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빙글빙글 오사카 두 번째 편

막막해 보이는 안개를 씻어낼 수 있었던 이유

by 윤슬

브런치에 글을 쓰는 일은 나에게 취미이다 보니 계속해서 글 쓰는 것을 미루게 된다. 취미의 단점은 하고 싶다는 의욕이 생길 때만 하게 된다는 점이다.


오사카 첫 번째 편을 쓰고 두 번째 편을 바로 쓸 수 있을 줄 알았으나, 미루고 미루어 오늘에서야 다음 편을 써야겠다는 의지가 불타올랐다.


분명 함께인데 혼자서 여행하는 기분

여행을 떠나기 전부터 복선은 시작되었다. 함께 여행을 하고 싶다는 친구의 말에 이 친구랑 여행을 가보고 싶다는 열정이 샘솟았다. 그러나 친구가 가족 말고 누군가랑 해외여행을 가는 것은 처음이라며 비행기 항공권을 어떻게 끊는지, 길은 어떻게 찾는지 하나도 모른다는 말을 듣고 무척이나 당황했다. 누구나 '처음'이 있기에 머리로는 이해했지만, 혼자서 계획을 짜고, 여행 정보를 찾고, 길을 찾아다닐 미래를 잠깐 본 것 같아서 맥이 빠졌다. 그리고 그 미래는 틀리지 않았다.




더 많이 아는 사람이 주도해야 하는 점은 맞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한국에서부터 오사카에 도착하고 나서 까지 혼자서 일정 소화를 감당해야 하다 보니 억울함과 분노가 마음속에 가득 채워졌다. 마음이 끓는점에 도달한 순간은 그때였다. 숙소에서 화장을 다하고 저녁에 도톤보리를 향하려고 했다.


나 지금 핸드폰 배터리가 없어서... 충전하고 가야 할 것 같은데.
뭐? 보조배터리 없어? 내가 너 충전 자주 안 하니깐 보조배터리 꼭 챙기라고 전날까지 말했잖아.
없어...
아니... 내 보조배터리는 c 타입이라서 너 폰 충전도 못해주는데... 아까 공항에서 챙겼다고 했으면서...
정말 미안해... 근데 없는 걸 어떡해...


끓는점에 도달하고 만 감정은 숙소문을 박차고 나가는 충동적인 행동으로 이어졌다. 친구와 말을 섞고 싶지 않았고, 혼자 있고 싶었다. 30분 정도 정처 없이 오사카 숙소 근처 거리를 배회했다. 생각을 하나씩 차곡차곡 쌓았다.


어떡하겠어. 이미 벌어진 일인걸. 친구한테 내가 왜 화났는지 차분하게 말해보자.


결론에 도달한 뒤 1층에서 친구를 만났다. 어색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나는 내 생각과 감정을 그대로 공유했다. 친구는 계속해서 미안하다고만 말했다. 답답한 감정이 남아 있었지만, 일단 첫날부터 삐걱거리고 싶지 않았기에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하고 도톤보리로 향했다. 물론 길은 내가 찾았다.


첫째 날 밤에 찾아온 공허함

도톤보리 역 근처 오락실에서 프리쿠라를 찍으면서 분위기는 다시 밝아졌다.


도톤보리 거리는 예상한 대로 사람이 빼곡했으며 '번쩍거리는 시티'를 제대로 즐길 수 있었다. 한국의 강남거리, 홍대거리에서는 느낄 수 없는 '광란'과 '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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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끌 거리는 인파를 헤친 뒤 드디어 오사카의 상징. 파란색으로 대범하게 번쩍이는 글리코 광고판을 마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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핸드폰으로만 보던 모습이 눈앞에 마주할 때의 짜릿함이 여행의 묘미 중 하나다. 관광객의 면모답게 인증 사진을 연달아 찍었다. 친구랑 글리코상 앞에서 영상도 찍다 보니 숙소에서 화났던 감정이 거의 식었다. 글리코 상 앞 강은 예상하지 못한 아름다움이었다. 강 양옆으로 쫙 깔린 화려한 광고판들. 광고판에서 뿜어 나오는 빛이 강물에 반사되는 풍경은 도톤보리에 대한 강한 인상을 남겨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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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도 찍고 멋도 부렸으니 이제는 배고픔을 채울 시간이었다. 오사카에 도착하고 나서 먹은 거라고는 편의점 샌드위치밖에 없었기에 친구와 나는 재빨리 맛집으로 향했다.


