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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라토너 거북 맘 Dec 27. 2021

호랑이띠 거북 맘

일상 이야기

"쯧쯧, 계집애가 범띠라니... 그것도 한밤중에 태어난..."

"남자아이로 태어났으면 최소한 장관이라도 됐을 텐데, 아깝네."

"저렇게 직성 강하고 드센걸 보니, 너도 신상이 곤하게 생겼다."

"여자 범띠는 특히나 결혼을 잘해야 돼."

"좌우지간 안 맞는 띠 하고는 절대 결혼하면 안 돼."


말귀를 알아듣기 시작할 무렵부터

아니 어쩌면 내가 말귀를 알아듣지 못하는 아기 때부터 시작됐을지도 모른다.

집안의 어른이나 친척들인 할머니, 고모, 삼촌, 이모들 심지어는 아빠 엄마로부터

귀에 못이 박히도록, 여자 범띠들은 억세고 평탄치 못하다는 이야기를 듣고

세뇌당하며 자라야 했던 '범띠 가스나'의 어린 시절이다.


1974년, 갑인년 호랑이띠 맞다.

아니, 그런데 당최 내가 뭘 잘못한 게 있느냐 말이다.

내가 태어날 해를 골라서 세상에 나온 것도 아니고

특별히 한밤중에 태어나겠다고 작정한 것도 아니거늘

도대체 왜 그 시절 어른들은 하나같이

심지어 동네 목욕탕 주인아줌마까지

혀를 끌끌 차며 범띠 여자아이의 앞날에 대해 훈수를 두고

그토록 오지랖 넓게 걱정들을 하셨던 것일까.


특히, 역시나 범띠셨던 아빠로 인한 마음고생과

힘들고 평탄치 않았던 결혼생활의 직접적인 피해자이자 경험자이신 친정 엄마는

범띠인 큰 딸의 결혼만은 사전에 철저하게 준비하고

잘못된 선택으로 인한 불상사를 미연에 방지해야 한다는

굳은 신념으로 똘똘 뭉쳐있는 분 이셨다.


덕분에 스무 살이 넘으면서부터 간간히 남자 친구들을 사귀게 되거나

결혼 적령기 무렵에, 누군가를 소개받기라도 하면

엄마는 가장 먼저 상대 남자의 띠가 무엇인지 물으셨고

나와 맞는 띠일 경우에는 어김없이 생년 월일 시까지 요구하셨다.


일단, 그 과정까지는 통과해야 무난한 연애를 시작할 수 있었고

그렇지 않았을 경우, 끊임없는 엄마의 잔소리와

악담인지 조언인지 헷갈리는 말들을 들어야만 했다.

"애초에 아닌 건 아닌 거다. 이제 두고 봐라, 내 말대로 되는지 안되는지."

"멀리서 찾을게 무에 있니? 내가 산 증인 아니냐. 엄마를 보고도 그래?"

"범띠가 그런 짝을 만난다고? 택도 없다!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 정리해라!"


애초에 상대남과 인연이 아니어서 헤어지게 된 건지

아니면, 엄마 말대로 범띠와는 맞지 않는 짝이라서 그런 건지 모르겠지만

결과적으로 엄마가 반대했던 만남은

어쨌든 결국에는 그저 그렇게 끝이 나게 되었다.




이제 징글징글했던 2021년도 정말 며칠 남지 않았다.

우연히 내년 달력을 보니

2022년이 임인년 호랑이해라고 한다.

미처 몰랐었다. 내년이 호랑이해라니...

나도 모르게 범띠녀의 해묵은 어린 시절 기억들을 떠올리며 혼자 피식 웃고 말았다.


특히나 내년은 검은 호랑이의 해란다.

4차 산업혁명의 시대가 도래했네 어쩌네 해도

매년 이맘때만 되면, 사주 철학을 잘 보는 집을 수소문하는 사람들이 평소보다 눈에 띄게 늘고

돈 주고 보기가 아까운 사람들은 최소한 무료 토정비결이라도 보려고

인터넷 사이트를 뒤지거나 기웃거리기도 한다.


자녀의 입시, 남편의 사업운이나 직장운, 혼기가 찬 과년한 딸의 결혼운 등

각자의 사연들은 다르지만 하나같이 중요한 기로에 서 있다는 점은 비슷한 듯하다.

그뿐인가.

내년에 특히 좋은 운을 맞는 띠가 무엇인지

조심해야 하고 안 좋다는 삼재가 드는 띠가 무엇인지

뭘 조심하고 가려야 하는지

미리 정보를 수집하고 대비하려는 사람들도 제법 있는 게 사실이다.


요즘 같은 시대에 뭘 그런 것에 집착하고 신경 쓰느냐고

그 돈으로 차라리 고기나 사 먹으라고

나는 그런 거 전혀 신경 안 쓰고,

어쩌다가 사주를 보더라도 그저 가볍게 참고만 한다고 큰소리치는 사람들도

막상 자기 자식이나 남편의 운세가 내년에 아주 대박이라고 하거나

반대로 뭔가 아주 불길하고 안 좋다는 얘기를 들으면

종교의 유무나 종류에 상관없이 초연하기 어렵고

알게 모르게 신경 쓰여하며 찝찝해하는 것이 사람의 심리인 듯하다.


