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마라토너 거북 맘 Jan 26. 2022

함께 달리는 거북 맘

운동 / 러닝 이야기

러닝이라는 순수한 목적으로 모인

다양한 나이대와 국적을 가진 사람들과 어울려

함께 땀 흘리고 달리면서 응원하며 손뼉 쳐 주는 분위기가

얼마나 사람을 밝고 긍정적으로 변화시키고

행복과 기쁨을 느끼게 해 주는지

예전에는 미처 몰랐었고, 알려고 하지도 않았었다.


종교를 갖고 있지 않은 탓에

교회나 성당 등 특정 종교 단체나 그룹에 속할 일도 없었고...

솔직히 말하면, 이 작은 섬에서의 20년 가까운 생활 동안

이 섬의 주류도 아닌, 극히 일부분에 불과한 한인 교회나 성당 내부에서

신도들끼리 편이 갈리고 분열되어 서로 헐뜯고 등 돌리는 모습들을 보면서

참으로 씁쓸한 마음이 들었고 적지 않은 실망감을 느끼며

어떠한 종교나 집요한 전도에도 마음이 기울지 않고

오랜 세월 동안 무소속을 지켜왔던 내 신념이

역시 옳았다는 확신이 더 강해질 뿐이었다.


종교뿐만 아니라

사이판에서는 대중적인 스포츠로 통하는 골프도 크게 다르지 않음을 느꼈다.

유독 한인 골프 모임이 그런 성향이 강한 건지 어쩐 건지는 잘 모르겠으나

순수하게 골프를 즐기면서 오로지 운동만이 주된 목적이 되기보다는

멋들어지고 화려한 골프 웨어 자랑, 내기 골프, 뒤풀이를 위한 술자리 등

듣기만 해도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손사래를 치게 되는

내 취향과 전혀 맞지 않는 다른 나라 이야기 같은 그런 분위기가

골프 자체에 대한 회의와 거부감을 느끼게 만들어 버렸기 때문이다.


이타적이고 인류애가 넘치는 성격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남에게 피해를 주면서까지 내 것을 챙길 정도로 이기적이진 않은 편인데

스스로 평가하자면, 남에게 폐를 끼치는 것도 싫고 도움받는 것도 불편한

전형적인 개인주의 성향이 강한 유형인 것 같다.


아무리 오랫동안 알고 지내는 사람이라도

상대방이 먼저 자기 자신에 대한 사적인 얘기를 털어놓지 않는 이상

그 사람의 개인적인 사연들이나 신상이 전혀 궁금하지 않으며

상대방이 없는 자리에서 다른 사람들로부터 그 사람에 대한 험담을 듣는 걸 질색한다.

요즘 애들 말로, 안물 안궁 스타일이라고나 할까.


그와 더불어, 아무리 작고 사소한 것이라도

내 개인적인 이야기들이 남의 입에 오르내리는걸

극도로 혐오하고 끔찍해하는 타입이다.


좀 지나치다 싶을 만큼 그런 성향이 강하다 보니

해외생활 20년 차임에도 불구하고

내 또래 한국 아줌마들과의 유대 관계가 그다지 좋은 편은 아니다.

하지만 그들과 스스로 거리를 두고 함께 하는 기회들을 차단하면서

생각지도 않았던 긍정적인 효과가 따라왔다.


바로, 마음의 평화와 정신적인 안정을 유지할 수 있다는 점이다.

세상 마음 편하고 정신건강에 이렇게나 좋을지 몰랐다.


식당이나 카페에 들어섰을 때

종종 무리 지어 수다를 떨고 있는 그들과 마주치면

안면이 있거나 약간 친한 정도의 사람들과는 가벼운 눈인사를 할 때도 있지만

대부분은 그냥 자연스럽게 무시하고 내 볼일을 보는 편이다.


그도 그럴 것이, 참 희한하게도 연령대와 상관없이

늙으나 젊으나...

