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 여행 일지 둘째날
2024.9.19
Day 2
가끔 여행에서 아침에 눈을 뜨면 이런 생각을 한다.
'맞다. 나 지금 OO 이지?'
눈 뜨면 항상 보이는 내 방 천장. 익숙한 침대 감촉. 일상에 녹아든 시야가 여행에서는 전부 반전된다.
반전되었다는 사실에 다가오는 비현실적인 감각을 '나 지금 여기지?'라는 생각을 통해 현실적인 감각으로 바꾼다. 내면에서 미소가 지어진다. 과장 조금 보태서 말하면 판타지 세계 속에 들어왔다는 행복이랄까.
내가 지금 런던이라니! 얼굴은 졸리고 정신이 덜 깨서 행복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지만 마음은 설레었다. 그대로 캐리어로 갔다. 레깅스와 반팔 티셔츠를 주섬주섬 입었다. 바람막이 잠바를 하나 걸친 채 숙소 밖을 나섰다. 유럽으로 여행 오면 꼭 하고 싶었던 작은 버킷리스트. 낯선 여행지에서 러닝 하기다. 지금까지 러닝한 곳은 한강이나 집 근처에 있는 홍제천밖에 없었는데, 어느새 런던 거리를 활보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 이어폰을 꽂고 가볍게 달렸다. 낯설기만 한 동네, 도로, 건물이지만 발이 이끄는 대로 뛰었다. 한국에서는 거리에서 뛰는 사람을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데, 이곳에서는 누가 봐도 러너인 사람들이 나처럼 거리를 활보하고 있었다. 운동을 위해서 뛴 것도 있었지만, 새로운 풍경 속에서 거침없이 발을 내딛는 경험을 하고 싶어 아침에 뛰었던 것 같다.
민박집에서 조식을 준다고 들었지만, 이제 막 영국에 도착한 우리는 한식에 관심이 없었다. 어제 민박집 직원과 만났던 약속의 장소 'cafe'가 마침 잉글리시 브렉퍼스트 맛집이라서 그곳에서 아침을 먹고 여행을 시작하기로 했다.
3층을 내려오고 문을 딱 잠그고 나오는데, 화장실을 가고 싶었다. 다시 올라가려다가 어차피 마트도 들려야 해서 마트 근처에 있는 스타벅스 화장실을 이용하기로 했다. 그래서 식당에 가기 전 마트와 스타벅스에 들어갔다.
숙소에서 조금만 걸어가면 버스 정류장과 지하철역이 있었다. 어젯밤에는 어둡고 피곤해서 잘 보지 못했던 2층 빨간 버스가 한눈에 띄었다. 10살 때 영국에서 1년 살았던 적이 있어서 반가운 마음이 컸다. 13년 만에 친구를 다시 만난 기분이었다.
다른 나라의 스타벅스를 구경하는 재미가 있다. 프랜차이즈가 갖고 있는 일관성 속에서도 그 나라의 문화가 보이기 때문이다. 한국 스타벅스와 달리 샌드위치 종류가 훨씬 많았고, 한국에서는 안 보이던 머핀, 스콘 종류가 다양해서 자연스레 군침이 돌았다. H는 영국 스타벅스에서 꼭 Pumpkin Spice Latte를 마셔야 한다고, 이 음료를 마시기 위해 영국에 왔다고 말할 때 나는 옆에서 웃으면서 궁금해졌다. 펌킨 라떼. 상당히 유럽스럽다. 그동안은 해외에 가도 주어진 시간이 많지 않아 스타벅스를 자주 들르지 못했지만, 현지인 체험 특권을 가진 지금, 셰필드로 가서 스타벅스를 즐겨야겠다고 다짐했다.
숙소 앞에 있는 Vauxhall 역 바로 옆에 영국인들이 자주 가는 마트 중 하나인 Sainsbury's Local이 있었다. 한국으로 치면 홈플러스 익스프레스 같은 존재이다. 물을 사면서 셀프 계산대로 가는데 크리스피 크림 도넛을 한 칸에서 팔고 있었다. 스타벅스와 마찬가지로 볼 수 없는 스페셜 에디션이 있어서 신기한 마음, 그리고 바비를 좋아하는 친구도 떠올라 나중에 보내줘야지 하는 마음으로 사진을 한 장 찍었다. (하지만 결국 까먹고 보내지 못했다.)
