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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라토너 거북 맘 Nov 30. 2021

결정 장애의 시대

일상 이야기

"새로 이사 가는 집에 들일 식탁을 고르는데요, 제가 심한 '결정장애' 거든요."

"의견 주실 분들께 미리 감사드릴게요, 식탁 좀 봐주세요."


자주 들르는 인터넷 카페에 정말 너무도 자주 올라오는 글의 유형이다.

개인적으로 이런 글을 처음 접했을 때 두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아니, 한 두 살 먹은 어린애도 아니고 나이가 얼만데, 왜 생판 모르는 남들한테 식탁을 골라달래?'

'결정장애'는 또 웬 신종어냐, 그렇게 아무 데나 '장애'라는 표현을 막 써도 되나? 듣기 불편하네.'

그래서 요즘 방송이나 인터넷에서 어렵지 않게 자주 접할 수 있는

'결정장애'라는 표현을 들으면 나도 모르게 미간이 살짝 찌푸려지면서 고개를 흔들게 된다.


이건 뭐, 사회생활도 할 만큼 하고 나이도 꽉 찬 사람들이 너도나도 결정장애란다.

겨울 코트를 어떤 걸로 사야 할지, 여행을 어디로 다녀와야 할지, 남자 친구 생일 선물을 뭘로 해야 할지...

내가 본 결정 장애자의 질문들 중에 가장 어이없었던 건

'둘째 아이를 가질까요 말까요'였다.

오호통재라, 어쩌다 세상이 이렇게 됐누.



언젠가 읽은 신문기사에서 특히 요즘 2030 젊은이들이 '결정장애 증후군'이 심하며

성인 남녀의 80.6 퍼센트가 자신이 결정장애를 겪고 있다고 대답한 내용을 봤다.

아예 '결정장애 체크 리스트'까지 있어서 스스로 내가 어느 정도인지 확인해 볼 수도 있다.


조사 결과, 결정장애를 가장 많이 유발하는 항목에는

식당 메뉴 고르기, 옷이나 신발 등을 쇼핑할 때, 진학이나 취업 등 진로를 결정할 때, 약속 장소 고르기 등

정말 너무도 다양한 분야에서 스스로 선택을 하지 못하고 망설이다가

다른 사람의 결정을 보고 따라 한다든가, 아니면 주변 사람들이나 네티즌들에게 물어보고 있는 게 현실이다.


'결정 장애' 혹은 '햄릿 증후군'이라고도 불리는 이 현상을 영어로는 'fence sitting'이라고 하고

펜스의 왼쪽과 오른쪽, 그 어느 쪽으로도 넘어갈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펜스 위에 걸터앉아 우유부단하게 고민만 하는 사람을 가리켜 'fence sitter'라고 한다.

사전적인 의미로는,

a state of indecision or neutrality with respect to conflicting positions이다.


'A fence sitter'를  'A neutral person'이라고도 부르는데

보통 사회 어느 분야에서든 자기 입장을 명확하게 정하지 못하거나

어느 쪽으로도 속해있지 않는 '중립'의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 특징이다.

A fence sitter

이와 비슷한 선상에서,

소속이나 정치적, 사상적 경향, 노선 등이 뚜렷하지 않은 사람을 가리켜 우리는 '회색분자'라고도 부른다.

흑도 백도 아닌 어중간한 '회색', Grey 말이다.


그러고 보면, 우리 사회 전반에 무수한 fence sitter들의 고민이나 번뇌가 제법 심각한 듯하다.

우유부단하다, 중립적이다, 나는 어떤 것이든 상관없다 정도로 그들의 입장을 정리하기엔 뭔가 부족해 보인다.


사실, 나의 학창 시절을 뒤돌아보면

나 역시 어렵고 심각한 결정을 내려야 할 상황에서는

몇 날 며칠을 갈등하고 고민하다가 친구나 선생님, 부모님, 학교 선배에게 자문을 구한 적이 없진 않았다.

하지만, 식당 메뉴나 약속 장소 등을 선택하지 못해서 애를 먹었던 적은 없었으니

그런 나로서는 너무나 개인적이고 사소한 것들까지 일일이 남들에게 묻고 확인하는

작금의 현상들을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다.


짜장이냐 짬뽕이냐.

중국집에 주문을 하면서 이런 고민 한 번쯤 안 해 본 사람은 아마 없지 않을까.

그래서 요즘은 아예 '짬짜면'이라는 중국집 메뉴가 따로 있기도 할 정도이다.

마켓에는 '고민 없이 둘 다 먹는 짬짜면'이라는 캐치 프레이즈와 함께 인스턴트 제품으로 나와있기도 하다.


