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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라토너 거북 맘 Nov 29. 2021

영원한 내 편

일상 이야기


반복된 하루 사는 일에 지칠 때면 내게 말해요

항상 그대의 지쳐있는 마음에 조그만 위로돼 줄게요.


요즘 유행하는 영화 보고플 땐 내게 말해요

내겐 그대의 작은 부탁조차도 조그만 행복이죠.

(중략)


그대 곁엔 세상 누구보다 그댈 이해하는

나 자신보다 그댈 먼저 생각하는 남자가 있죠.

(중략)


혼자서 밥 먹기 싫을 땐 다른 사람 찾지 말아요

내겐 그대의 짜증 섞인 투정도 조그만 기쁨이죠.


오랫동안 항상 지켜왔죠 그대 빈자리

이젠 들어와 편히 쉬어요.


가수 유희열의 1인 프로젝트 그룹 '토이'의 '그럴 때마다'라는 곡이다.

이 노래를 들어온 세월이 도대체 얼마나 흘렀는지는 금세 계산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처음 이 곡을 들었을 때의 잔잔하고 따뜻했던 감동은

여전히 변치 않고 그대로인 것 같다.


이 노래를 들을 때마다

내일모레면 쉰을 바라보는 무뎌진 아줌마의 마음에

 풋풋했던 감성과 아련한 추억들을 되살려주고

이젠 기억조차 희미해진 내 젊은 날들을 떠올리게 하니 말이다.


불같은 사랑이나 열정적인 감정을 표현한 노래가 아니어서 더 좋다.

너무 사소하고 평범할 수도 있겠지만 그래서 더 편한 휴식 같은 느낌이다.




부모 자식 간의 사랑 외에, 남녀 간에 무조건적이고 영원한 사랑이 가능할 수 있을까?

지금 한참 서로에게 빠져서

사랑에 눈이 멀어있는 커플들이야

당연히 그럴 수 있다고 자신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불같은 사랑에도 유효기간이 있다는 건

어느 정도 의학적으로도 밝혀진 사실이다.


남녀 간의 '사랑'이 무조건 밑도 끝도 없이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뇌'에서 분비되는 호르몬의 '화학작용'에 의해서 단계별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따라서 연애 초반의 열정적인 사랑부터

오랜 시간이 흐른 뒤의 편안함을 느끼는 사랑까지

모두 호르몬의 작용이 크게 영향을 미친다고 한다.


사랑에 빠지는 과정을 크게 4단계로 나눠서 살펴보면

처음에 상대방에게 호감을 느끼는 단계에서는 미상핵이라는 부위에 도파민이 분비되고

이것이 뇌의 다양한 부위로 흩어지게 된다고 한다.

이후에 열정적인 사랑에 빠졌을 때 페닐에틸아민이라는 호르몬이 나오고,

신체적 접촉을 통한 사랑의 완성 단계에서는 옥시토신이 평상시의 5배나 증가하기도 한단다.

마지막으로, 안정된 사랑을 하는 단계에서 행복 호르몬이라고 부르는 엔도르핀나온다고 한다.


첫 번째 단계에서 분비되는 호르몬인 도파민이 만드는 감정은

낭만적인 사랑의 감정이나 구애하고 싶은 욕망 등을 느끼게 한다.

사랑에 빠진 사람들에게 불가능이 없게 하는 것도 바로 이 호르몬이 담당하고 있다.

이를테면, 최소 10시간은 잠을 자야 정상적인 생활이 가능했던 사람일지라도

사랑에 빠지게 되면 밤새 이야기를 나눌 수도 있고

평소에는 상상하기 힘든 놀라운 힘이 솟아나기도 하는 것처럼 말이다.


천연 각성제라고도 불리는 페닐에틸아민

이성적으로 제어하기 힘든 열정을 분출시켜서 사람을 몽롱하게 만들기도 하고

온통 사랑에 집중하게 만드는 일을 담당하고 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다가가 끌어안고 자기 소유로 하고 싶은 충동과 집착도 이 호르몬과 관련돼 있다고 한다.


옥시토신과 엔도르핀은 쾌감 호르몬이라고도 하는데 남녀가 육체적인 사랑을 나눌 때 많이 분비되면서

행복감과 쾌감을 느끼게 하기도 하지만

평소에는 적당한 양이 분비되어 장기간 사랑의 감정을 이어갈 수 있도록 도와주기도 한단다.


그러므로, '사랑'은 우연이나 인간의 자유 의지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각 단계별로 뇌에서 분비되는 호르몬이

 사랑에 빠진 연인들의 행동이나 감정에도 영향을 미치는 것이고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서 서로에게 익숙해진 후에는

더 이상 호르몬의 분비가 예전처럼 활발하게 일어나지 않게 되면서

처음 같지 않은 둘의 사이를 느끼게 되는 것이다.




