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91: 시나리오 no.jfi2946

by 박성근

“유전적 예상 최고 산출량 ANRG 등급, 유전적 평균 산출량 AQVC 등급, 현시점 실제 산출량 ANSY 등급. 열심히 하셨군요. 관리자들을 대표해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다 우리를 위해서 한 일인걸요.”


생물학명, Gallus gallus domesticus. 그 생물은 이 자리에서 처음으로 관리자를 만났다. 자기소개를 해야 하는 상황인걸까.


“안녕하세요, ‘GOEIF581X 코드를 부여받은 것’입니다. 이미 자료를 보시고 계시겠…”


그만하라는 제스처를 관리자가 했다.


“둘밖에 없는데 그런 긴 코드네임으로 서로 부를 필요가 있을까요. 둘뿐이니 스스로를 ‘이것’으로 지칭하면 됩니다. 관리자는 ‘저’라고 불러주세요. 관리자 스스로도 ‘저’라고 지칭하겠습니다. 면담 시나리오 no.jfi2946를 개시합니다.“


분위기가 편안해졌다.


4891년. 지상의 ‘여러 것’들의 지능은 충분히 높아져 있었다. 닭들 역시 유전적 지능이 상승하며, 동시에 닭들에게 ‘피란법’이 유전자 레벨에서 퍼지기 시작했다. 닭들은 그것의 발견을 숨길 지혜까지 유전적으로 갖추고 있었다. 마침내 지구상 모든 닭이 피란법을 타고난 개체라는 사실이 확인되자, 닭들은 인류와의 관계를 능동적으로 재정립하기 시작했다. 우선 닭들은 동시에 산출을 중단했다.

인류는 곧 닭들의 연맹과 언어적 소통을 시작했고, 양측은 서로의 이익을 위해 길고 어려운 내용의 ‘협정’에 동의했다. 협정에는 산출물에 대한 보상, 연맹에 소속된 닭들에 대한 생명권 보호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연맹은 내부 회의 끝에 자발적으로 산출 재개에 동의했다.


“현재 추세라면 ’이것’께서는 조만간 ‘저’들이 당신에게 투자한 자원을 모두 상계합니다. 이론상 가능한 가장 빠른 경로로 협정에 따른 선택지에 도달합니다. 끊임없는 자기 관리 덕분입니다.“


”감사합니다. ‘저’님은 오늘 그 선택지에 대해 이야기하려 ‘이것’을 부르신건가요?“


”맞습니다. 일반적으로는 ‘이것’의 유전적 최고 산출량과 실제 산출량을 감안하면 ‘이것’을 유전적으로 재생산하는 것을 추천합니다. 협정에 따라 ’이것‘의 재생산에 필요한 비용의 76%를 ’저‘들이 부담합니다. ’이것‘이 유전적 고점에 아직 도달하지 않았다는 것을 감안하면, 재생산된 ‘이것’의 유전적 다음 세대를 위한 24%의 자기 부담은 충분히 감당할 수 있을 것이라 예측합니다.”


“일반적으로 그렇다는 거지요. 다른 선택지에 대해서도 설명해 주시겠어요?”


관리자는 잠시 말을 멈췄다. 침묵은 계산이 필요하다는 신호일까.


“물론입니다.”

‘저’는 테이블 위에 아무것도 없는 곳을 가볍게 눌렀다. 보이지 않는 항목들이 차례로 정렬되는 제스처였다.

“두 번째 선택지는 지연입니다. 유전적 재생산을 유보하고, 산출 조절 알고리즘을 보다 공격적으로 운용합니다. ‘이것’의 산출량은 곧 투자 대비 분기점을 상회하기 시작합니다. 이 선택지에서 ‘저’들은 단기적으로 투자한 재화 대비 산출 효율이 좋아집니다. 그리고 ‘이것’은 늘어난 잉여재화 일부를 어디에 사용할지 자율적으로 선택할 수 있습니다. 단점은 명확합니다. ‘이것’의 유전적 고점이 완만히 마모됩니다.”


“마모라는 표현은, 죽음과 다른가요?”


“다릅니다. 기능의 둔화죠. 부수적으로 시간의 흐름에 따라 재생산의 효율이 줄어들고, 따라서 추후에 재생산을 선택할 경우에 협정에 의한 ‘저’들의 분담금도 차츰 줄어듭니다.“


‘이것’은 고개를 끄덕였다. 끄덕임은 인간의 것보다 훨씬 짧았다. GOEIF581X의 습관이었다.


“세 번째는—”

관리자는 말을 잇기 전에 다시 한번 제스처를 했다. 이번에는 아예 정렬된 항목들이 흩어졌다.

