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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라토너 거북 맘 Nov 26. 2021

불확실성에 대한 두려움

일상 이야기


저 어둡고 긴 터널의 끝에는 무엇이 있을까?

끔찍한 살인마가 시퍼런 칼을 들고 소름 끼치는 웃음을 머금은 채 나를 기다리고 있진 않을까?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저 터널은 어디로 이어지는 걸까?

혹시 저 터널 밖으로 나가자마자, 천 길 낭떠러지로 떨어져 버리는 건 아닐까?


인간은 기본적으로, 불확실한 미지의 세계나  낯선 대상에 대한 불안감이나 공포가 있다.

어린 시절 누구나 한 번쯤은, 정전으로 인해 칠흑같이 어두워진 집안을 혼자 더듬어가며

현관문이 어디 있는지, 촛불이나 손전등이 어디 있는지 찾느라 애를 먹으며 헤매 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사실 전혀 낯선 곳도 아닌, 늘 익숙한 우리 집인데도 불구하고

막막한 어둠 앞에서는 어이없게도 당황하고 어쩔 줄 모르는 상황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한 치 앞을 볼 수 없는 어둠 속에서는 모든 것이 불확실하기 때문이다.




"저, 그러니까 선생님, 저희 남편 사업이 언제쯤 괜찮아질까요."
"집안 사정이 좀 나아지긴 하려나요?"


이런 곳에 오는 것이 한두 번도 아닌데, 엄마는 늘 약간의 긴장감과 초조함이 섞인 표정으로 묻는다.

마치 엄마가 기다리고 있는 답을 언젠 가는 들을 수 있을 거라는 듯

그래도 누군가는 제대로 된 이야기를 해 줄 거라는 희망을 가지고

유명한 철학관이나, 최근에 신내림을 받아 용하다고 소문난 무당집을 종종 찾곤 하셨었다.


당신이 여기 온 이유를 나는 이미 알고 있다는 듯

내 눈엔 너의 앞날이 훤히 보인다는 듯한 거만한 목소리가 드디어 작은 방안의 정적을 깨운다.

마른침을 꿀꺽 삼키는 엄마를 쳐다보며 나도 덩달아 입안이 바짝 마른다.


"바깥양반이 이때까지 일이 잘 풀린 적이 없었구먼!"

"그나마, 와이프 복으로 만큼이라도 살아온 거네!"

"그래도 우리 어머님은 초년에는 고생 많이 하셨지만 말년에는 괜찮을 거요."


이번에도 역시... 역시였다.

하얀 종이에 집안 식구들의 생년 월일과 태어난 시를 휘갈겨 쓴 후

읽기도 힘든 한자인지 영어인지 모를 글자들을 잔뜩 그려 넣은 종이를 한동안 들여다본 후에는

어김없이 비슷한 말들이 들려왔다.


희한한 건, 대체적으로 우리 식구가 어떻게 살아왔고

아빠가 예전에는 어땠으며 엄마는 이날 이때까지 얼마나 힘든 시기를 거치며 고생을 했었는지에 대해서는

정말 귀신같이 읊어댄다는 것이다.


하지만 정작 듣고 싶은 우리 가족의 앞날이나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는 아빠의 사업에 대한 것들은

속 시원하게 해답을 내놓거나 방향을 제시해 주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간혹 호언장담 하듯이 앞으로의 일들에 대해 자신 있게 이야기해 주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그 역시 시간이 지나고 보면 , 넷플릭스 드라마 '오징어 게임'속의 '홀짝 게임' 마냥

이거 아니면 저거, 50 대 50의 확률 게임 같은 것이었다.

대부분 뭔가 적당하게 둘러대는 듯한, 명색이 '전문가'라는 사람들의 애매한 설명은

어린 나에게 '쳇, 저런 소리는 나도 하겠네.'라는 치기 어린 반감이 들게 하기도 했다.




어쩌면 우리의 삶은, 평생을 '불확실성'과 함께 하면서 그것에 도전하며 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운명론자들에 의하면 우리의 미래나 운명은 이미 태어날 때부터 정해져 있고

자잘한 디테일들은 간혹 노력으로 바뀔 수 도 있겠지만, 굵직하고 큰 흐름은 이미 정해져 있어서 바뀔 수 없다고 한다.