왜 그렇게 드나드는 사람들을 아래 위로 스캔하면서 관찰하는 건지...

차라리 인사를 할 거면 반갑게 인사를 하고

모른 척할 거면 나처럼 아예 시선을 주지를 말지...

사람을 빤히 구경하듯 쳐다보며

그 사람이 나가고 나면 어김없이 할 일 없는 여편네들의 뒷담화가 시작된다.


"저... 저 여자, 그 사람 맞죠?"

"왜, 남편이 옛날에 시내에서 식당 크게 하던..."

"둘이 사네 마네 하더니, 결국 헤어지고 저 여자 혼자 애들 키우면서 살지 아마?"

"그러게, 요새는 뭐한데? 저이도 지금 나이가 꽤 됐을걸?"


아줌마들아, 제발 남의 얘기 좀 그만합시다.

좀 더 영양가 있고 생산적인 이야기도 얼마든지 많답니다.


해외에서의 한인 이민 사회는 아무래도 고만고만하고 협소할 수밖에 없는데

이 동네는 그중에서도 더 좁아터진 작은 섬 구석이니

할 일들이 없어서 그런가... 다들 참 남의 일에 관심들이 많다.




그렇게 오랜 세월 동안 고집스러운 철벽방어와 자발적인 왕따 생활을 하던 내가

러닝 동호회에 가입하고 게다가 열심히 활동하는 열혈 회원이 됐다.


나도 한국인이면서 이러는 내가 참 맘에 안 들고 아이러니하지만

만약 우리 러닝 클럽에 한국 아줌마 회원들이 많았더라면

아마 선뜻 가입할 생각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현재까지, 한국인 여성 회원은 오직 나 하나뿐인 러닝 클럽에서

편한 마음으로 즐겁게 여러 사람들과 맘껏 달리고 웃으면서

행사가 있는 토요일 아침마다

새삼스레 사는 맛과 행복을 느끼고 있다.


걷거나 골프 치는 코리안 레이디는 봤어도

너처럼 달리는 여자는 못 봤다면서

내가 일본 여자인 줄 알았다는 우리 러닝 크루들.


"난 최소한, 나이 칠십 까지는 뛸 건데?"

"우리 그때까지 계속 함께 가는 거다?"

벌써 이만큼이나 그들과 가까워져 버렸다.


지난 토요일은 사이판 러닝 동호회 Run Saipan의 올해 첫 행사가 열렸다.

이벤트 타이틀은 Dash and Splash, 장소는 Lao Lao Bay였다.


관광객들은 잘 모르는...

사실, 이곳에서 20년 가까이 살아온 나도

그렇게 깊숙한 곳 까지는 들어갈 일이 없는 숨은 장소...

주로 다이빙을 즐기는 사람들이나

이곳 원주민들이 비치 바비큐나 야외 피크닉을 즐기러 오는 곳이다.


당연히 울퉁불퉁 비포장 길에

나무들이 서로 어깨를 비비며 뒤엉켜 있는

아주 깊숙하고 은밀하게 숨어있는 곳.

하지만 눈물 나게 환상적인 바다와 아름다운 자연이

힘든 길을 찾아온 나그네와 방문객에게

살며시 문을 열고 웃으며 황홀함과 감동을 선물해 주는 곳.


Saipan의 Lao Lao Bay이다.


울퉁불퉁 험한 산길이나 경사진 해변길을 뛰는

트레일 러닝을 할 거라고는 생각지 못하고 참여한 이벤트였다.


근데 참, 생각보다 코스가 험난했다.

크고 작은 돌멩이와 바위들, 여기저기 빗물이 잔뜩 고인 웅덩이들

숨이 턱에 차 오르도록 가파른 오르막과

신경 쓰지 않으면 부상 위험이 있는 심한 내리막길.

양옆으로 늘어져 있는 덩굴과 나뭇가지들.


