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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라토너 거북 맘 Jan 21. 2022

손님, 어디로 모실까요?

육아 이야기

"손님, 오늘은 어디로 모실까요?"

"일단 공항 한 바퀴 돌고, 사이판 섬 북단으로 모시겠습니다."


혹자들은 거북 맘이 부업으로 택시 운전을 하나 싶겠지만

이래 봬도 우리 거북이들의 전속 운전기사로 무사고 10년 경력을 자랑하는

다소 와일드 하지만 베테랑급 운전 실력의 소유자이다.


매주 금요일 오후가 되면 베테랑 운전기사의 마음은 바빠진다.

'오늘은 이 녀석들이 어디로 가자고 할까'


시계를 보며 서둘러 녀석들이 좋아하는 간식거리와 음료수를 차에 싣고 학교로 향한다.

금요일 오후가 다가오면  학교뿐 아니라 섬 전체의 분위기가

왠지 모르게 자유롭고 들떠있는 듯하다.

오매불망 기다리던 주말을 만끽하고

불금을 즐기려는 사람들의 마음은 세계 어디나 비슷한 것 같다.


물론, 주말에도 열심히 근무하고 영업을 하는 사람들도 많긴 하지만

특히나 이 작은 섬의 학교들은 금요일 오후가 되면

학생과 선생님들 모두 무장해제라도 된 듯

자유로운 분위기와 여유로운 미소가 학교 교정의 이곳저곳에 가득 차서 넘실거린다.


다음 주에 시험이 있거나 말거나

주말 내내 머리를 싸매고 끝내야 할 프로젝트와 숙제가 산더미이거나 말거나

우리 거북이 녀석들은 금요일이 되면 그저 무조건 행복하고 기쁘다.


그런 녀석들을 보고, 남편은 무척이나 부러운 표정을 지으며 말한다.

"세상천지에 저런 팔자 좋은 고등학생들이 어딨냐."

"너희들은 정말 전생에 나라를 구했나 보다. 진짜 부럽다 부러워."

사실, 나도 녀석들이 무지하게 부럽다.


금요일 오후에는 특별한 일이 없으면

녀석들이 일주일 동안 학교 생활을 무탈하게 잘 해내고

열심히 학교 다니시느라 수고가 많았으니

그 노고를 치하하고 위로하는 차원에서

방과 후에 섬을 드라이브하며 힐링하는 시간을 가져왔다.

녀석들의 초등학생 시절부터 이어져온 금요일 오후의 섬 드라이브

나름대로 제법 역사와 전통이 있는 우리만의 행사인 것이다.


이건 뭔가 바뀌어도 한참 바뀐 것 같은 상황이지만...

아빠 엄마를 위해서 학교를 다녀주는 것도 아니고...

하지만 뭐 그까짓 게 대수인가.

녀석들이 즐겁고 행복하면 그만이니 말이다.


얼굴 가득 환한 미소를 담고 내 차를 기다리던 녀석들은

거의 매주 반복되는 행사인데도 기대와 설렘으로 깔깔거리며 잽싸게 차에 오른다.

"얘들아, 오늘은 어디로 갈까?"


잠시 고민하던 녀석들이 차 뒷자리에서 내 뒤통수에 대고 행선지를 이야기한다.

"Uh... can we go to the airport first?"

"And then, we want to go to Mt. Tapochau!"


"얘들아, 타포차우 산 대신에 오늘은 다른데 가자."

"엄마, 오늘 세차했다."


비포장길에 먼지 투성이인 타포차우 산을 갔다 오면

오늘 세차장에 맡겨서 반짝반짝 꽃단장한 내 차에 대한 예의가 아니므로

녀석들과의 협상 끝에 행선지를 바꾸기로 한다.


미리 준비한 간식과 음료를 녀석들이 먹기 좋게 뒷자리에 준비해 주고

드디어 금요일 오후의 드라이브, 출발이다!




사실, 이 작은 섬 구석은

어디로 모시고 말고 할 것도 없이

드라이브할만한 코스가 이미 정해져 있다.


섬 한 바퀴 일주를 해도  시간이 채 걸리지 않는 사이즈이니

얼마나 아담하고 작은 섬인지 상상이 갈 것이다.


때문에, 이곳에서 모임이나 약속에 늦었을 때

핑계랍시고 차가 막혔네, 밀렸네... 이런 소리를 하면

한마디로 씨알도 먹히지 않는 분위기인 것이다.


나처럼 혼자 놀기 좋아하고

복잡하고 번화한 대도시보다 조용하고 호젓한 분위기를 선호하는 성향의 아줌마도

아주 가끔은 이곳이 참 좁다 싶게 느껴지는데...

한국에서 이곳으로 갓 시집을 온 새댁이나

파견 근무를 나온 아가씨들의 대부분은

초반에 심한 우울증이나 향수병에 시달리기도 한다.


수십 년 전, 정말 초창기에 이민 오신 분들의 얘기를 들으면 더 짠하다.

