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의 애정 어린 아쉬움
Day3
둘째 날보다는 여유롭게 일어나 10시에 체크아웃을 했다. 뚱뚱한 검은 배낭을 다시 메고 밖을 나섰다. 걷기에는 무리일 것 같아 시내까지 버스를 타기로 했다.
어제부터 말썽이었던 검은색 신발 때문에 결국 Tesco express에서 밴드를 구매했다. 버스를 기다리면서 피가 나는 뒤꿈치를 응급처치했다. 다행히 밴드를 붙이니 더 이상 걸을 때마다 따가운 감촉이 사라졌다.
버스에서 내려 걸어가는데 한 독립서점 간판이 우리의 눈을 사로잡았다. 무언의 눈빛을 주고받은 후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책의 역사가 고스란히 느껴지는 서점이었다.
어제 젤라또를 먹었던 장소를 다시 마주했다. 어제와 확연히 다른 점이 2가지였다. 먼저 어제의 회색빛 하늘 위 파란색이 진하게 덧칠되어 날씨가 티 없이 맑았다. 두 번째, 마켓을 열고 있었다. 시간도 많겠다, 무엇을 파는지 둘러봤다. 사고 싶은 물건이나 음식은 없었지만 주말 에든버러 시장을 경험할 수 있어 아침부터 기분이 상쾌했다.
날씨가 우리의 여행 일정을 꿰뚫고 있는 것 같았다. 어제는 에든버러 성이 메인이벤트라 그에 맞게 흐릿한 날씨로 무대 세팅을 해줬다면, 오늘은 알록달록한 장소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전개인 걸 눈치챘는지 180도 다른 하늘 배경을 선보였다.
첫째 날 못 갔던 St. Giles Cathedral을 찾던 중 Victoria Street를 지나치게 되었다. 해리 포터에서 마법사들의 쇼핑 거리인 Diagon Alley의 영감이 된 거리라고 한다. 에든버러라고 믿기지 않을 형형색색의 건물들이 길게 늘어섰다. 푸른 하늘과 완벽한 호흡을 이룬 풍경이었다.
"솔직히 어제 날씨에 여기를 왔으면 너무 아쉬웠을 것 같아."
날씨가 흐릿하면 흐릿한 대로 운이 좋고, 맑으면 맑은 대로 운이 좋다고 생각하기 때문일까. 모든 순간을 있는 그대로 행복하게 받아들이는 우리가 참 좋다.
새로운 지역으로 여행할 때마다 성당을 한 군데씩 둘러보는 것 같다. 하늘 아래 같은 성당은 존재하지 않는다. 성당의 외관, 내부 모두 각기 다른 매력이 있다.
교환학생 생활 이전, 뻔한 결말이 적힌 대본을 보듯 성당을 구경했다. 스테인드글라스가 대충 화려하게 내부를 비추면서 종교적인 조각상들이 있는 곳. 그래서 가족들과 여행할 때 빨리 구경하고 밖에서 기다리곤 했다.
이상하게 런던 세인트폴 대성당을 본 이후로 성당을 천천히 감상하게 되었다. 스테인드글라스에 새겨진 풍경과 사람들, 조각상들이 전부 아름다워 보인다. 비록 가이드가 없어 창문마다 어떤 이야기가 펼쳐져 있는지 알지 못하지만 그저 보고 있는 것만으로 이곳 사람들이 얼마나 종교를 중요시했는지 실감할 수 있었다.
종교가 없고, 앞으로도 가질 생각은 없지만 예수는 인류 역사상 가장 강력한 힘을 지닌 존재임을 성당을 보면서 피부로 와닿게 되었다.
우리는 다시 아까 지나쳤던 Victoria Street을 이번에는 반대편을 통해 걸어갔다. 처음에 지나쳤을 때 공사하는 건물도 있어 사진 찍을 때 아쉬웠는데 반대편으로 오니 훨씬 예뻤다.
사람들이 줄을 서고 있어 무슨 가게인지 고개를 내밀었다. 영국의 자랑, 해리포터 공식 가게가 자리 잡고 있었다. 다이애건 앨리가 탄생한 장소에서 안 가볼 수 없다는 생각에 우리도 웨이팅에 합류했다.
