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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라토너 거북 맘 Nov 11. 2021

노안이 찾아오다.

돋보기는 나의 친구 / 일상 이야기

'아, 이를 어쩐다... 집에 돋보기를 놓고 왔는데....'


워낙에 시력이 좋았었던 나는, 늘 1.5 정도의 시력을 유지해 왔지만

늦은 나이에 공부를 시작하면서 급격하게 시력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깨알같이 작은 글씨들이 와글거리는 전공 서적을 읽어대고

새벽까지 컴 앞에서 리포트를 쓰다 보니 어느새 내 눈은 혹사당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긴, '만학도'라는 이유가 아니더라도

이미 내 나이쯤이면 '노안'이라는 손님이 찾아와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시기이기도 하다.


책을 읽거나 리포트를 쓸 때만 사용하기 위해 맞췄던

읽기 전용 돋보기는 늘 집에 두고 다녔었기에

어느 날 아이들을 데리고 병원에 볼 일이 있어 들렀다가

무슨 양식을 작성하라며 간호사가 던져준 파일을 보고 난감해졌다.

아무리 미간을 찌푸리며 들여다봐도 글씨가 자꾸 어른거리기만 할 뿐

당최 무슨 글자인지 읽히지가 않았던 것이다.


예전에 한국에 있을 때는

은행이나 관공서에 공용으로 사용할 수 있는 돋보기가 늘 비치돼 있었던 것 같은데...

'왜 여기는 그런 서비스도 없나' 하며 괜한 트집까지 잡고 있는 나 자신이 처량하게 느껴졌다.


'Far sightedness'

가까이 있는 물체보다 먼 거리에 있는 것을 더 잘 보는 '원시'를 뜻하기도 하지만

'노안'이라는 뜻으로도 통한다.

그리고 종종 영어에서는 '선견지명이 있고 혜안이 있는'이라고 해석되기도 한다.


나는 참 이 해석이 마음에 든다.

영어에는 한 단어가 몇 가지 의미로 해석되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Far sightedness'가 가장 맘에 드는 단어이다.


생각해 보면, 어릴 때 돋보기를 쓴 구멍가게 할아버지가

두꺼운 돋보기 너머로 그저 나를 흘끗 쳐다보기만 하셨을 뿐 인데도

뭔가 잘못하다 들킨 아이 마냥 움찔했던 기억이 난다.

할아버지의 돋보기가 몰래 사탕 하나를 슬쩍하려고 했던

내 마음속을 먼저 읽어 버린 것처럼 말이다.


세상의 희로애락을 모두 겪은 연륜과

다양한 삶의 풍파를 거친 경험에서 우러나는 지혜와 내공.

비록, 육체적인 시력은 퇴화되었지만

세상을 들여다보는 지혜의 눈은 더 밝아지고 멀리 보게 되는 현상이 '노안' 이 아닐까.


집에 놔두고 다니는 돋보기 외에

늘 핸드백 속에 넣고 다닐 돋보기를 하나 더 장만했다.

그래야 이런 난감한 상황에 대비할 수 있을 듯해서 말이다.


하지만 뭐 괜찮다.

 'Farsighted eyes'를 가졌지 않은가.

'퇴화되고 늙은 눈'이 아니라

'선견지명이 있는 혜안'을 말이다.


돋보기 없이는 이제 안심이 안 되는 나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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