시원한 생맥주와 일본에 간다면 꼭 먹어봐야 한다는 '이치란 라멘'을 상상하면서 걸어갔지만, 웨이팅 2시간이라는 절망을 마주했다. 여행을 갈 때 음식에 진심이기는 하지만, 원하는 맛집에 못 간다고 해서 아쉬움이 크게 남지 않는다. 가게 입구에서 찰나의 순간에 친구와 눈빛 교환을 한 결과, 나와 같은 마음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렇게 목적지를 잃은 우리는 직진 본능을 가진 채 앞으로 쭉 걸어갔다. 관광지의 저녁은 포화 상태이다. 어디를 들어가도 웨이팅이 있었고, 우리에게는 웨이팅을 기다릴 의욕이 없었다. 지쳐서 아무 곳이나 들어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한 라멘 가게 앞에서 직원이 일본어로 영업하는 소리가 들렸다. 손님 영업은 곧 손님이 별로 없다는 뜻. 우리는 곧바로 가게 입구에 놓인 키오스크에서 라멘 2개와 맥주 1병을 시키고 안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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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멘의 본고장이라 그런가, 배가 너무 고파서 그런가, 맛집이 아니라 기대를 안 해서 그런가, 한 마디로 맛있었다. 된장 육수를 머금은 쫄깃한 면과 국물이 깊은 맛을 내면서 속을 따뜻하게 해 줬다. 얇은 고기 수육을 집어 면과 함께 말아서 먹으면 풍미는 2배로 올라간다. 뱅글뱅글 돌아가는 골뱅이 오뎅은 오늘의 하루를 대변해 주는 듯했다.


따뜻한 속을 차갑게 적셔줄 맥주 한 잔까지 들이켤 때, 인천에서부터 피곤했던 순간이 모두 잊힌다. 아주 살짝 취기가 오른 상태에서 친구가 한국에서 안고 있던 고민을 들어줬다. 그래도 첫째 날의 마무리를 기분 좋게 끝낼 수 있을 것 같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해소하지 못했던 답답함

해외여행이 오랜만인 친구는 저녁을 먹고 난 뒤, 급격히 피곤해진 게 보였다. 길도 내가 계속 혼자 찾아가고 있는 마당에 친구의 체력까지 신경을 써야 하니, 답답했던 마음이 다시 올라와 가슴을 쿵쿵 쳤다. 속으로 인내심을 머금은 채 숙소 앞 횡단보도까지 갔다. 그때, 신호가 켜져서 건너다가 옆을 보니 친구가 안 보였다. 뒤를 휙 돌아봤는데 친구가 정신을 다른 곳에 뒀는지 멍을 때리고 있는 것이다. 일단 급한 대로 친구를 불렀다. 흠칫 놀라더니 나를 뒤쫓아왔다. 순간 앞으로 얘랑 어떻게 여행을 다녀야 하지 앞이 깜깜해졌다. 분명 같이 여행을 다니는데, 외로운 기분이 들었다. 함께 다닌다는 느낌을 이곳에 와서 한 번도 받지 못했다. 더 이상 화를 내고 싶지 않았기에 우울한 마음으로 숙소에 들어갔다. 친구는 침대에 누워 잠깐 자겠다고 하며 먼저 씻으라고 말했다. 나는 알겠다고 한 뒤 잠깐 엄마랑 통화하겠다고 말하고 호텔 방을 나갔다. 그리고 통화 연결음 끝에 닿은 엄마의 목소리는 눈물 버튼이 되었다. 엄마는 무슨 일이냐고 물었고, 오늘 하루 친구와 빚은, 사실 혼자서 고군분투한 내용을 쭉 풀었다. 친구가 잘못한 건 없지만, 어리바리한 행동 때문에 스트레스받는다고, 여행을 홀로 다 감당하는 것 같아서 마음의 짐이 무겁다고 한풀이를 했다.


