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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라토너 거북 맘 Feb 26. 2023

엄니의 변신은 무죄

일상 이야기

"사진에서 이상한 부분을 찾으시오."

한국에 사는 두 살 터울의 여동생으로부터 뜬금없는 카톡이 들어왔다.

오늘따라 뭔가 낯설어 보이는 친정 엄니의 사진과 함께...


사진 속에는 일부러 우스꽝스럽게 보이려고 작정이라도 한 듯

금방이라도 피가 뚝뚝 떨어질 것만 같은 새빨간 입술에

숯검댕이 눈썹의 대명사인 부담스러운 짱구 눈썹을 하고

어색하지만 해맑게 웃고 계신 1945년생 광복둥이 김여사가 있었다.


"뭐냐 이건..."

"엄마, 이번엔 도대체 얼굴에 무슨 짓을 하신 거라니?"


수년 전에 야매로 하셨던 짝짝이 눈썹을 레이저로 지우고

이번 기회에 다시 새로 하실 거라는 얘기는 들었지만

도대체 저 입술은 뭐란 말인가.

어느 순간 갑자기 입술 위에 물집처럼 자리 잡은 작은 혹 때문에

평소에 늘 스트레스받고 신경 쓰여하시더니만

김여사는 기어이 빨간색으로 입술 문신까지 하셨던 것이었다.


며칠 지나면 과한 빨간색도 조금 빠지고 자연스러워질 거라지만

사진을 처음 본 나에겐

마치 내가 평소에 알고 있던 우리 엄마가 아닌

전혀 다른 사람을 보는 것처럼 어색하고 당황스러웠다.


그러다가 스멀스멀 화가 치밀어 오르기 시작했다.

지금도 여전히 연세에 비해 고운 편인 김여사지만

젊은 시절엔 뭇 아줌마들의 시기와 질투 어린 시선을 받기도 했던

그래서 어린 내가 무척이나 자랑스러워했던

김여사의 남다른 미모와 독보적인 분위기가 깡그리 사라진 것 같아서

갑자기 속이 상했던 것일까.

괜스레 카톡을 보낸 애먼 동생한테 짜증을 내며 냉소적인 독설을 쏟아냈다.


"엄마는 정말 저게 예쁘다고 생각하신대? 맘에 드신대?"

"얼굴이 도화지야 뭐야?" 차라리 어디 가서 제대로 성형을 하시던가."

"얼굴이 저게 뭐냐고!"

"아니, 엄마는 나이 드셔서 당최 왜 저러신대?"


나이 오십이 되면서 그나마 옛날보다 조금 수그러든 게 있다면

예전에는 화가 치밀어 오르거나 답답한 상황을 맞닥뜨리면

바로 그 자리에서 가감 없이 생각나는 대로

필터링을 거치지 않은 날것 그대로의 비수 같은 말들을 쏟아내곤 했었는데

요즘은 일부러 즉각 대응을 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면서

의식적으로 다른 일을 하거나 시간을 끌면서 생각과 시선을 분산시킨다.

그러다 보니 아무래도 갈등을 겪거나 큰 소리가 나는 상황을 줄일 수 있게 되었고

그로 인해 가족 간에 예전보다 좀 더 조용하고 평화로운 관계유지를 할 수 있는 긍정적인 결과를 얻게 되었다.


속상한 마음대로 했으려면

당장 엄니에게 전화를 걸거나 카톡으로라도

적당히 좀 하시라고, 얼굴이 그게 뭐냐고 방방 뛰며 한바탕 잔소리를 쏟아부었을 테지만

엄니에게 연락을 하지 않는 대신 동생에게 지롤하는 걸로 마무리하고 말았다.




"어디 어머님 사진 좀 봐봐, 예쁘시기만 하네."

"내가 당신이라면 그냥 어머님이 뭘 하시든 잘하셨다, 예쁘시다고 해드릴 것 같아."

"어머님 이제 팔순이셔. 그 연세에 뭘 굳이 남의 눈치, 자식 눈치 보면서 사셔야 해?"

"하고 싶은 거 하시게 하고, 얘기 들어드리고 잘하셨다고 칭찬해 드리는 게 우리가 할 일이야."

"내가 어머님한테 전화 한 통 드려야겠구먼."


속상한 마음 때문인지 얼굴이 어두워져 있는 나를 보던 남편이 자초지종을 듣더니

내 마음에 작은 파문을 던지는 한 마디를 하고는 친정 엄니와 통화를 한다.

"아우~어머님! 그 사람 실력 있게 잘하네. 문신 아주 잘 나왔어요!"

"예전보다 훨씬 생기 있고 좋아 보이시네~"


남편의 칭찬이 흡족하셨는지 김여사는 묻지도 않은 이야기들까지 신나게 하신다.

그 원장한테 시술을 받으려면 얼마나 오랫동안 대기를 해야 하는지,

예약 잡기도 하늘에 별 따기일 만큼 우리나라 최고의 실력자라며

목소리 톤을 높여가며 설명하느라 여념이 없으시다.


남편이라는 존재 없이 살아오신 지 어느덧 30년이 넘은 우리 김여사.

세월이, 고단했던 삶이, 가슴속에 응어리진 수많은 사연들이

곱고 예뻤던 김여사의 얼굴에 그 흔적들을 남겼지만

내겐 아직도, 어쩌면 김여사를 더 이상 볼 수 없게 될 미래에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예쁜 여인은 우리 김여사이다.


이제 곧 팔순이 될 우리 김여사.

혹자들은 이렇게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 나이에 시집을 다시 가서 팔자를 고칠 것도 아니고

미인 대회를 나갈 것도 아닌데

뭘 그렇게 외모에 신경을 쓰냐고... 주책이라고...


내 마음에 작은 울림을 준 남편의 한마디를 다시 한번 곱씹어 본다.

"엄마, 다단계 피라미드 보이스 피싱만 아니면 뭐든지 하고 싶은 거 하셔요!"

"우리 김여사, 빨갛게 입술 문신하시더니 아주 그냥 입술이 앵두 같으시네!"


그렇다.

김여사의 변신은 무죄이다.


우리 김여사, 금발로 염색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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