이를테면, 부모 자식 관계나 부부의 인연 같은 것들도 한 예가 될 수 있겠다.


이번에 수능 시험을 잘 볼 수 있을지, 원하는 대학에 갈 수 있을지

입사 원서를 넣은 회사에 취직이 될지, 내가 산 주식이 과연 얼마나 오를지...

그렇다면 이런 것들은 과연 이미 정해져 있는 것일까, 아니면 노력으로 바꿔 볼 수 있는 것들일까.


사실, 우리가 확실히 알고 있다고 자신하는 사실이나 정보들은 극히 일부분이고 그나마 얼마 되지 않을지도 모른다.

대부분은 어설프게 알고 있거나, 알고 있다고 착각하거나

그동안의 경험치들을 바탕으로 미루어 짐작하거나 다른 사람들의 경우를 참고하는 것일 뿐이다.


그야말로 'Nobody knows'인 것이다.

용하다는 점쟁이도 훌륭한 석학도 그 누구도 백 퍼센트 정확하게 앞날을 알 수는 없다.

때문에 인간의 근본적인 두려움은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불확실성에 기인하는 게 맞다고 본다.



우리 아이들은 앞으로 어떤 세상을 살 것인지

 전 세계적인 팬데믹 상황은 앞으로 어떻게 진행될 것인지

점점 병 들어가는 우리 지구는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지...


주변을 둘러보면 온통 불확실한 것들 투성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하루하루 얼마나 많은 두려움과 공포를 겪으면서 살고 있는 것일까.

어딘가에 지뢰가 묻혀있을지 모르는 전쟁터를 헤매 듯

우리의 삶도 그토록 위태롭고 불확실하다.


종교나 정치, 보험, 금융, 경제 등 우리 사회의 다양한 분야들 역시 불확실성에 바탕을 두고 발전하고 있다.

인간이 모든 걸 다 알아버릴 수 있고 정확히 예측할 수 있다면

아무것도 미리 준비하고 대비를 할 필요가 없을 테니 말이다.


당장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불확실한 삶을 사는 우리의 자세는 과연 어떠해야 하는 걸까.

그 선택은 다양하고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이건 선택의 문제이지 틀리고 맞고의 문제는 아니기 때문이다.


나의 선택은 '나 자신을 믿는 것'이다.

결코 내가 박학다식하거나 현명해서가 아니다.

단지, 이 세상에서 나를 가장 잘 아는 건 나 자신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들을 감쪽같이 속일 수는 있어도

나 자신만은 속일 수 없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아무리 가까운 사람이라도 나만큼 나 자신이 원하는 게 무언지 잘 알 수는 없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나 자신을 믿고 내면의 소리를 듣고 내 판단을 존중하기로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다양한 노력이나 공부가 필요할 것이다.


건강한 육체와 정신을 유지하는 건 기본 중에 기본이다.

하루가 다르게 바뀌는 수많은 정보나 지식들을 습득하기 위해

독서와 사색, 명상과 글쓰기 로 내면을 채우는걸 게을리해서도 안 될 것이다.

좋은 사람들과의 인연을 소중하게 유지하며 늘 건강하고 원만한 인간관계를 위해 노력도 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사실, 이 모든 노력들은 나를 사랑하고 아끼는 방법들과도 일맥상통다.


끊임없이 나 자신을 가꾸고 사랑하며 좋은 것들로 가득 채워서 자존감과 자기애로 충만해질 때

그때는 아마도 어둡고 희미한 터널 속에서도 당황하거나 두려워하지 않고 자신 있게 빛을 향해 나아갈 수 있지 않을까.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으로 미리 두려워하고 걱정 하기보다는

앞날에 대한 호기심과 도전 정신을 가지고 나 자신을 갈고닦으며

담담하게 앞으로의 시간들을 받아들이고 싶다.


불확실함에 대한 두려움을 호기심으로 바꿔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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