠다고 무슨 맛인지도 모르겠는 밥이 말아진 멀건 북엇국을 야무지게 먹던 일, 같은 목적으로 모인 사람들끼리 서로 통성명을 하고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밤새 뛰다 걷다를 하다가 때로는 편의점에 들러 시원한 캔맥주나 커피를 즐기던 여유, 해가 떨어지고 밤이 됐는데도 바람 한 점 없이 더웠던 밤공기탓에, 미지근한 아리수 물로 세수를 하며 열을 식히던 일, 영원히 끝날 것 같지 않던 밤이 지나고 이번엔 붉게 물든 하늘의 일출을 감상하며, 이미 지칠 대로지쳐버린 심신을 추스르던 순간...
어느 것 하나 기억나지 않는 것이 없고 어느 하나 소중하지 않은 순간들이 없었다.
어쩌면 내 평생 절대 잊을 수 없는, 몇 안 되는 귀한 시간들 중 하나가 될지도 모르겠다.
비록 발가락마다 왕물집이 잡혀서 개구리 왕눈이 발가락이 되고, 그로 인해 며칠 동안은 제대로 걷기도 힘들었으며, 오랜 시간 동안 땀에 절은 상태로 옷의 마찰이 있었던 곳은 피부가 까져서 벌건 속살이 드러나 진물이 흐르지만... 모두 내 첫 100km 울트라 마라톤의 추억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울트라 마라톤을 한 번도 안 해본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하는 사람은 없다.
거의 실신 직전의 상태로 피니쉬 라인을 통과한 후, 다시는 안 할 거라고 고개를 흔들자 주변의 울트라 선배님들과 친구들이 내게 했던 말이다.
그때는 저 말이 제대로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고, 오히려 그런 말 하지도 말라고 버럭 하기도 했지만, 사람의 욕심이란 게 참 어리석고 사람의 마음 또한 참 간사한 것이 아니던가.
'이번엔 날씨도 너무 최악이었고 게다가 넌 처음이었잖아. 선선한 계절에 다시 한번 도전해 봐, 아마 지금 보다 훨씬 잘할 수 있을걸?'
이건 또 어디서 들려오는 사악한 유혹의 목소리인지... 그 혹독했던 시간들이 채 일주일도 지나지 않았는데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