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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든버러 여행일지 1화

흐린 날씨가 완벽한 도시

by 윤슬

2024.10.24 ~ 2024.10.26 동안의 기록


Day 1


11시 30분. 등에 거북이 등딱지 마냥 커다란 검은색 가방을 메고 다이아몬드 도서관 건물로 향하고 있었다. 도서관 건물 건너편에서 횡단보도 신호를 기다리고 있는데 H가 기다리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설레는 마음으로 H와 만났다. H는 내 가방을 보더니 빵 웃음을 터뜨렸다. H의 가방은 뚱뚱하지 않은 반면 내 가방은 빵빵했다. 나 역시 그 차이가 웃겨 웃음이 나왔다.


9월 런던 여행 이후로 숙소를 잡아서 다니는 여행은 처음이었다. H와 나는 서로 '신난다', '설렌다'를 연신 반복하며 셰필드 기차역으로 향했다.


에든버러에 도착하면 늦은 오후이기도 하고, 마침 딱 점심시간대라 H는 중간에 Greggs에 들르자고 했다. 전에 Greggs의 소시지 롤을 제일 좋아한다고 H가 말해줬었다. H는 소시지 롤을 사고, 나는 달달한 음식 당겨 아메리카노 한 잔과 펌킨 스파이스 도넛을 사서 품속에 지닌 채 기차역에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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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차를 타기 전 커피 한 잔과 간식을 사고 좌석에 앉을 때 설렌다. 기차 여행에서만 느낄 수 있는 포근함이다. 그렇게 책 한 권과 함께 3시간 45분의 긴 여정을 즐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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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읽는 게 살짝 지루해지면 이어폰으로 노래를 들으면서 바깥 풍경을 보기도 했다. 중간에 뉴캐슬 지역을 스쳐 지나갈 때 영국의 동해가 살짝 보였다. 바다를 너무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오랜만에 보는 푸른 광경에 눈을 반짝거렸다. 11월에 혼자서 떠날 바다 여행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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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inburgh Waverley 역에 도착했다. 기차역을 벗어나자 영국의 상징, 회색 구름이 우리를 반겼다. 다른 나라였으면 실망했을 날씨가 이곳에서는 '참 잘 어울린다'라는 느긋한 기분을 들게 한다. 영국 교환학생으로 생활하지 않았다면 가기 힘들었을 스코틀랜드에 도착해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모든 순간이 그저 즐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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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근교 여행으로 다녀온 맨체스터, 요크와 또 다른 느낌을 받았다. '에든버러'와 어울리는 거리 풍경이었다. 더 나아가 영국이라는 나라와 가장 어울리는 색깔이 눈앞에 펼쳐졌다. 무채색 벽돌 건물들과 색깔이 있어도 회색빛이 감도는 건물들이 일렬로 있는 모습. 멀리서 보이는 뾰족한 첨탑. 에든버러에 왔다는 실감이 그제야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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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마스 가게는 이상하게도 그냥 지나치지 않게 된다. 가게 안에서 살 물건이 없음에도 크리스마스 설레발을 치고 싶어 들어가게 된다. 역시 이번에도 화려한 장신구들을 눈에 담은 채 구경하고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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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H는 항상 여행할 때 같이 계획을 짤 수 있는 'Wanderlog' 앱을 이용한다. 서로 가고 싶은 장소를 앱을 통해 리스트에 담고 각자 핸드폰으로 볼 수 있는데, 리스트에 'Royal Mile'이 있었다. 마침 길을 걷다가 Royal Mile로 가는 좁은 길을 발견했다. H 말로는 이 길은 옛날에 일반 백성들이 다니는 길이라고 했다. 다니는 길마저 차별이 존재했다니, 새삼 과거에 태어나지 않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끔 H가 이렇게 장소에 대한 역사를 짧게 들려주는 게 참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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좁은 길을 빠져나오니 Royal Mile 거리가 우리를 환하게 반겼다. 양옆 길로 우리가 가고 싶어 하던 기념품 가게들이 보였다. 특히 캐시미어 목도리 가게와 위스키 가게는 끝도 없이 나타나 자연스레 에든버러의 특산품임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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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특별한 목적지 없이 에든버러의 향기를 즐기다가 한 건물을 보고 탄성을 질렀다. 무슨 건물인지는 모르지만 정교하고 예뻐서 한참을 바라봤다. 우리가 서 있는 올드타운의 분위기와 너무나도 잘 어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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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서 커다란 탑이 예뻐 보여 그쪽으로 다가가기로 했다. 가는 길에 공원을 지나쳤는데 무채색 건물들과 상반된 알록달록한 자연의 모습이 또 가슴을 설레게 했다.