예전에 비해 이렇게 '결정장애'를 유발하는 상황이 많아진 이유가 뭘까.


넘치도록 과다한 정보가 원인 중 하나라는 의견이 있다.

인터넷과 SNS 등의 발달로 일명 ‘정보의 바다’에서 살다 보니

선택지가 너무 많아 뭘 골라야 할지 혼란에 빠진 다는 것이다.


실패에 대한 두려움이 과감한 선택을 어렵게 하기도 한다.

남들로부터 인정받고 싶어 하는 욕구가 강할수록 오히려 실패를 두려워하고, 선택에 있어 우유부단해진다는 설명도 있다.

'내가 이런 선택을 해서 실패하거나 잘못되면 어떡하지.'

그런 생각이 머릿속을 지배해 버리면, 사소한 것 하나도 스스로 결정하기가 어려워지는 것이다.


어렸을 때부터 모든 것이 풍족하게 채워진 삶을 살면, 의사결정을 할 기회가 사라져 결정장애가 온다는 분석도 설득력이 높다.

엄마가 모든 걸 챙겨주면 자녀가 커서 우유부단한 ‘마마보이’나 '마마걸'이 된다는 거다.

아이가 무언가를 요구하기도 전에, 미리 알아서 모든 걸 완벽하게 준비해주고 갖다 바치는

부모님의 지나친 과잉보호나 그와 유사한 행동들은

결국 아이의 독립적이고 자율적인 사고를 저해하는 결과를 낳게 된다.




아무런 생각이나 고민 없이 내리는 결정이나 즉흥적인 선택이 항상 옳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어떤 일을 결정함에 있어, 지나치게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전전긍긍한다고 해서

그것이 꼭 백 퍼센트 완벽하고 후회 없는 결과를 보장해 주는 것은 아니다.


남들에게 자문을 구하고 내린 결정이든 자기가 직접 한 선택이든, 

어차피 크던 작던 후회나 미련은 남게 마련이고

우리는 그런 과정들과 경험을 통해 더 나은 계획이나 전략을 짜고

잘못된 부분은 다시 수정하고 업그레이드하면 되는 것이다.


혹시 자기 자신이 결정과 선택의 순간이 다가왔을 때 지나치게 고민하고 머뭇거리며 스트레스를 받는 타입이라면 그 근본적인 이유를 잘 들여다보고 살펴봐야 할 것이다.

실제로 인생의 전환점에서 벌어지는 결정장애는 삶을 우왕좌왕하게 만들어 꽤 큰 타격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실패가 두렵거나 성공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경우라면, 의도적으로 빠른 결정을 내리려고 노력하면서

이를 습관화해 보는 것을 추천한다. 어차피 완전무결한 선택과 결과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지나치게 순응하거나 남의 시선을 의식하는 경우, 자기애와 자존감, 자신감 향상이 결정장애 극복에 도움이 된다. 자신이 어떤 것을 원하고 있는지, 내면의 욕구를 살펴보는 것도 필요하다. 원하는 게 뭔지 몰라 결정을 미루는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이다.


지나치게 겁먹거나 고민하면서 결정을 미루지 말고, 일단 과감하게 선택을 해보자.

무엇이든 자신이 직접 결정하고 선택하다 보면 비슷한 경험치들이 축척될 것이고

그런 경험들이 쌓이면 삶이 주도적으로 변하면서 자신감이 생길 것이다.


세상은 참 여러 가지 천차만별의 사람들로 가득 찬 재미있는 동네이다.

어떤 사람들은 너무 독단적으로 모든 걸 혼자 판단하고

독불장군 마냥 어떠한 타협이나 의견 수렴 없이 고집스러운 결정을 내리려고 하는 행동 때문에

주변과의 불화나 마찰이 잦은 반면,

또 어떤 사람들은 저녁 메뉴 하나를 선뜻 고르지 못해서 결정장애에 빠지기도 하니 말이다.


하지만 확실한 건, 내 삶의 주인공이자 결정권자는 바로 나 자신이라는 것이다.

일생일대의 선택의 기로에서 내가 주체적으로 결정을 내렸든

아니면 다른 사람이 골라준 카드를 뽑아 들었든 간에

어차피 모든 책임은 나에게 있으며 그 선택의 결과를 받아들여야 하는 것도 나 자신인 것이다.


개인적으로 '결정장애'라는 표현은 다른 표현으로 순화되거나 바뀌길 바라며

이런 것이 더 이상 하나의 사회현상이나 고민거리가 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이제 당신이 앉아있는 펜스 위에서 내려와 당당하게 어느 쪽으로든 걸어가야 할 시간이다.

Do not sit or lean on the fe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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