이런 난이도의 트레일 러닝은 처음이어서

비록 5킬로미터의 짧은 거리였지만

체감 거리는 거의 10킬로로 느껴질 만큼 힘들었다.


하지만, 우리 Run Saipan 멤버들의 거친 숨소리를 들으면서

함께 호흡하며 뛰었던 그 코스는

전혀 외롭거나 짜증스럽지 않았고

뭔가 끈끈하고 단단한 동지애를 느끼게 했다.


새벽 댓바람부터 깜깜하고 험한 길을 헤치며 차를 몰고

그 깊숙한 곳까지 찾아온 참가자들.

진정으로 러닝에 미친 사람들이 아니고서는

그 시간에 이곳까지 오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아빠 엄마를 따라온 어린 참가자들의 열정도 정말 놀라웠다.

우리 거북이들은 한참 꿈나라에 있을 시간에...


"You are crazy!"

A runner's favorite compliment!


당신이 러닝에 빠져있다면, 이 말에 공감하리라.

"당신, 미쳤군"이라는 말이 러너에게 가장 큰 찬사이자 칭찬이라는...


서른 명의 참가자들 중 일곱 번째로 피니쉬 라인에 들어오게 된,

나름대로 만족할만한 성적을 거둔 것도 또 하나의 기쁨이었다.


타고난 체력이 강골도 아니고

스피드를 내야 하는 러닝은 아직도 헉헉대며

심한 무지외반증에 평발에 가까운...

그다지 훌륭한 신체 조건을 가진 러너는 아니지만

그래도 죽기 살기로 주야장천 뛰어다니다 보니

요즘 들어 조금씩 체력이 늘고 강해지면서 빨라지는 걸 느낀다.


해외 생활 19년 만에

드디어 꼭꼭 숨어있던 등껍질 속에서 고개를 내밀고 밖으로 나와

사람들과 어울리고 함께 하는 기쁨을 만끽하는 거북 맘.

요즘, 새로운 삶을 사는 기분과 재미가 제법 쏠쏠하다.


오랫동안 오로지 혼자서 해변을 달리고 새벽 러닝을 해 오던 시간들...

물론, 혼자만의 러닝도 나에게는 없어선 안 될 소중한 시간이지만

여럿이 함께 달리는 행복이 이렇게 클 거라고는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


예전보다 더 밝고 씩씩해진 나 자신을 느끼는 요즘.

이런 변화를 가장 먼저 느낀 사람은

나 자신이나 남편이 아니라, 바로 두 거북이들이었다.


엄마의 건강한 몸과 밝고 긍정적인 정신상태가

거북이들을 웃게 만들고 자신감 넘치게 할 수 있다는 믿음이 생겼다.

엄마의 기운찬 에너지와 적극적인 마인드가

거북이들을 변화시키고 성장하게 할 수 있다는 걸 직접 체험하고 있다.


언젠가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이런저런 치료실을 하루에도 몇 개씩 순회하는

한국에 사는 발달 장애아와 그 엄마의 이야기인데

아이가 치료받고 교육받는 것과 더불어

이미 심신이 지칠 대로 지친 엄마 역시

상담과 위로와 치료가 필요하다고...


당연할지도 모르지만

거북이들을 키우는 거북 맘이나 아빠들은

이미 중증에 가까운 우울증이나 화병, 소화불량, 불면증 등의

스트레스성 만성질환들을 가지고 있는 게 일반적인데

대부분, 우울증 약을 먹고 상담 치료를 받는 것으로

지치고 힘든 몸과 마음을 달래고 있는 형편이다.


하지만, 여기가 어딘가.

한국처럼 시설 좋고 스펙 훌륭한 치료사들이 있는 각종 치료실은

언감생심 꿈도 꿀 수 없고

지치고 힘들 때 우울증 상담 치료나 약 처방을 받을 수 있는

신경 정신과나 전문의는 애초에 이곳과는 어울리지도 않는

사방이 바다로 둘러싸인 작고 열악한 남태평양의 작은 섬이 아니던가.