'봄이나 여름에 이곳에서 잔디 위 돗자리를 놓고 샌드위치를 먹는다면 어떨까, 정말 낭만적이겠다.'


에든버러 대학교도 있던데, 내가 만약 에든버러 교환학생이었다면 자주 갔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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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도착한 곳은 '스콧 기념탑'이었다. 스코틀랜드 작가 월터 스콧을 기리기 위해 세워졌다고 한다. 세월의 흔적이 보이는 건축 양식과 뾰족한 탑의 모습이 기억에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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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먹을 장소를 미리 정해뒀는데, 인기가 많은 장소라 웨이팅이 있을 것 같아 조금 이르지만 식당으로 가기로 했다. 아까 봤던 공원 풍경이 기억에 남아 이왕 가는 길 예쁜 길로 돌아서 갔다. 뾰족하고 어두운 건물들과 가을 색깔로 물들기 시작한 나무의 모습이 예상치 못하게 조화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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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광객을 저격한 기념품 가게 간판이 귀여워서 사진을 찍었다. 이날 인스타그램 첫 스토리를 이 간판 사진으로 시작했다. 스코틀랜드에 와서 행복한 마음을 딱 표현해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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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코틀랜드 전통 식당인 'Makars Mash Bar'에 도착했다. 식당 안으로 들어갔는데 직원이 1시간 정도 웨이팅이 있다고 말했다. 미리 이름과 연락처를 두고 가면 연락을 주겠다고 해서 흔쾌히 웨이팅 리스트에 이름을 올렸다. H가 배고파서 일찍 가자고 한 거였는데 미리 오기를 잘했다. 1시간 동안 거리 구경을 더 하기로 했다.


에든버러에서 유명한 성당인 St Giles' Cathedral이 보여 들어가려고 했는데 곧 닫는다고 해서 못 들어갔다. 아쉬운 마음에 그 주위 거리를 둘러봤다. 건물들이 비슷한 분위기를 풍기는 게 신기했다. 각지고, 뾰족한 전형적인 고딕 양식. 또 회색이라고 표현하기에 단순하게 들릴 정도로 칙칙한 색깔이 다양하게 섞여 있다. 중세 시대 괴팍하고 남들과 어울리기 싫어하는 왕이나 여왕이 살았을 것 같은 소설적인 상상도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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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덤 스미스 동상이 보였는데 동상 위 도시 길거리에서나 보이는 꼬깔콘이 스미스 씨 머리 위에 놓여 있어 웃음이 빵 터지고 말았다. 도대체 누가 저 높이까지 공을 들이며 꼬깔콘을 놓았을까, 황당한 광경에 사진을 찍었다. 수능 시험에서 내 머리를 아프게 한 애덤 스미스가 이런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눈앞에 나타나 약간 통쾌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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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든버러에 도착했을 때부터 계속 우리의 눈에 보이던 위스키 가게를 무작위로 들어갔다. 황금빛으로 반짝이는 위스키 병들을 천천히 둘러봤다. 위스키 병은 항상 크기가 큰 것만 봤었는데 작은 병으로 진열된 모습이 신기했다. 하나 살까 고민했지만 아직 위스키의 매력을 배우지 못해 구매 욕구를 고이 접어두었다. 앞으로 4개월 더 있을 교환학생의 모습이 아닌 잠깐 영국에 머물렀다가 갈 여행객이었다면 술 좋아하는 친구에게 선물해 줬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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핸드폰으로 웨이팅이 끝났다는 연락이 오자 나와 H는 부랴부랴 식당으로 향했다. 어느새 해가 지고 있었다. 아까 봤던 기념탑과 거리 곳곳에 가로등 불이 켜지기 시작했다. 에든버러의 저녁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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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든버러는 평지가 아닌 언덕이 많고 그 언덕을 올라가기 위해서 계단을 올라가야 했다. 하지만 지도에는 계단으로 이루어진 길인지 표시가 없기 때문에 헷갈려서 길을 빙빙 돌았다. 늦을까 봐 허겁지겁 달리면서 식당 앞에 다시 도착했다. 입구에서 한 손님이 웨이팅을 물어보고 있었다. 직원은 오늘 웨이팅이 모두 마감되었다고 말했다.


