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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라토너 거북 맘 Jan 17. 2022

피아노 치는 거북이

육아 이야기

'아, 저 녀석... 계속 똑같은 부분에서 틀리고 있네!'

'참자, 참아. 저거라도 하는 게 어디냐.'

'근데 이제, 그만 치면 안 되겠니.'


우리 두 거북이 녀석들은 피아노 치는 거북이들이다.

중간에 1년 넘게 쉰 적도 있었지만 작은 녀석은 3년째 피아노를 배우고 있고

지금은 체르니 30번 정도쯤을 치는 것 같다.


큰 거북이 녀석은 뒤늦게 피아노를 배운 지 2년째에 접어들고 있다.

작은 녀석보다 소근육 발달이 더딘 편이라

가위질이나 그림 그리기 등 손으로 섬세하게 하는 작업이 서툰 녀석인데

그래서 그런지 피아노를 배우는 속도도  많이 더딘 편이다.


하지만, 큰 녀석이 그 서툴고 투박한 손놀림으로 뚱땅거리며

처음으로 제대로 된 곡을 피아노로 치던 날

남편과 나는 마치 유명 피아니스트의 연주라도 들은 것 마냥

벅찬 감동에 감격스러워했던 기억이 새삼 떠오른다.


'조금만 이해해주고 넓은 마음으로 바라봐 주면, 이렇게 천천히라도 해나갈 수 있는 녀석인데...'


문득, 큰 녀석이 예닐곱 살쯤 되었을 때의 씁쓸했던 기억이 되살아난다.

녀석이 발달장애 판정을 받은 지 한 두해 정도 지난 시점이었던 것 같은데

그때 지인의 학원에 한국에서 새로 피아노 선생님이 오셨고

선교활동을 하면서 아이들 피아노도 가르치는 분이라며

인격도 훌륭하고 인자한 품성의 좋은 분 이라면서 지인의 칭찬이 대단했다.


얼마 후 우연한 기회에 지인과 함께

새로 오셨다는 그 피아노 선생님과 식사 자리를 갖게 되었고

이런저런 이야기도 나누며 시간을 보내다 보니

지인이 소개했던 것처럼, 교육관도 훌륭하고 참 좋은 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조심스럽게 큰 녀석 이야기를 꺼내게 되었다.


"선생님, 저희 큰 아이가 지금 일곱 살인데요. 또래들보다 많이 늦는 녀석입니다."

"말귀도 어지간히 알아듣고 어느 정도 표현도 하지만, 아주 잘하지는 못해요."

"피아노를 가르쳐 보고 싶은데, 진도나 이런 거에 상관없이 녀석한테 좀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어서요."

"선생님께 부탁드려 보고 싶은데... 안될까요?"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난감하고 당황스러운 표정을 짓는 그 선생님의 얼굴을 보면서

이미 무슨 말이 나올지 예상을 할 수 있었지만

그래도 조용히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한동안의 어색한 정적이 흐른 후

내 눈치를 슬쩍 보면서 그 선생님이 하는 말을 들은 후

다시는 그 누구에게도 큰 녀석의 피아노 교습을 부탁하지 말자고 다짐하게 되었다.


"아, 어머님 마음은 잘 알겠는데요."

"피아노라는 게 어느 정도 의사소통이 돼야 배움이 가능한 거라서요.'

"웬만큼 말귀도 알아듣고 자기표현이 돼야 가르치는 사람도 그렇고

배우는 사람도 발전이 있는 건데 언어에 문제가 있다면 좀..."


빈 말이라도

"일단, 아이를 한번 보고 같이 시간을 보낸 후에 결정하면 어떨까요?"

라는 대답을 기대했던 나를 자책할 수밖에 없었다.

아이를 보지도 않고

그저 뭔가 평범하지 않은 아이 같으니

당연히 골치 아프고 쉽지 않겠다고 판단한 그 선생님은

아예 그런 학생은 받고 싶지가 않았던 것이었다.


'그래 뭐, 피아노 전공을 시킬 것도 아니고... 됐다 됐어.'

'다시는 이런 아쉬운 부탁 안 하고 만다!'


그 이후, 수영이나 테니스, 골프 등의 운동 쪽으로 방향을 전환해서 이것저것 가르쳐 보기도 했지만

역시나 굼뜨고 균형 감각이 좀 모자라는 녀석은, 뭘 해도 폼이 안 나고 어설퍼서

가르치는 코치들은 답답해했

함께 배우는 아이들 또한 은근히 큰 녀석을 무시하는 것이

어쩔 수 없이 느껴지고 눈에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녀석보다 한참 어리고 늦게 들어온 신입 멤버라도

한 달만 지나면 큰 녀석을 앞지르는 실력으로 일취월장하는데 비해

늘 그 상태 그대로, 전혀 실력이 나아지지 않는 녀석이

아이들 눈에 얼마나 한심하고 우스워 보였을 것인가 말이다.

