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마라토너 거북 맘 Nov 19. 2021

거북 맘의 특별한 졸업식

일상 이야기


"우와, 이거 어쩌지? 진짜 내가 뽑혀 버렸네!"


더럭 겁이 났다.

'실수하면 완전 개망신일 텐데...' 걱정도 됐다.

하지만 곧 생일인 남편을 위해

무엇보다, 그동안 늙은 마누라 대학 공부시키느라

고생한 것에 대한 작은 선물과 보답으로

졸업식 날, 깜짝 선물을 하기 위한 계획은

꽤 오래전부터 마음속으로 혼자서만 생각해 오던 일이었다.


2020년 졸업생이었지만

팬데믹이라는 불가피한 상황 때문에

미루고 미뤄지다가 결국 2021년 5월 21일에

그렇게 기다리던 졸업식을 할 수 있었다.


사십 대 후반의 토종 한국 아줌마가

무사히 모든 과정을 마치고 외국에서 대학을 졸업 하기까지의

결코 눈물 없이 들을 수 없는 사연들이야 더 말해서 무엇하랴.


어쨌든 평생 기억에 남을 졸업식을 위한 나의 비장한 계획은

바로 졸업 연설자로 뽑히는 것이었다.


Commencement Speaker라고 불리는 졸업 연설자로 뽑히기 위해서는

몇 가지 조건들이 있다.

'Candidates must be in good academic and disciplinary standing to apply.'


당연히 그동안의 학점과 생활 태도 등이 고려된다.

그리고 그 조건에 부합한다면

직접 작성한 졸업 연설 스크립트를 지참하고

후보 자격으로 오디션에 참가해야 한다.


졸업 연설자를 뽑기 위해 선정된

여러 명의 교수님들과 학교 관계자들 앞에서 오디션을 본 후

최종 관문을 통과하고 선택돼야만

졸업 연설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 오디션에서

쟁쟁한 젊은 후보들을 제치고

내가 뽑힌 것이다!

이거 실화냐고요.



족히 3일 동안은, 하루 종일 졸업 연설문 스크립트 만들기에 매달렸다.

다듬고 고치고 빼고 덧붙이기를 몇 날 며칠.

그럭저럭 만족한 스크립트가 완성되자

오디션을 위한 연습에 돌입했다.


아무리 훌륭한 대본이 있어도

버벅거리고 쭈뼛거리면서 긴장한 모습을 보인다면

그 연설은 망한 거나 다름없다.


아직 극비리에 나 혼자 준비하고 계획하는 일이기에

남편이 눈치채지 않게 조심해가며

아주 지독하게 연습에 연습을 거듭했다.


늙어서 습득한, 모국어가 아닌 언어로 대중 앞에서 발표나 연설을 잘하는 방법은

내 경험상 딱 한 가지밖에 없다.

바로, 무식하고 지독하게 반복해서 연습하는 것이다!

그것은 늦깎이 대학생으로서

젊은 원어민 친구들과 함께 경쟁하며 깨달은 나만의 노하우 이기도 하다.


그 친구들은 발표를 하다가 내용이나 디테일한 부분을 잊어버려서 막히더라도

 다른 표현의 영어로 잽싸게 임기응변이 가능한 반면,

내 경우는 한번 리듬이 끊기거나 흐름을 놓쳐버리면

갑자기 머릿속이 하얘지면서 블랙아웃이 되는 경험을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그 이후부터 항상

발표 내용은 물론, 토씨 하나 손동작 하나까지 깡그리 외워서

수많은 프레젠테이션들을 준비했던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설거지할 때도, 운전할 때도, 요리할 때도...

잠드는 마지막 순간까지 계속 미친 여자처럼 중얼중얼 거리며

목이 쉬도록 지독하게 연습을 거듭해야 했다.


이번에도 예외 없이, 나의 지독한 반복과 연습은 계속되었다.




드디어 그날이 왔다.

2020년과 2021년 졸업생들이 함께 졸업식을 하게 된 사정 때문에

호텔 몇 개를 빌려서 스트리밍으로 진행된, 특이한 이벤트였다.


게다가 팬데믹 상황을 고려하여 졸업생들과 교수진, 학교 스텝들 외에는

가족이나 친구 같은 게스트들도 졸업식 현장에 참석하지 못했다.

그저 스트리밍으로 각자의 위치에서

졸업식이 진행되는 상황을 디바이스로 시청할 수밖에 없었다.


졸업식 때는 친정 식구들 모두 비행기로 모셔서

꼭 같이 축하하도록 하겠다는 남편의 야무진 꿈도

팬데믹 덕분에 아쉽게 무산되고 말았다.


자리를 가득 메우고 있는 졸업생들과 교수님들이 시야에 들어오고

그럴듯하게 준비된 졸업식장에 들어서자

갑자기 가슴이 울렁거리고 식은땀이 나기 시작했다.

'내가 미쳤지. 이걸 왜 한다고 해가지고...'

'지금이라도 못하겠다고 할까?'


호텔에서 제공하는 식사도 먹는 둥 마는 둥

그 순간이 오기 전까지 그야말로 좌불안석이었다.




'Live as if you were to die tomorrow.'

'Learn as if you were to live forever.'


내 졸업 연설의 주제였다.

수많은 어록을 남긴 '마하트마 간디'의 명언 중 하나이다.


그리고 이것은 내 인생의 모토이기도 하다.

내일 죽을 사람처럼 후회 없이 열정적으로 살고

영원히 죽지 않고 살 것처럼 평생 배우고 도전하고 싶은 것이 나의 바람이다.


수 백 수천 개의 눈과 귀가 내 졸업 연설을 보고 듣는다는 사실은

이미 내 머릿속에 없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제대로 해보자.'

아랫배에 힘을 꽉 주고 연단으로 올라갔다.


실전에 강한 건지 어쩐 건지...

다행히 큰 실수 없이 제법 당당하고 뻔뻔하게 연설을 마쳤다.


그동안 수고한 남편을 위해

연설 도중, 남편의 이름과 함께 "I love you!"를 사정없이 외치기도 했다.

고맙게도 엄청난 환호성과 박수가 쏟아졌다.


회사에서 직원들과 함께

졸업식 생중계를 시청하고 있던 남편은

자기 이름이 그렇게 크게 불릴지 몰랐다며

직원들이 박장대소하며 축하해줬다고 했다.


다소 엉뚱하고 무모해 보이기까지 했던 나의 도전은

제법 성공적으로 끝났다.

무엇보다 남편이 너무나 흐뭇해하고 자랑스러워했고

친정 엄마를 비롯한 가족들이 진심으로 기뻐하고 축하해 주었다.


그리고 내게는

죽을 때까지 평생 잊지 못할 '특별한 졸업식'으로 기억에 남을 것이다.


이 순간을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엄마의 외출 준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