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외출 준비

일상 이야기

by 마라토너 거북 맘

"엄마, 어디 가실 거예요?"


10살, 8살의 두 자매는 눈을 빛내며 물었다.

마치, '그동안 기다려왔던 재밌는 구경을 할 수 있겠구나' 하는

기대감에 들뜬 표정으로 말이다.


욕실에서 말갛게 세안을 하고 나오신 엄마는

화장대 앞에 앉으셨다.


어린 두 자매는 나란히 엄마의 뒤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거울을 통해 보이는 엄마의 표정은

사뭇 진지하고 엄숙하기까지 했다.


짝짝, 짝짝짝!

쌍 따귀를 때리듯 화장수와 로션을 얼굴에 바르신 엄마는

베이지 색의 작은 병을 집어 드셨다.

엄마는 그것을 '파운데이션'이라고 부르셨다.


파운데이션을 얇고 고르게 얼굴에 펼쳐 바르신 엄마의 얼굴이

가면을 쓴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

엄마는 작은 통 하나를 서랍에서 꺼내셨다.

'파우더'라고 부르는 그것을 얼굴에 골고루 톡톡 두드려 바르시자

갑자기 엄마의 얼굴이 솜털처럼 보송보송해 보였다.


"오오, 이제 곧 시작이야!"


사실, 이때까지는 그저 준비 과정들에 불과했다.

두 자매가 기다리던 순간은 지금부터 시작인 것이다.


엄마는 화장대에서 연필 하나를 집어 드셨다.

그러더니 아주 섬세하고 정교하게 눈썹을 그리셨다.

나는 거울을 보며 진지하게 눈썹을 그리고 있는 엄마가

언젠가 텔레비전에서 본 적이 있는

화선지에 난을 치는 여인과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이윽고 까맣고 작은 케이스를 꺼내 드신 엄마는

잠깐 거울을 들여다보며 중간 점검을 하셨다.

눈썹은 짝짝이가 아닌지, 화장이 뭉치지는 않았는지...


그러더니 갑자기 엄마가 눈을 치켜뜨고 뒤집으신다.

턱은 하늘을 향해있고 입은 살짝 벌어져 있다.

'마스카라'를 속눈썹에 칠하시는 엄마의 얼굴은

때로는 우스꽝스럽고, 때로는 공포 영화에서 본 듯 무서워 보이기도 한다.


마스카라를 칠한 속눈썹이 한동안 파르르 떨리고

몇 번 눈을 깜빡거리시던 엄마는

드디어 립스틱들이 들어있는 서랍을 열고 한참을 망설이신다.


두 자매는 각자 속으로 외친다.

'엄마! 오렌지 핑크색이요!'

'아니요, 이번엔 퍼플 와인색 이라니까요!'


하지만 엄마가 집어 든 색깔은

화려하고 고운 진달래빛 립스틱이었다.

'아, 또 저 색깔이야...'


잠시 실망한 자매는 다시 엄마를 주시한다.

립스틱을 바를 때 엄마의 입매나 얼굴 표정은

어린 자매들이 보기에도 너무나 고혹적이고 묘한 매력이 느껴졌다.


자칫하면 촌스러워 보이기 십상인 강렬한 색상 덕분에

다른 엄마들은 쉽게 도전하지 못했던 진달래빛 립스틱은

엄마에게는 자신감이자 개성을 드러내는 수단이었던 것이다.

진달래빛 립스틱은 위험하다.


이쯤에서 자매는 마른침을 꿀꺽 삼킨다.

거울에 비친 엄마의 얼굴은

은막의 스타라고 불리던 그때 그 시절의 여배우 아줌마들이

울고 갈 정도로 곱고 예뻤다.



공들여 화장을 마치신 엄마는

뚜껑을 열면 '엘리제를 위하여'라는 음악이 흘러나오는 보석함을 여셨다.


엄마가 오늘은 과연 어떤 귀걸이를 선택하실지

목걸이와 반지는 뭘로 하실 건지

서로 의견이 분분하던 자매는

마름모꼴의 밝고 경쾌한 연녹색 귀걸이를 집어 드신 엄마를 보고 생각했다.