"역시 우리는 럭키비키 하다니깐!"


나와 H는 눈빛으로 하이파이브를 쳤다.


새로운 지역으로 여행을 왔으면 그 지역의 술을 마시는 것이 내 여행의 몇 안 되는 철칙 중 하나다. 위스키를 잘 모르지만 메뉴판 밑에 쓰여있는 맛 설명을 보며 주문했다. 정확한 맛이 기억나지는 않지만 달달하면서 쓴맛이 매력 있었다. 씁쓸함 덕분에 메인메뉴로 시킨 고기랑 mashed potato의 느끼함을 딱 잡아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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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인메뉴로 스코틀랜드의 대표 음식인 haggis와 이곳 시그니처인 lamb shank를 시켰다. 각 메뉴마다 mashed potato 맛을 고를 수 있어 'Scottish' 수식이 붙은 mashed potato를 골랐다. 두 음식 모두 맛있어서 나와 H 둘 다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영국 음식이 맛없기로 유명하고 실제로 주위 한국인들을 보면 모두 영국 음식에 큰 감흥이 없어 보이는데 나랑 H는 매번 영국 식당에 갈 때마다 즐겁다.


"이 정도면 우리가 그냥 영국 음식하고 잘 맞는 게 아닐까?"


서로 왜 우리만 영국 음식을 맛있다고 느낄까 고민하며 다시 음식을 음미했다. 문득 H와 입맛이나 먹을 때 갖고 있는 철학이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새로운 음식을 시도하는데 편견이 없는 것을 넘어서 짜릿함을 느끼는 것. 음식과 술의 궁합을 중요시하는 것. 여행 갔을 때 그 나라의 음식만을 먹는 것. 한식을 갈망하지 않는 것.


음식에 대한 가치관들이 이토록 겹쳐서 포개어질 수 있다는 게 신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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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우리가 3일 동안 너무 잘 여행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H가 말했다. 나 역시 그럴 것 같았다. 늘 그렇듯이 우리는 환상의 여행 호흡을 맞춰왔기에 이번에는 또 어떤 경험을 함께 공유할지 기대가 되었다. H가 항상 나에게 외치는 말이 있다.


"항상 고맙고, 기쁘고, 사랑해!"


함께 있는 순간마다 이 말을 건네준다. H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사랑을 온전히 다 표현하는 사람이라 긍정적인 영향을 많이 받게 된다. 처음에는 낯간지러워서 속으로 기뻐하면서 '나도'라는 반응만 했었는데 요즘에는 나도 똑같은 말을 건네려고 한다. 정말 교환 생활을 하면서 H 덕분에 고맙고, 기쁘고, 그래서 사랑하기에.


기분 좋게 밥을 먹고 예약한 에어비앤비 숙소로 향했다. 버스를 타고 한 번에 갈 수 있어 편했다. 숙소 건물 문 여는 법을 찾는데 애를 먹었지만, 그것이 에어비앤비의 묘미라고 생각한다.


짐을 푼 뒤 내가 먼저 씻었는데 그 사이 H에게 작은 사건이 일어났다. 런던에서 영국 유심을 새로 산 후 한 달이 지나 핸드폰 데이터를 충전해야 했는데 충전이 안 된다는 것이다. 나도 지난주에 충전하면서 몇 번 실패한 끝에 겨우 성공했던 터라 실패의 원인을 못 찾았다. 결국 내일 통신사에 직접 찾아가 직접 직원을 통해 충전하기로 했다. H는 이 '억까' 상황이 웃기고 슬프다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침대가 하나라 우리는 옹기종기 모여 누웠다. 침대 위에 펄럭일 수 있는 천이 하나밖에 없길래 이불인 줄 알았다.


"이게 이불이라니, 너무 춥잖아!"


"밑에 우리가 깔고 있는 게 이불 아니야?"


H가 물었다.


"아니야, 이거 고정되어 있잖아."


알고 보니 H의 말대로 두꺼운 시트가 이불이었다. 우리 둘은 어이가 없어 웃음을 터뜨렸다. 이런 작은 사건들 덕분에 추억이 방울방울 생기게 되는 것 같다.


하고 싶은 말이 많은 H 덕분에 졸리기 직전까지 의식의 흐름대로 대화를 했다. 어느새 눈은 서서히 감겼고 밀려왔던 피곤함이 잠을 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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