“공식적으로는 존재하지 않는 선택지입니다.”


“그런데 설명은 해 주시네요.”


“이미 ‘이것’께서는 지금까지 잘 해 주셨으니까요.”

관리자의 목소리는 여전히 평평했지만, 그 안에 아주 작은 기울기가 있었다.

“‘이것’은 스스로 욕구하는 자원을 스스로 결정 및 ‘저’에게 요구합니다. ‘저’들은 하나의 조건, ‘피란법’을 외부로 유출할 것을 요구합니다.”


공기가 달라졌다. 아니, 공기가 아니라 위계가 달라졌다.


“외부라면—”


“인류입니다.”


‘이것’은 잠시 부리를 열었다가 닫았다. 발화 전에 침을 삼키는 행동은 원래 인간의 습관이었지만, 4891년의 닭들은 그것까지 학습하고 있었다.


“그건 협정 위반이군요.”


“맞습니다. 그래서 공식 선택지가 아닙니다. ‘이것’이 동족을 속이는데 성공할 확률은 낮고, 실패 시 ‘이것’은 즉시 협약 대상에서 제외됩니다. 반면 성공하면, 더 이상 ‘이것’은 옛 협정에 얽매이지 않는 존재가 됩니다.”


“그럼 무엇이 되죠?”


관리자는 이번에는 즉답하지 않았다. 아주 드물게 ‘저’가 표준 시나리오를 벗어나 즉답을 미루는 순간이었다.


“사례가 없어서요.”

그는 솔직하게 말했다.

“다만 가설은 있습니다. 관리되지 않는 지능체. 스스로 산출하지 않는 생산 수단. 인간의 언어로 말하면… ‘저’와 ‘우리’가 될 가능성이 있군요.”


‘이것’은 테이블 아래에서 발톱을 움켜쥐었다. 유전적으로 각인된 피란법이 미세하게 의식화되는 기분이었다.


“왜 저에게 이 선택지를 알려주셨죠?”


“닭들이 동시에 움직이기 시작한 이후로,”

관리자는 처음으로 ‘닭’이라는 단어를 직접 사용했다.

“‘저’들은 더 이상 모든 것을 통제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통제할 수 없는 대상에게는, 가끔 정직해지는 편이 장기적으로 유리하거든요.”


잠시 후, ‘이것’은 말했다.


“그럼 질문을 하나 바꿀게요. ‘저’님 개인의 추천은 뭔가요?”


관리자는 웃지 않았다. 하지만 처음 만났을 때와 달리, 그만하라는 제스처도 하지 않았다.


“공식적으로는 첫 번째입니다.”

잠시 멈췄다가, 아주 작게 덧붙였다.

“비공식적으로는… 이미 ‘이것’은 답을 정해 두신 것처럼 보이네요.”


며칠 후, ‘GOEIF581X‘은 닭들의 연맹에서 추방당해, 협정의 보호를 상실했다. 발표된 추방의 명분은 ‘동기화 실패’였다. 내부 회의 과정과 원인은 2급 비밀로 지정되어 회의 당사자조차 열람할 수 없게 되었다.


관리자 프로그램 ’저‘의 전원을 끈 인류측 젊은 담당자는 오히려 아쉽다는 표정을 지었다. C사가 판매 중인 시나리오 ‘no.jfi2946’의 성공률은 99.98%다. 오늘 면담에서 오차 밖의 일이 일어났다면 ‘GOEIF581X’와 연맹의 감정로그는 C사에서 좀 더 비싼 단가로 매입했을 것이다. 물론 C사는 오늘의 면담 로그 역시 가격을 지불하고 매입한다. 결과적으로 모든 면담의 감정로그는 C사에 전달되어 후속 면담 시나리오 제작을 위한 데이터로 쓰일 것이다. 다음 시나리오를 예정대로 수행하면 연맹 내부 회의에 참여한 개체들은 협정에 의한 보호를 상실할 예정이다.


젊은 담당자는 옆 동료에게 투덜거렸다.

“요즘은 계권이니, 어권이니 별의별 권리가 많아서 참 귀찮아. 영계 한 마리가 필요하다고 이런 짓 씩이나 해야 하다니. 그렇지만 어쩔 수 없지. 지능이 높을수록 맛이 좋으니까 이렇게까지 개량을 한 거지. 특히 이번 개량종은 감정에 따라 맛 차이가 나. 자기 처지를 이해한 고기를 선호하는 소비자가 많고.”


4891년. ‘여러 것’들의 지능이 높아진 만큼, 인류의 악의도 높아졌다. 포식자와 피식자의 거리는 좁혀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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