돌고 돌아서 온 우리의 영국 첫 식사 장소.
[Kennington Lane Cafe
383 Kennington Ln, London SE11 5QY 영국]
오후까지는 브런치 메뉴를 팔고, 저녁에는 다른 사장님이 케밥 메뉴를 파는 가게로 보였다. 비행기에서 내리고 제대로 된 식사를 하지 않아서 굶주린 배를 움켜쥐고 들어갔다.
가게 안 분위기가 생생했다. 이제 막 하루를 시작한 산뜻한 분위기가 가게 안을 감돌았다. 여행객으로 보이는 손님은 우리밖에 없었다. '오오오' 감탄사만 속으로 내뱉으며 빈자리에 앉았다.
메뉴판을 살펴보다가 'Set Breakfast'가 딱 적당할 것 같다고 생각했다. 브런치 플레이트와 음료 세트였다. 'Tea or Coffee'라고 써져 있었는데, 런던 촌내기인 이때까지만 해도 '당연히 커피지!'하고 커피를 고른 나였다. 카운터에서 시키고 기다리다가 직원분이 머그잔에 가득 담긴 따뜻한 커피를 갖다주셨다. 고소하고 진한 커피를 한 모금 마시니, 몸이 따뜻해지면서 긴장이 탁 풀렸다.
드디어 나온 잉글리시 브렉퍼스트. 메뉴 아래 설명에 'fried slice'가 뭘까 궁금했는데, 토스트를 말하는 거였다. 그런데 이 토스트, 외모부터 범상치 않다. 일반 토스트와 달리 노랗고 빠삭해 보였다. 칼로 잘라서 계란과 함께 먹었는데 기대 이상으로 맛있었다. 버터가 식빵 결 사이에 촉촉하게 스며들어서 먹자마자 기분이 좋아졌다.
그리고 한쪽에 자리를 잡은 baked beans. 이 친구도 아까 빨간 버스처럼 구면인 친구다. 10살 때 영국 학교 급식을 먹으려고 앉았는데, 이 갈색 콩의 무리가 나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어린애가 봤을 때 절대 먹기 싫을 것처럼 생겼다. 하지만 보기와 다르게 맛은 상당히 내 취향이었다. Baked beans를 먹고 싶어서 급식이 기다려지는 정도였다. 한국에 와서 먹을 기회가 전혀 없었는데, 다시 맛볼 수 있어 냉큼 한 움큼 퍼먹었다. 처음 먹었을 때와 달리 추억의 맛까지 더해졌다. 베이컨은 사진에서 보이는 것보다 훨씬 컸다. 유럽 아니랄까봐, 햄과 소시지는 조금 짰지만 그래도 확실한 로컬 맛집이었다. 이곳에 산다면 주기적으로 찾아갔을 것이다. 몸과 마음이 따뜻해진 아침 식사였다.
우리의 첫 번째 목적지인 세인트폴 대성당을 가기 위해 지도를 열심히 보며 따라갔다. 숙소 바로 앞에 있는 Vauxhall 역으로 갔다. 문제가 생겼다. 어젯밤에 택시를 타고 숙소에 도착하는 바람에 지하철역이 어디인지 헷갈렸다. 도착하자마자 눈앞에 보이는 개찰구에 카드를 찍고 들어갔는데 이상함을 짐작했다. Underground, 즉 지하에서 타야 하는 대중교통인데, platform 표시만 있는 지상철밖에 안 보였다. 결국 다시 개찰구로 나가서야 깨달았다. 우리가 탈 뻔했던 건 기차였다. 기차 개찰구 바로 건너편에 지하철로 내려가는 계단이 있었다. 우리는 어이없는 웃음을 지으며 머리를 긁적인 채 지하철역으로 내려갔다.