그때는 지금보다 훨씬 더 낙후되고 덜 개발되었던 시절.

여기저기 사방팔방 아무리 둘러봐도 온통 시퍼런 바다뿐.

제대로 된 쇼핑몰이나 백화점도 없고

잠깐 바람이라도 쐬러 밖에 나가면

온몸이 타들어가는 듯한 강렬한 태양의 위세에 얼른 집으로 들어가기 바빴다고 한다.


그러다 어느 순간, 한국에 있는 친구와 가족들의 얼굴이 떠오르고

화려하고 북적대는 도시의 자유로움이 그리워질 때쯤

갑자기 가슴이 답답해져 오면서

마치 이 작은 섬에 유배되어 갇혀있는 듯한 느낌에 호흡이 가빠진단다.

영화 '빠삐용'의 현실판이라고나 할까.


그때가 되면, 무조건 차를 몰고 공항으로 향했단다.

공항 주차장에 하염없이 차를 세워두고

뜨고 내리는 비행기들을 보며 눈물을 훔치다가

다시 쓸쓸하게 차를 돌려 집으로 오곤 했다는 이야기는

들을 때마다 애잔하고 가엾게 느껴진다.


그와는 다른 차원이지만

우리 거북이들도 공항에 가는 걸 좋아한다.

팬데믹 덕분에 본의 아니게, 벌써 2년 넘게 섬 구석에 갇혀있다 보니

녀석들은 공항 건물이라도 보며 위안을 삼고 대리만족을 하고 싶은 것이다.


깨끗하고 아름다운 자연환경 외에는

아이들이 체험하고 즐길거리가 많이 부족한 이곳 특성 때문에

이곳 사람들은 1년에 한두 번은 꼭 아이들을 데리고

한국이나 미국 등 다른 나라로 여행을 가서 새로운 것도 경험하게 하고

섬 구석의 촌닭들에게 넓은 세상의 콧바람을 넣어주곤 했다.


하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다 보니

녀석들은 공항을 바라보는 것만으로 만족하고 있는 요즘인 것이다.

'조금만 기다려라 얘들아, 드디어 올해 5월에는 비행기를 탄다!'

차 창밖으로 보이는 조용하고 한적한 사이판 국제공항




다음 행선지는 사이판 북단에 위치한 Suicide cliffBird Island이다.

예전에는 아이들과 하이킹하러 오기도 했었고

요즘은 혼자서 새벽에 언덕 달리기 훈련을 하며

마라토너로서 다리 근력과 기초체력을 다지러 종종 오기도 하는 곳이다.


올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비극적인 역사와 거기에 얽힌 비참한 이야기들과는 상반되게

참 아름답고 평화로운 곳이다.


거북이 녀석들도 이곳을 드라이브할 때면

조용히 창밖을 바라보고 즐기며 힐링하는 것 같다.


꼭대기 지점에 도착하면 잠시 차에서 내려

신선하고 시원한 바다 바람도 쏘이고

언덕 아래로 펼쳐진 시내의 풍경과

멀리 보이는 천연 방파제와 에메랄드 빛 바다도 감상하는 시간을 갖는다.

세상 다정해 보이는 거북 자매들


어느새 시간은 오후 다섯 시가 다 돼 가고

금요일 오후의 드라이브를 마무리해야 할 시간이 다가온다.

'엄마는 빨리 집에 가서 저녁밥 해야 된다, 이 녀석들아.'


드라이브하는 동안, 좋아하는 음악을 서로 골라 들으며

뒷자리에서 간식도 먹고 힐링 타임을 가진 녀석들은

제법 만족스럽고 기분 좋은 표정을 지어 보인다.


'오늘 세차했는데... 뒷자리에 과자 부스러기... 하아, 저 녀석들...'

청소 따위는 결벽증 엄마의 몫이다.


비록, 다양하게 즐길거리도 없고

여기저기 돌아다닐 곳도 없는 작은 섬의 거북이들이지만

녀석들이 평생 엄마와의 금요일 방과 후 드라이브를 기억해 줬으면 한다.

대단할 것도 없고 자랑할만한 이벤트도 없지만

우리의 추억과 세월들이 깃든 작고 소박한 여행이

녀석들의 마음에 행복하고 소중한 기억으로 남길 바란다.


벌써 금요일이다.

오늘도 베테랑 운전기사 거북 맘은 간식을 준비하며

거북이들의 하교 시간을 기다린다.

'녀석들이 오늘은 어디로 가자고 할까?'

뻔한 행선지인 줄 알면서도 은근히 기대를 해본다.


엄마 차는 물 넣고 가는 줄 아는지

좀 더 오랫동안 멀리 드라이브를 즐기고 싶어 하는 녀석들을 위해

오늘은 특별히 섬 구석구석을 돌아볼까 싶다.

행복한 금요일이다.

거북이들에도 거북 맘에게도...


'우리, 행복하자!'

새들의 천국, 새 섬에서 거북 자매의 한 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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