York 여행에도 해리포터 가게를 구경했었는데 파는 물건은 비슷했다. 해리 포터가 배경이 된 장소에는 눈독을 들이면서 막상 해리포터 굿즈를 사고 싶다는 구매욕은 하나도 없었다. 이렇게 온갖 마법사의 물건으로 채워진 가게 안에 들어가 잠깐 영화 속 주인공이 되었다는 기분을 느끼는 게 훨씬 즐겁다.
가게 2층에 작은 포토존이 있어 검은 등딱지 가방을 내려놓고 우아한 척 포즈를 잡았다. 사진을 확인했는데 에든버러라고 크게 적혀 있는 배경과 해리 포터의 시그널인 부엉이와 깃털 펜이 동시에 보여 기분이 좋았다.
그렇게 해리포터 가게 구경을 마친 후 Victoria Street을 빠져나왔다. Calton Hill에 가기 위해 꽤나 긴 여정을 떠났다. 다리를 건너 30분 정도 걸어야 했다. 다리를 건너면서 첫째 날에 아름다워 눈이 휘둥그레진 건물을 가까이서 마주하게 되었다. 아직까지도 무슨 건물인지 모른다는 게 함정이다.
가방과 계속 여정을 함께해서 어깨가 이때부터 욱신거렸다. 배도 고파오기 시작했다. Calton Hill이라는 표지판을 봤을 때 너무 반가웠다. 얼른 구경하고 밥을 먹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Hill'이라서 작은 언덕 정도로 생각했는데 오산이었다. 긴 계단이 눈앞에 펼쳐져 잠시 잘못 본 건가 생각했다.
'일단 올라가 보는 거야!'
속으로 외치고 힘차게 가파른 계단을 한 발 한 발 내디뎠다. 정상에 도달하고 별생각 없이 몇 발자국 걸었는데 탄성이 절로 나왔다. 에든버러의 지도가 눈앞에 펼쳐졌다. 그리고 지도의 끝에 새로운 시작이 보였다. 멀리서 파란색 평야, 바다가 하늘과 맞닿아 있었다. 바다를 볼 줄은 상상도 못했다. 눈부신 전망에 배고픔도, 피곤함도 전부 사라졌다.
H도 아니나 다를까 벅차오르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문득 함께 간 맨체스터 여행에서 푸른 들판이 깔린 공원이 생각났다. 자연경관을 보고 함께 좋아하고 동시에 감동받을 수 있는 친구가 있어 행복했다.
3일 동안 여행을 다니면서 가방 속에 폴라로이드 카메라를 계속 품고 있었다. 언제 찍을지 몰랐기 때문이다. 영국에 머무르는 동안 쓸 수 있는 필름은 총 20장이기에 예쁘게 나올 것 같은 느낌이 오는 순간에 찍어야 했다. 드디어 폴라로이드 카메라가 빛날 수 있는 순간이 온 것 같아 H에게 사진을 한 장 찍어주겠다고 말했다.
폴라로이드 카메라는 처음 초점을 잡을 때부터 촬영 버튼을 누르는 순간까지 신중해야 한다. 이미 누르는 순간 필름 하나가 사라지기에. H가 최고로 눈부신 순간에 담고 싶었다.
"눈 감으면 안 돼! 하나, 둘, 셋 할 테니깐 포즈 잡고 있어!"
착--
소리가 나면서 바로 필름이 나왔다. 사진이 선명해질 때까지 기다리는 게 또 필름 카메라의 매력이다. 사진 한 장을 찍기 위해 기다리는 시간은 핸드폰 카메라로 찍을 때 느낄 수 없는 설렘을 가져다준다. 사진이 보이기 시작할 때쯤 H가 소리를 질렀다.
"너무 마음에 드는데? 어머 어떡해! 너무 예뻐!"
바다와 에든버러 전망을 배경으로 H가 환하게 웃고 있는 모습이 선명하게 보였다. 동시에 필름이 주는 노스탤직한 흐릿함은 기분을 몽글몽글하게 만들어준다. 내가 폴라로이드 사진을 사랑하는 이유다. H는 연신 감탄했다. 들뜬 목소리로 너무 고맙고 사랑한다고 말해주는데 너무 뿌듯했다. 고마움을 온몸으로 표현해 주는 H가 고마웠다. 앞으로 더 많이 찍어주고 싶었다. 친구에게 특별한 추억을 선물해 주기 위해 계속 챙긴 카메라였는데, 하늘 위 태양빛처럼 이 날 빛을 발했다.
