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천꽃밭에 피어난 순백의 꽃

물매화

천상의 꽃밭이라 불리는 곳에 물매화와 애기물매화가 순백의 꽃을 피웠다. 제주에서 가장 아름다운 꽃밭, 신비로운 기운이 감도는 천상의 꽃밭이 있다. 마치 선계에 들어선 듯, 아득한 신화 속 풍경이 펼쳐진다.


아주 먼 옛날, 제주에는 저승도 이승도 아닌 저 멀리 머언 곳에, 죽어야만 건널 수 있는 강이 있었다. 오금까지 차오르던 물은 잔등을 적시고, 이윽고 목까지 넘실대며 흐른다. 그 강을 건너면, 눈부시게 아름다운 서천꽃밭이 펼쳐진다.


서천꽃밭 한가운데엔 광천못이 있다. 그 물을 떠다 꽃밭에 주는 것은 때 묻지 않은 아이들의 몫이다. 맑디맑은 아이들의 손길로 적셔진 서천꽃밭엔 희귀한 꽃들이 흐드러지게 피어난다. 웃음꽃, 싸움꽃, 멸망꽃, 수레멜망악심꽃, 뼈 오를 꽃, 살 오를 꽃, 피 오를 꽃, 오장육부 기를 꽃, 환생꽃, 생불꽃, 오색꽃…….


그리하여, 어느 가을날. 서천꽃밭에 자그마한 키에 앙증맞은 애기물매화가 피었다. 세속에 물들지 않은 순백의 꽃잎을 활짝 펼치며, 천진난만한 웃음으로 가을 하늘을 이고 선 애기물매화. 아마도 원앙부인이 흔들어 깨웠을 것이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꽃망울을 웅크리던 애기물매화가, 물가에서 화들짝 피어났다.


순백의 꽃, 애기물매화는 고결한 영혼의 꽃이다. 한 생을 위해 오로지 꽃자루에 한 송이 꽃을 피워낸다. 꽃을 감싸는 단 하나의 잎. 바람이 흔들고 지나가도 미동조차 없다. 오직 한 생을 위한 사랑의 힘이다. 사랑의 믿음으로 눈처럼 맑은 순백의 한 송이 꽃을 피우고, 그리하여 생을 마감하는 애기물매화. 그것은 사군자의 기품을 지닌 꽃이라 해도 손색이 없다.

애기물매화.JPG 애기물매화

습지나 물가에서 매화를 닮은 꽃을 피우기에 ‘물매화’라는 이름을 얻었다. 물매화는 범의귀과에 속하는 여러해살이풀. 제주에서는 물매화와 애기물매화를 만날 수 있다. 고산에서 피기 시작한 꽃은 가을이 깊어지면 저지대 민틋한 오름까지 내려와 핀다. 물매화에는 숨겨진 비밀이 있다. 곤충을 유인하는 헛수술이 진짜 수술보다 더 아름답다. 헛수술은 마치 진주로 장식한 왕관처럼 찬란하다. 지난가을, 물매화와 애기물매화를 구분하기 위해 한참을 들여다보았다. 꽃이 작기에 꽃잎 안에서 영롱하게 빛나는 헛수술을 육안으로 세기란 쉽지 않다. 돋보기를 들고서야 비로소 또렷이 보이는 아름다움이었다.


제주신화 속 서천꽃밭은 우리의 마음속에 피어나는 꽃밭이다. 마음 깊은 곳에 광천못이 있다. 그 못의 물을 길어 올릴 수 있는 이는 오직 아이 같은 마음을 가진 자뿐이다. 어린아이처럼 맑고 깨끗한 광천못의 물을 마신다면, 우리의 오장육부도 깨끗하게 맑아질까. 그리하여, 우리 마음에도 웃음꽃이 피어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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