'굿 초이스!'




엄마가 다른 친구들의 엄마들과 달랐던 것은

단지, 진달래빛 립스틱만이 아니었다.


엄마는 참 독특하고도 고전스러운 헤어스타일을 고수하고 계셨던 것이다.

쇼트커트 머리에 파마를 했거나

아니면 단발 기장 정도의 평범한 스타일이 대부분인 아줌마들 사이에서

엄마는 아무나 못 한다는 5:5 가운데 가르마를 타고

빚어낸 듯 깎아낸 듯 동글동글한 두상이 드러나도록

헤어 오일을 발라 곱게 빗은 머리를 틀어 올리거나 묶고 다니셨다.


그 헤어 스타일은 아주 오랫동안 엄마의 트레이드 마크여서

시장을 가건 학교를 가건 어디서나

먼발치에서도 누구나 한눈에 엄마를 구분할 수 있었다.


엄마가 어쩌다 학교라도 찾아오신 날에는

친구들은 마치 연예인을 보듯 우리 엄마를 쳐다보았고

우리 자매는 괜스레 어깨가 올라가고 으쓱해졌었다.


엄마의 트레이드 마크였던 고전적인 쪽머리


이윽고 옷장 문을 열고 이 옷 저 옷을 몸에 대보시고

거울에 비춰 보시던 엄마는

원피스 하나를 꺼내셨다.


다른 어떤 스타일의 옷보다

원피스 종류가 잘 어울리시던 엄마는

유난히 그 원피스가 참 잘 어울리셨다.


연한 살구빛 바탕에 하얀 레이스와 작은 꽃무늬들이 은은하게 어우러져 있던

무릎을 덮는 기장의 그 원피스는

마치 동화책 속에 나오는 공주님들이 입는 옷 같았다.


이제 모든 것이 완벽하다.

두 자매는 낮은 탄성을 지르며 엄마를 쳐다본다.

"와, 우리 엄마 정말 예쁘다."


'나도 알아, 얘들아. 내가 좀 예쁘긴 하지.' 하는 표정으로

살짝 도도한 미소를 짓던 엄마는

아끼던 핸드백을 조심스럽게 어깨에 메고

신데렐라의 유리구두 마냥 반짝이는 구두를 신고

총총히 대문을 나서신다.




이제 나는 그 시절의 엄마보다 더 나이가 들었고

엄마는 더 이상 쪽진 헤어스타일을 고수하지 않으신다.

염색하기 귀찮고 번거로워서 그냥 짧게 잘라버렸다고 하시는

엄마의 표정에서 시원섭섭함을 느낀 건 나만이 아닐 것이다.


엄마와 달리 나는, 거의 평생을 짧은 헤어 스타일을 고수하고 있고

공들인 고운 화장을 하지도 진달래빛 립스틱을 바르지도 않는다.

귀걸이가 웬 말인가,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액세서리는 소 닭 보듯 하는 사람이다.


덕분에 우리 두 딸들은

그 옛날 나와 내 동생이 경이로움과 존경심마저 느끼며 구경하곤 했던

'엄마의 외출 준비'에 그다지 관심이 없다.


몇 년 전, 무릎관절 수술을 받으시고 부쩍 많이 늙어 버리신 엄마.

하지만, 우리 1945년생 광복둥이 김여사는 아직도 곱고 예쁘시다.


여전히 귀걸이나 목걸이에 관심이 많으시고

다 늙어서 이제 옷이 무슨 소용이냐고 하시면서도

남대문이나 동대문 쇼핑을 즐기시며

워낙 맘에 드는 옷이라 이것까지만 산다는 귀여운 허풍을 떠신다.


오늘따라 멋쟁이 김여사가 무척 그립다.

그렇구나, 엄마를 못 만난 지 벌써 2년이 넘었구나...

갑자기 눈앞이 흐려지는 밤이다.

세월이 흘러도 곱고 예쁜 김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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