너 입장에서는 충분히 스트레스받지. 근데 엄마가 봤을 때는 친구가 나쁜 애는 아닌 것 같아. 네가 옆에서 길 찾는 방법 같은 거를 천천히 알려줘. 정 안되면 가이드가 되었다고 생각하고 여행 다니고. 사람의 성격을 네가 고치고 싶다고 고칠 수는 없어. 세운 계획을 꼭 해야 한다는 부담도 좀 덜어내 봐. 남은 일정을 친구랑 그래도 재미있게 보내는 게 너한테도 좋으니깐.


엄마의 조언을 들으니 요동치던 마음의 파도가 진정되는 것 같았다. 감정을 뒤로한 채 이성을 앞에 내세우니 방향성이 보였다. 남은 눈물을 닦아내며 울먹거리며 '알겠어... 잘해볼게...'라고 말하며 전화를 끊었다. 울었다는 사실을 친구 앞에서 보이기 싫어 심호흡을 몇 번 해준 뒤, 방에 들어가자마자 샤워실로 들어갔다. 걱정이 무색하게도 친구는 새근새근 자고 있었다. 씻으면서 자기 전에 친구한테 바라는 점을 솔직하게 말하기로 결심했다.


친구도 씻고 침대에 눕자 바로 얘기를 꺼냈다. 나는 여행 전부터 혼자서 계획을 세워서 서운했던 감정과 오늘 하루종일 스트레스받았던 사건들을 하나씩 얘기했다.


-네가 친구랑 가는 해외여행이 처음인 것도 알고 그래서 정신이 없고 노하우가 없는 것도 다 이해해. 그런데 이 여행을 같이 하는 거지 나 혼자 하는 게 아니잖아. 네가 알아보려는 노력이라도 보였으면 좋겠는데 그런 노력조차 보이지 않아서 속상했던 것 같아.


그러더니 친구가 입을 떼기 시작했다.


내가 생각해도 너무 아무것도 안 한 것 같아. 핑계 같을 수 있겠지만, 오사카 도착하자마자 숙소까지 가는데 갑자기 정신이 없는 거야. 정말 아득해지는 느낌. 나는 뭐를 해야 할지 갈피를 못 잡겠는데 옆에서 네가 야무지게 길 찾고, 교통 카드도 사고 다 해결하니깐 스스로 자괴감이 들더라고... 나랑 같은 또래인데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내가 부끄러워서 정신이 계속 멍해진 것 같아. 내일부터는 진짜 길도 찾고 네가 알려주기만 하면 다 해볼게. 진짜 미안해...


말에서 진심이 느껴질 때, 직감적으로 알 수 있다. 누구나 처음이라는 게 있고, 습득하는 속도도 다르다. 솔직하게 다 털어놓은 친구의 사과를 들으니 마음이 풀어졌다. 그리고 '이해'를 하기 시작했다. 상대방 입장에서 힘든 순간이 언제였는지 깨닫게 되고, 상대방이 개선하려는 의지를 보여주니 희망이 보였다. 그토록 답답했던 감정이 이해를 함으로써 해소되었다.


그래! 나도 너랑 이렇게 여행으로 사이가 멀어지기 싫어. 잘해보자 내일!


그렇게 서로의 멋쩍은 웃음과 각자의 결심이 침대 위에 얹힌 채, 밤이 저물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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