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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라토너 거북 맘 Dec 31. 2021

어느 부부의 송년회

일상 이야기

"바빠? 오늘 돼지네 식당에 광어회 들어오는 날이라는데..."

"저녁에 매운탕에 광어회, 어때?"


늘 그렇듯, 한 해가 가기 전 송구영신의 의미도 되새길 겸

일주일 내내 이불 빨래에 발코니의 묵은 때 제거, 세탁기 청소 등

집안 구석구석을 뒤집어엎고 대청소를 하느라

머리는 산발을 하고 땀으로 목욕을 한 채

거지꼴을 하고 있는 와중에 남편의 전화를 받았다.


'아니, 이 양반이... 내 스케줄을 이미 얘기해준 것 같은데...'


해외 살이 20여 년이 넘어가는 동안

주변의 여러 종교 단체나 사적인 모임으로부터의 집요한 회유와 설득은 물론,

그 누가 뭐라 건 간에 일절 동요하지 않고

철저하게 가족 중심, 부부 중심적인 생활을 하고 있는 우리 부부는

특히나 연말에는 일 년 동안 각자 고생하고 열심히 잘 살아낸 것에 대해

서로 치하하고 위로도 하면서 다음 해를 위한 계획도 세우는

부부만의 조촐하고도 의미 있는 송년회1, 2차 두어 번은 치르고

다가오는 새해를 맞이하는 것이 어느새 우리만의 불문율이 된 지 오래이다.


하지만, 마라토너가 된 이후에는

매월 최소한 두어 번 이상씩 러닝 이벤트나 스케줄이 생기는 통에

주말에 남편과의 오붓한 시간을 갖는데 약간의 제약이 생겼다.

러닝 이벤트도 주로 주말에 있고, 남편 역시 평일보다는 주말에 시간을 내기가 용이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우리 부부의 만남에는 항상 음주라는 중요한 행위가 빠질 수 없기에

러닝 스케줄과 겹치지 않게 하는 것이 필수적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번에도 예외 없이

12월 31일과 2022년 1월 1일 사이에 러닝 이벤트 하나가 잡혀있고

연말연시라는 특수성도 있기에

미리 스케줄을 정하고 이미 조율을 마친 상태였던 것이다.


그 스케줄에 따르면, 금요일인 내일 새벽에 러닝을 해야 하는 고로

목요일인 오늘은 아무 약속이 없어야 했는데

한국으로부터 항공으로 싱싱한 광어가 도착했다는 한인 단톡방의 광고를 본 남편이

사시미 킬러인 와이프를 위하는 마음 하나로

모든 사전 계획이나 스케줄은 깡그리 잊은 채

뜬금없는 데이트 신청을 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생각해도 나는 활어회를 너무 좋아한다.

광어, 우럭, 연어, 참치는 물론, 송어회 같은 민물 생선 사시미 등

종류와 태생을 가리지 않고 모든 raw fish를 사랑한다.

아무리 많은 양의 사시미라도 게눈 감추듯 먹어치우는 나 자신을 보며

흡사 호수에서 날생선을 폭풍 흡입하는 거대한 곰 한 마리가 연상될 정도였으니 말이다.

컴 온 베이비~


남편의 전화를 받고 순간,

"아, 나 내일 새벽에 러닝 이벤트 있다고 했잖아."라고 말할 뻔했다.


하지만, 남편이 오랜만에 마누라에게 광어회 먹일 생각에

신이 나서 전화를 했을 그 고마운 마음과 성의를 무시하고 싶지 않았다.

또한 남편과의 달달하고 오붓한 시간을 굳이 거부하고 싶지도 않았다.


일단, 생각해보고 나중에 다시 연락을 주겠다고 한 후 전화를 끊었다.

미리 계획된 일정이나 결정된 사항이 변경되는 걸 좋아하지 않는 성격이지만,

게다가 내일 새벽에 마라톤 스케줄까지 있었지만

과감하고도 미련 없이 남편과의 데이트를 선택했다.