한때, 아이들을 위해 한국이나 미국으로의 이주를

심각하게 고려하기도 하고 몸이 달고 애가 탄 적도 있었다.


너무 힘들고 마음이 지옥 같아서

누군가에게 털어놓고 하소연이라도 하고 싶지만

한편으로는 내 상황을 오픈하고 보여주기 싫은 이중적인 마음 때문에

그저 밤이면 소주잔을 기울이며 혼자서 신세한탄을 하던 밤들이 허다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수심 가득한 표정이 들어찬 그늘져버린 얼굴에

수시로 땅이 꺼질듯한 한숨만 내쉬며

가슴팍 한가운데 무거운 돌을 얹은 듯 답답하고 숨 막히던 시절이 바로 엊그제였다.


그러던 내가 어느 순간 밝아졌다.

어지간해서는 잘 웃지 않던 내가 자주 웃게 됐다.

거북이들이 속상하게 하고 답답하게 굴어도

예전처럼 죽을 만큼 힘들게 느껴지지도 않고

절망적이거나 부아가 치밀어 오르지도 않는다.


이상한 일이다.

그 사이에 거북이들에게 기적적이고 드라마틱하게

큰 변화가 생기거나 괄목할만한 성장이 있었던 것도 아닌데

무엇이 나를 이렇게 변하게 만들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그들과 함께 달리면서부터 달라지기 시작한 것 같다.


유명한 신경 정신과 전문의나 효과 좋은 우울증 약은 기대할 수 없지만

결국 스스로 이 굴레를 벗어나

살기 위해 변해 보겠다는 자력갱생의 강한 의지로

필사적이고 적극적으로 돌파구를 찾는 노력을 기울인 끝에

마침내 지금 내가 처한 상황이나 현실에서 가장 최선의 해결책인

그들과 함께 달리는 길을 선택하게 된 것이다.




이번 행사의 타이틀이 Dash and Splash 였던 탓에

험한 산길을 마구 달린 후에는

다이빙 포인트에서 자유롭게 바다와 한 몸이 된 참가자들이 제법 있었다.


비록, 나는 그들처럼 바다에 뛰어들진 못했지만

세상의 모든 스트레스와 억압에서 자유로운 듯 보이는

그들의 멋진 다이빙을 보면서

나도 모르게 큰 소리로 웃으며 박수를 치고 있었다.


조금 부족하고 모자라면 어떤가.

충분히 행복할 수 있는 다른 방법들이 이미 내 주위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태 손이 닿지 않는 먼 곳에서 찾으려고만 했었다.


애초부터 치료실이나 대학 병원의 정밀검사와는 거리가 멀었던 우리 거북이들도

우리만의 소박하지만 자유롭고 단단한 방법으로

조금씩 조금씩, 느리지만 꾸준히 발전해 오고 있지 않은가.


이제, 예전과는 달라진 거북 맘의 긍정적이고 에너지 넘치는 기운으로

거북이들과의 세컨드 라운드에 돌입하려고 한다.

지난 10년 간이 초보 거북 맘으로서 좌충우돌하며

거북이들을 강하고 엄하게 몰아붙였던 시절이었다면

지금부터는 사춘기 거북이들과 함께

새로운 도전을 재미나게 시작해 볼 생각이다.


예전에 비해 훨씬 여유로워지고 그간의 내공이 차곡차곡 쌓인 지금.

우선은 거북이 녀석들의 성공적인 고등학교 생활 마무리에 집중하고

그다음은 대학생이 될 거북이들을 위한

새로운 도전과 다양한 에피소드들이 펼쳐질 날을 손꼽아 기대해 보는 거북 맘이다.


물론 계속 그들과 함께 달리면서 말이다.

작가의 이전글 손님, 어디로 모실까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