괜찮아! 운동은 그냥 즐기면 되는거야!




뭐든지 늦게 받아들이고 시간이 걸리는 녀석들...

특히나 큰 거북이 녀석에게는 부모와 선생님의

좀 더 많은 인내심과 기다림이 필요하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둘째가라면 서럽게 성질 급하고 버럭 하는 에미의 자식으로 태어났으니...


느려도, 천천히 가도

큰 녀석 본인은 전혀 급할 게 없고 괜찮은데

순전히 주변의 분위기나 엄마의 재촉과 성화, 다그침 때문에

어떻게든 조금이라도 다른 아이들을 따라가 보려고

눈치 보며 애쓰고 노력하는 큰 녀석의 모습이

안쓰럽고 짠하다 못해 미안하기까지 하다.


사실, 가슴이 많이 쓰리고 아프다.

'조금만 여유롭고 넉넉한 마음을 가진 엄마를 만났더라면

녀석의 유년 시절이  좀 더 행복하고 편하지 않았을까.'

열정과 욕심이 앞서서 녀석을 강하게 몰아붙이기만 했던

지난 일들이 가끔씩 나를 후회스럽게 할 때가 있다.


지나간 시간들이 안타깝고 후회스럽지만 다시 돌아갈 수는 없는 일.

녀석이 고등학생이 되고 나보다 덩치가 더 커지고 난 후에야

이제야 비로소 거북이 엄마의 올바른 역할을 인식하고 받아들인 못나고 답답한 에미.


왜 이렇게 오래 걸렸을까.

왜 그토록 힘들었을까.

왜 그리도 많은 상처를 녀석에게 주었을까.

왜 그렇게 마음의 여유를 갖지 못했을까.


늦은 것 같지만 노력 중이고, 그래서 예전보다 훨씬 행복하고 편해진 요즘이다.


모든 문제는 거북이 녀석들에게 있었던 것이 아니라 나 자신에게 있었던 것인데

아이들에게 문제가 있다고 여기며

괴로워하고 원망하면서 마음의 문을 닫고 여유로움과는 담을 쌓고 살았다.


녀석들은 그냥 그 자체로 내 새끼들인 것을...

잘못되거나 이상한 게 아니라 그냥 다를 뿐인 것을...

녀석들을 위해 최선을 다한다는 명분 아래

내가 녀석들을 위해 희생하고 있다는 착각 속에서 살며

스스로를 괴롭게 만들었던 지난날들...


참 오래 걸렸다.

마음이 편해지는데 까지.

건강하고 밝은 거북이들이 내 곁에 있음에 감사하는데 까지.

모든 상황을 스스로 받아들이고 인정하는데 까지...


그래서 나는 오늘도 참는다.

아니, 즐긴다.


작은 녀석이 30분째 특유의 짜증과 성질을 부리며

피아노 건반에게 화풀이하고 지롤하는 것을 보고도...

큰 녀석이 벌써 스무 번도 넘게 같은 부분에서 계속 틀리며

맨 정신으로는 듣기 힘든 연주를 하고 있을 때도...


일부러 더 열심히 구석구석 집안 청소를 하고

사랑스러운 냥이들을 쓰다듬고 대화를 시도하면서

마음의 평화를 찾고 신경을 분산시킨다.


피아노 앞에 앉아있는 녀석들이 기특하게 보일 때쯤

어느새 거북이들의 연주는 끝나 있다.


"벌써 끝났어? 잘했네! 그렇게 계속 가는 거야!"


이 자리를 빌어서

우리 두 거북이 녀석들을 2년째 푸근한 사랑으로 가르치시는

피아노 선생님께 깊은 감사를 드리고 싶다.

세상 급할 것 없이 여유로운 성격의 소유자인 피아노 선생님은

우리 거북이들과 참으로 잘 맞는 사제 지간이 아닌가 말이다.


오늘도 우리 피아노 치는 거북이들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곡을 연주하고 있다.

남편과 나는 흐뭇한 표정으로 거북이들의 연주를 바라보며

감사함과 행복함으로 하루를 마무리한다.


"녀석들아, 그래도 이왕 하는 거 좀 열심히 해보자, 응?"

세상 진지한 피아노 치는 거북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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