어제 못 갔던 Arthur's Seat가 보였다. 다음에 에든버러로 또 오라는 뜻으로 받아들이고 우리는 긴 감상 끝에 다시 내려갔다.
감동이 끝나니 배고픔이 다시 밀려왔다. 우리는 아까 건넜던 다리를 다시 가로질러 종종걸음으로 밥을 먹으러 갔다. 둘째 날 여행을 마치고 H가 찾은 식당으로, 스코틀랜드식 English Breakfast를 팔아 오게 되었다.
Breakfast 메뉴를 오후에 먹었지만 맛만 있으면 된 거 아니겠는가. 귀엽게 꽂힌 스코틀랜드 국기가 마음에 들었다. 오트밀 죽은 처음 먹어봤는데 너무 맛있어서 직접 만들어 먹고 싶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특별한 아침 식사를 오후에 먹게 되어 더욱 특별했다.
안개로 덮였던 에든버러 성이 푸른 하늘 아래 선명한 모습을 드러냈다. 여행하는 동안 두 가지 모습의 성을 감상할 수 있어 날씨에게 고마웠다.
H는 첫째 날부터 캐시미어 목도리를 계속 탐색하고 있었는데, 남은 시간 동안 H의 마음에 드는 목도리를 찾기로 했다.
나는 목도리를 살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H의 뒤를 쫓아다녔다. 두 군데까지 같이 돌아다니다가 차라리 H가 여유를 가지고 목도리를 사는 게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에든버러에서 떠나기 직전 서점을 들르기로 해서 먼저 그 서점에 가 있겠다고 말했다. 잠시 혼자 여행할 수 있는 시간이 생겼다.
바로 서점에 갈 생각이었는데 발걸음은 계속해서 다른 길로 샜다. 당시 파리에서 쓰고 다닐 베레모를 탐색 중이었기에 가게마다 베레모나 모자가 보이면 혹시나 하는 마음에 들어가서 구경했다. 안타깝게도 할아버지들이 좋아하시는 탐정 모자만 보였다. 귀엽고 앙증맞은 베레모는 결국 찾지 못했다.
가게 거리를 구경한 뒤, 공원길로 새서 맑은 날씨를 온몸으로 만끽했다. 마음에 드는 벤치에 앉아 책을 읽기도 했고, 인스타그램 스토리에 올릴 사진도 업로드했다. 정신을 차리니 파란 하늘이 어두워지고 있었다.
H에게서 카톡이 왔다.
- 나 Waterstones에 다 왔어! 너 어디 있어?
이미 목도리를 고르고 도착했다는 H의 소식에 서둘러 서점으로 달려갔다.
Waterstones는 영국의 체인 서점이다. 어디서나 갈 수 있는 체인점이 이곳에서 특별한 이유는 바로 3층 카페에서 에든버러 성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H가 잠시 공원 산책을 하겠다며 나간 사이에 성을 볼 수 있는 자리가 생겨 재빠르게 사수했다. 책을 읽으면서 성을 바라보는 낭만을 즐겼다.
H와 다시 만나 쉬면서 하늘 불이 꺼지고 서의 불이 켜지는 순간을 감상했다. 정말 떠날 때가 되었다.
그동안 영국 근교 여행을 다니면서 '더 있었으면 좋겠다'라고 생각이 든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이번 에든버러 여행을 마치면서 처음으로 여행지에 대한 아쉬움을 느꼈다. 후회하는 아쉬움이 아닌, 애정이 담긴 아쉬움이었다.
기숙사가 있는 셰필드에 도착하면 밤이기에 기차를 타기 전 샌드위치를 사기로 했다. 심지어 한번 갈아타야 해서 배를 든든히 채워야 했다. 신선한 야채를 한입 가득 넣고 싶어 햄과 야채가 든 샌드위치를 골랐다. 야채의 허기짐을 채워줄 카페라테까지 완벽했다. 갈 때도 기차에서 Greggs를 갔는데 올 때도 Greggs를 가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수미상관 낭만이지."
나와 H는 그렇게 수미상관 감성을 즐기며 이제는 마음의 고향이 된 셰필드로 떠났다.
여행을 사랑하지만 그래도 집은 집이다. 기숙사에 도착하자마자 전기장판부터 켰다. 따뜻한 전기장판 속에 몸을 띄우니 온몸이 노곤해진다. 마음껏 침대에서 쉴 수 있는 일요일을 기대하며 잠에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