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라의 전설 속 서천꽃밭

한라구절초

가을꽃은 언제나 고산에서 가장 먼저 피어나기 시작해, 시나브로 마을 어귀까지 내려오며 가을의 문턱을 알린다. 하지만 분주한 일상에 쫓기다 보면, 그 작은 몸짓조차 알아채지 못한 채 어느새 가을을 훌쩍 보내버리기도 한다. 어느 날 불현듯 하늬바람을 타고 창가에 내려앉은 나뭇잎의 쓸쓸한 몸짓을 보고서야 비로소 가을임을 깨닫는다. 하지만 그때쯤이면 가을은 이미 저물어가는 강물을 건너고 있을 테지.


어느덧 바람이 차가워지자, 문득 한라의 품이 그리워졌다. 한라구절초가 보고 싶어 영실로 향했다. 가을빛으로 서서히 물들어가는 산 풍경 속에서 가을 내음을 맡으며 걸음을 옮겼다. 가을 향기로 물들어 가는 들꽃 중에서도 국화는 단연 으뜸이라 할 수 있다. 들녘에는 쑥부쟁이, 개미취, 감국이 흐드러지고, 한라산 자락에는 눈개쑥부쟁이와 한라구절초가 피어난다. 눈처럼 하얀 꽃을 피우는 그 모습이 신선보다도 맑고 깨끗하여 ‘선모초’라 불리는 한라구절초. 한국 특산식물이며, 오직 한라산에서만 만날 수 있는 귀한 꽃이다.


한라구절초의 잎은 두툼하며 깃털처럼 가늘게 갈라진다. 꽃봉오리일 때는 연분홍빛을 띠다가 활짝 피면 분홍빛이 감도는가 하면, 순백의 꽃으로 옷을 갈아입기도 한다. 새색시처럼 화사한 분홍빛으로 피는 한라구절초도, 눈처럼 새하얀 한라구절초도 있다. 벼랑 끝에서 함초롬히 피어난 한라구절초를 마주하니, 그 아련한 처연함에 가슴이 저며온다.


전설을 떠올리며 바라본 한라구절초는 바람에 흔들리면서도 단아함으로 맑았다. 아주 머언 옛날 현명하고 절개가 곧았던 원앙부인은 천하 부자의 외동딸로 태어났으나, 운명의 장난으로 남의 집에서 종살이를 하게 된다. 아비 없이 어린 아들을 키우며 서러운 세월을 견디던 원앙부인은 끝내 만년장자의 가족들에게 매질을 당해 사지가 찢긴 채 생을 마감하고 만다. 할라궁이의 아버지인 꽃감관은 서천꽃밭에서 영험한 열 가지 꽃을 건네주며, 그 꽃으로 죽은 어머니를 되살려 오라 한다. 할라궁이는 신비로운 꽃의 기운을 빌려 어머니를 살렸고, 원앙부인은 "아이고, 봄잠을 오래도 잤구나."라며 지난 고초를 잊고 살아났다. 그 후, 원앙부인은 서천꽃밭으로 들어가 저승으로 온 아이들의 어머니가 되어 그들의 혼을 돌보게 되었다.


그리고 그녀는 신선보다도 고결한 꽃, 선모초라 불리는 한라구절초로 다시 피어났다. 제주 신화 속 서천꽃밭은 신비로움이 깃든 곳이다. 가을이 저물기 전, 서천꽃밭에서 가을의 정취를 온전히 느껴보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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