더 이상 갖가지 호르몬들이 새삼스럽게 분비될 일도 없는 아주 오래된 연인들이나

20년 이상의 세월을 동고동락한 중년이나 노년의 부부들은 어떤 사랑을 하는 걸까.

'사랑'이라는 단어를 입에 올리기조차 어색할 만큼 데면데면해 지거나

오랜 세월 동안 쌓인 정이나 의리로, 마치 전쟁터에서 함께 싸우는

전우 같은 관계가 되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그런 오래되고 익숙해진 관계에서 나오는

뚝배기처럼 깊고 뭉근한 속정과 신뢰감, 따스한 감정 등은

열정적이고 불같은 사랑과는 또 다른 매력이 있다.

비록 화려하지도 이젠 더 이상 뜨겁지도 않지만

그저 묵묵히 상대방을 바라보면서 변함없이

내 편이 되어주는 성실한 사랑의 파워는 생각보다 위대하다.


20년 가까운 결혼 생활을 하다 보니

남편과는 이젠 '쿵' 하면 '짝' 하는 사이가 됐다.
상대방이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아도

그저 얼굴 표정이나 집으로 들어서는 분위기만으로도

그날 하루가 어땠는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가 파악이 되는 경지에 이른 것이다.


살다 보면 누구나 그런 날이 있지 않은가.

일이 한번 꼬이기 시작하니까 도미노처럼 하루 종일 되는 일이 없고 안 풀리는 날.

주변 사람들 모두가 함께 작당이라도 한 듯

온종일 스트레스 주고 뒷목 잡게 하는 그런 날 말이다.


남편에겐 며칠 전이 그런 날이었다.

별 말은 하지 않았지만

'우리 영감, 오늘 참 힘들었구나' 하는 걸 느낄 때

나는 종종 데이트 신청을 한다.

때로는 분위기 좋은 호텔 디너를 즐기기도 하지만

기분이 다운될 때, 한국인에겐 역시 얼큰한 국물에 소주가 힐링이다.


"감자탕에 소주, 콜?"

평소보다 한 톤 높은 목소리로 쾌활하게 묻는 나를 보며

피식 웃는 남편의 표정이 싫지 않은 듯하다.

자주 들르는 한국 식당으로 들어서자 호들갑스럽진 않지만 편안하게 맞아주는 주인장의 인사가

오늘따라 반갑게 느껴진다.

들깨 가루가 들어간 얼큰한 감자탕과

윤기가 좔좔 흐르는 족발을 앞에 두고

남편과 나는 이야기 꽃을 피우기 시작한다.


"뭐여, 어떤 자슥들이 우리 서방님을 힘들게 하는겨. 내가 한번 싹 훑어서 정리해줄까?"

"그런 같잖은 것들은 신경도 쓰지 마셔. 그리고 당신, 혼자가 아니여."

"내가 있잖아, 그러니까 혼자서 너무 애쓰지 마셔."


오히려 내가 더 오버하며 씩씩거리고 열을 내며 흥분하자

어이없다는 듯 쳐다보다가 웃고 마는 남편...

비록, 우아하고 세련된 표현은 아니었지만,

내 방식대로의 위로와 응원을 남편에게 보냈다.


부부란 그런 아닌가 싶다.

피 한방을 안 섞인 남남이 만나서 가족을 이루고

동고동락하며 남은 평생을 함께 하는 거지만

세상 그 누구보다 든든하고 서로에게 버팀목이 돼 주는 영원한 내 편.


판사나 검사처럼 내 잘못을 따지고 들춰내며 옳고 그름을 가리는 게 아니라

다소 억지스럽고 뭔가 앞뒤가 안 맞는 상황이더라도

무조건 덮어놓고 내 옆에서 내 편이 되어 둘 수 있는 사람.


기쁘고 좋을 때나 힘들고 막막할 때

그 누구보다 먼저 생각나고, 서로에게 달려갈 수 있는 존재.

아직도 늘 내 가슴에 작은 여운을 남기는 그룹 '토이'의 노래처럼

그럴 때마다  항상 서로를 생각하고 위해주는

그런 게 바로 부부의 모습이 아닐까 한다.


"우리 부부 사이에는 이제 더 이상 가슴 뛰는

짜릿한 감정이나 열정이 없는 것 같아요."

불만스럽게 투덜거리는 결혼 10년 차의 여성에게

결혼 30년 차의 지긋한 선배님이 말씀하신다.

"평생 동안 가슴이 그렇게 벌렁거리고 뛰어 재끼면 그건 약 먹어야 하는 병이여."


그렇다고 하신다.


칼칼한 감자탕과 소주가 하루의 고단함을 씻어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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