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강 숙제 ㅡ 여행의 한 순간 쓰기
여행은 늘 설렘을 데려오지만, 그 뒤에는 어김없이 피로가 따른다. 식사 준비를 하지 않아 마음은 느긋했지만, 하루에 두어 곳만 돌아도 숙소로 돌아오면 몸은 곧장 침대로 향했다.
여행의 마지막 날, 우리는 여독을 풀기 위해 온천으로 향했다. 카운터에서 유카타를 고르고 탈의실에서 갈아입은 뒤 메인 홀로 나와 식당과 온천을 잇는 통로로 들어섰다.
통로는 제법 길었고, 양쪽 벽면은 거울로 둘러싸여 있었다. 천장에는 색색의 등이 주렁주렁 매달려 달빛처럼 은은함을 뿜어내고 있었다. 그 빚 속에서 우리는 거울에 비친 모습을 바라보며 한 장의 풍경이 되었다. 나는 동백꽃 무늬 유카타를 입었고, 손주들은 연노란 바탕에 동그란 무늬가 박힌 유카타를 입었다. 아이들은 거울에 겹겹이 비친 자신의 모습을 한참이나 들여다보았다. 처음 입어보는 옷이 주는 낯섦과 설렘이 교차했다. 순간을 남기고 싶어 사진 한 장을 찍었다.
식당에서 각자 먹고 싶은 음식을 골라 점심을 마친 뒤, 이제야 몸을 풀 준비가 되었다. 작은 탕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물은 아이들도 무리 없이 들어갈 수 있는 온도였다. 우리는 탕에서 탕으로 옮겨 다니며 천천히 몸을 담갔다. 탄산수가 올라오는 탕에 들어가자 기포가 피부에 방울방울 맺혔다. 가만히 누워 있으면 몸속까지 풀리는 듯했다. 동그란 탕에 몸을 담근 채 노곤해질 즈음, 손자가 다가왔다. 누나와 이모가 있는 탕을 떠나 내 곁에서 첨벙첨벙 발놀이를 하다, 어느새 내 등 뒤로 앉았다. 돌아보니 얼굴에 온갖 표정을 겹쳐 쓰며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손으로 내 얼굴을 밀며 보지 말라는 손짓을 했다. 순간, 나의 직감을 믿고 서둘러 손자를 안고 오른손으로 엉덩이를 받쳐 탕에서 나왔다.
“응가할 것 같아.” 짧은 말에 딸은 곧장 화장실로 앞장섰다. 가는 도중 똥을 싸면 어쩌나 싶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손바닥에 묘한 촉감이 느껴졌다. 이미 시작된 것이다. 아기를 안고 뛰었다. 탕문을 나와 탈의실로 들어서니 수건을 두른 사람들이 거울 앞에서 머리를 말리느라 분주했다. 딸이 미로 찾기 하듯 길을 찾았고, 나는 숨을 몰아쉬며 뒤따랐다. 겨우 화장실에 도착해 아기를 변기에 앉혔을 때, 그제야 안도의 숨이 흘러나왔다. 내 손바닥에 남은 흔적은 반갑지 않았지만, 그날만큼은 위기를 건너온 증표처럼 느껴졌다. 어쩌면 금손바닥이었는지 모르겠다. 고작 몇 분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짧은 시간은 유난히 길게 늘어졌다.
몸은 풀렸지만, 마음은 끝내 놓이지 않았다. 그날의 온천은 쉼보다 긴장에 가까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