특히나 한. 중. 일, 국은 아직까지도

서양에서는 'Twelve Zodiac signs'라고 불리는 12 지신을 중요시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 아주 오래된 문화나 풍습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미신과도 같은 이런 관습은 동양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서양 사람들도 별자리나 타로점 등에 꽤나 관심 있어하고

중요한 일을 앞두고 Fortune teller라고 불리는 사람들을 찾는 정치인이나 연예인들도 많다.


앞으로도 없어지지 않고 계속될지 모르는 이런 풍습을

혹시 미래에는 AI 로봇이 인간의 fortune teller가 되어

우리의 점괘나 한해의 운세를 점치고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본다.

어쩌면 인간에 대한 AI의 미래 예언은 이미 시작되었을지도 모르고 말이다.




내년 2022년은 검은 호랑이의 해이면서

한국 나이로 49세가 되는 해이다.


여기서 또 발목을 붙잡는 스토리가 있다.

토정비결이나 사주상으로는 내년이 나에게 그리 나쁜 해는 아니라지만

친정 엄마의 단골 멘트 중 하나이자 사람들 사이에서 관용어처럼 쓰이는

'아홉수'에 걸리는 나이인 것이다.


아홉 살부터 시작해서 끝자리가 9로 끝나는 나이를 가리키는 것이니

19, 29, 39, 49, 59, 69...

아홉수에는 특히 건강에 문제가 생기거나

뭔가 좋지 않은 일들이 생길 가능성이 높다고 해서

예전에는 나이 29세나 39세인 처녀 총각들은 결혼식도 다음 해로 미룬다거나

이사나 생일잔치 같은 집안의 대소사도 꺼리는 경향이 있었던 게 사실이다.


아, 진심으로 피곤하다.

이런 식이면 단 한 해도 그냥 넘어가거나

뭔가에 걸리지 않는 해가 있을까.


2022년이 내게는

신경 쓰고 조심해야 할 아홉수에 걸리는 해라는 사실보다

오십이라는 나이가 코 앞에 다가와서 대기 중인

49세가 된다는 끔찍한 현실

충격적이고 서글프며 공포스러운 이 아줌마는

한국에서는 발에 치이고 걸리적거리도록 즐비한

무수히 많은 성형외과나 피부과들이

이 작은 섬에는 단 한 개도 없다는 사실이 그저 개탄스럽고 원망스러울 따름이다.


나도 한국에 있는 또래 아줌마들처럼

정기적으로 피부과 시술도 받으며 튜닝도 하고 싶고

얼굴도 좀 바짝 땅기고 볼에 바람도 빵빵하게 넣고 싶은 소망이 있다 이 말이다.




어린 시절부터 받아온 세뇌교육의 효과는 실로 엄청나다.

해외 살이 20년 차가 다 되어가는 나는 물론이고

35년 차가 넘어가는 남편마저도

아직 토정비결이나 사주 풀이, 궁합 등의 유혹에서

완전히 자유로워지거나 초연해지지는 못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제는 알고 있다.


우리의 결혼 생활을 단단하게 유지해 주는 것이

단지 남편과 나의 궁합이 잘 맞거나(일단 범띠와 개띠의 만남이니 잘 맞는다고는 한다)

사주팔자가 기가 막히게 좋아서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말이다.


그렇다.

우리 부부는 19년 차가 되어가는 결혼 생활 동안

각자의 삼재들과 아홉수들을 거치며 열심히 살아왔다.

또한 앞으로도 수명이 다할 때까지

여러 번의 삼재들과 아홉수들을 거치게 될 것이다.


하지만 이제 우리 부부는...

어차피 시간은 돌고 돌며

인간의 행과 불행도 결국 영원히 머무르지 않고 반복된다는 진리

이제는 어렴풋이 깨닫게 되었다.


좋은 일 뒤에는 안 좋은 일이 벌어질 가능성도 염두에 두고

항상 겸손하며 조심스러운 언행을 유지해야 하고

죽을 듯 힘들고 어려운 일 뒤에는

예상치 못한 행운이나 귀인이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니

늘 노력하고 준비하며 희망을 갖고 살아야 한다는

단순하면서도 중요한 교훈을 조금씩 느끼고 있는 요즘이다.


비록 무겁고 심란하게 느껴지는 나이,

마흔아홉이 코 앞이라는 사실이 

열대지방 작은 섬의 아줌마를 오늘따라 슬프게 하지만

더 이상 삼재아홉수, 토정비결 같은 것들 때문에 마음 쓸 일은 없다.


나 아직은 괜찮다고

마흔아홉이라도 여전히 씩씩하게 잘 달릴 수 있다고

그렇게 스스로를 위로하면서

이제 며칠 후면 찾아 올, 멋지고 용감한 검은 호랑이를 맞이해야겠다.


모두들 2022년엔

용맹스럽고 씩씩한 검은 호랑이 한 마리를 잘 키우는 한 해가 되길 바란다.


블랙 타이거 한 마리 키우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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