그렇다고 마라톤을 포기한다는 뜻은 아니다.

내일 못하면 새해 1월 1일 새벽에라도

기어코 마라톤 스케줄을 완수할 것이다.

물론, 숙취는 있겠지만 말이다.


약속된 시간에 맞춰 공들여 화장을 하고 한껏 치장을 한 후

허름하지만 푸근한 한국 식당으로 들어섰다.

왠지 그런 식당 분위기에는 다소 어색하고 과한 차림일 수 있겠지만

남편은 내가 잘 차려입은 모습을 보면

심하게 티를 내며 흐뭇해하고 좋아한다 (그렇다, 내 남편은 마누라 팔불출이다).


테이블에는 미리 세팅된 귀한 몸이신 광어회와 매운탕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곳에선 흔하게 널린 냉동이 아닌 싱싱한 참치회를 한국에서는 맛보기 힘들 듯

이 작은 섬에서는 한국의 우럭이나 광어 같은 생선회를 구경하려면

이렇게 어쩌다 항공으로 특별히 공수돼 오지 않는 한 불가능한 일이다.


모든 게 완벽했다.

광어회는 너무나 훌륭했고 감동적이고 황홀한 식감이었다.

깊고 얼큰한 매운탕 국물은 나의 무뎌진 감성마저 자극했다.

주인장의 권유로 추가 주문한

역시 한국에서 갓 도착했다는 싱싱한 굴 한 접시는

남편의 피곤하고 다사다난했던 한 해를 위로해주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하지만 가장 행복하고 흐뭇했던 건

매일 집에서 마주하는 얼굴인데도 마치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은 듯

서로 눈을 마주치고 바라보며 웃고 떠들면서

술잔을 부딪치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다가오는 새해를 함께 계획하고 앞으로 펼쳐질 시간들에 대해

깊이 있는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는 사실이다.


비록, 내일 새벽 마라톤은 물 건너간 듯 하지만(둘이서 소주 세병에 맥주 한 캔씩 했다)

그까짓 게 뭐 대수인가.


내일 저녁은 이제 우리를 떠나는 2021년을 배웅하고

새롭게 시작될 2022년을 마중하는 즐거운 가족 파티를 할 계획이다.

이래 갖고 어느 세월에 마라톤 미션을 완수할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내일은 또 올해의 마지막 날이 아닌가 말이다


결혼 19년 차 부부의 1차 송년회에 이어

내일은 2차 파티 예약이다.

메뉴는 샤부샤부이다.


그 어떤 집단의 선후배, 동료와의 송년회보다

가장 소중하고 중요한 우리 부부의 year-end party이다.


흔히들, 여러 사람들과 얽히고설키는 사회생활이나

개인적이고 사소한 일을 함에 있어

시작보다 마무리가 중요하다고 한다.

시작이 마무리보다 덜 중요하다는 뜻이 아니라

누구나 시작할 때는 의욕과 패기가 넘치지만

시간이 흘러 일의 마지막 순간에 이를 때까지

처음의 그 마인드를 유지하며 깔끔하고 완벽하게

훌륭한 마무리를 하는 것이 결코 쉽지만은 않다는 의미일 것이다.


다소 후회되고 안타까운 부분도 있었던 한 해였지만

비교적 만족스럽고 다행스러우며

깊이 감사하고픈 시간들이었다.

스스로 칭찬해 주고 싶은 일들도 있었고

토닥토닥 위로해 주고픈 순간들도 있었다.


이만하면 훌륭하게 잘한 거야.

충분히 감사하고 만족해도 돼.

내년에도 우리 잘해보자.


오늘 우리 부부의 송년회 결과 보고서이다.

모두에게 올 한 해보다 좀 더 희망적이고 행복한 2022년이 되길 바란다.


감동적인 광어회와 싱싱한 굴이 우리 부부를 위로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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