투명하게 찰랑거리는 스크린도어만 보다가 뭉툭하게 철로만 놓인 영국의 지하철을 보니 다시 한번 런던에 온 것이 실감이 났다. 물먹은 듯한 도착 알림음이 없어도 기차가 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왼쪽 너머 어두컴컴한 터널에서 진동하며 끼익- 거리는 소리가 들려오기 때문이다.
지하철 안은 한국 지하철보다 좁고 좌석도 전부 천으로 되어있다. 나와 H는 이런 대화를 나눴다.
"기차가 최초로 만들어진 나라인데 기차 성장은 멈춰 있잖아?"
그래도 나는 영국 지하철이 마음에 들었다. 핸드폰 통신이 전혀 안 터지는 지하철 안은 시간이 멈춘 것처럼 보였다. 앞을 멍 때리고 있는 사람, 종이책을 펼치고 읽는 사람. 우스갯소리로 성장을 안 했다고 말했지만 타임슬립을 한 기분이 들었다. 아, 물론 갑자기 tresspasser 때문에 멈춰서 우리를 고생시킨 그때의 영국 지하철은 용서를 못 한다.
우리가 내린 곳은 Oxford Circus. 부지런히 출구로 발걸음을 옮겼다.
세인트폴 대성당 입장 티켓이 12시부터라서 시간이 1시간 정도 붕 떠 있었다. H와 런던 거리를 다니면서 눈에 보이는 가게에 무작위로 들어가 구경했다. 미지의 세계에 들어오게 되면 모든 풍경이 새롭고 신선한 콘텐츠로 보인다. 영국 마트에는 무엇을 파는지, 영국 옷 가게는 또 어떻게 다른지. 평소에 빵과 샌드위치를 좋아하는 터라 마트에 들어가면 다양한 종류의 샌드위치가 진열된 모습을 보고 눈을 반짝였다.
'나 어쩌면... 영국에서 살아도 되지 않을까.'
그런 쓸데없는 생각도 해봤다.
비건 제품 코너에 갔는데 한국 과자가 보여서 신기했다. 우리나라 음식과 간식도 이제 전 세계적으로 유명해졌다는 걸 알고는 있었지만, 영국에 와서 직접 보니 반가웠다. 특히 봉지 겉면에 쓰인 한국어를 보면 나도 모르게 어! 하게 된다. 이걸 집어가서 먹는 외국인이 있겠지, 상상도 해본다.
대성당 근처에 있는 거리를 탐색할 만큼 탐색했는데도 20분 정도 남았다. 조금 일찍 들어가도 되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성당으로 가기로 했다. 우리의 첫 영국 성당. 한국에서는 절대 볼 수 없는 외관에 입이 떡 벌어졌다.
가방에서 주섬주섬 프린트해둔 종이 티켓을 꺼냈다. 그런데 티켓 검표원이 우리 티켓을 보더니, 아직 시간이 안돼서 조금 더 기다렸다가 들어갈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역시, 안되는구나- 생각하며 성당 근처를 둘러보기로 했다.
성당 출입문을 돌아 뒤로 가자 높다란 조각상이 보였다. 조각상 뒤로는 꽤나 넓은 잔디밭이 있었는데, 아까 봤던 성당의 돔이 잘 나와서 사진을 몇 장 찍었다. 사실 나는 사진 찍히는 것을 좋아한다. 여행 가면 항상 친구들한테 사진을 부탁하는데, H한테 처음 부탁해봐서 괜히 나 자신이 어색했다. 괜히 포즈 잡고 찍기 부끄러웠달까. 반면 H는 멋지게 포즈를 취하며 자신의 매력을 거침없이 발산했다. 역시 H...라고 생각하며 싱긋 웃으며 핸드폰 촬영 버튼을 연신 눌러댔다.
드디어 들어갈 준비가 되었다! 입구부터 가슴이 웅장해졌다.
성당 안에 들어가자마자 자동으로 고개를 위로 젖힐 수밖에 없었다. 화려하면서도 근엄한 천장 벽화들이 정수리를 향해 쏘아대는 기분이었다. 어린 시절, 희미했던 유럽 여행의 기억 이후로 선명히 기억에 남는 충격이었다. 분명 화려한데, 산만하지 않았다. 어느 하나 허투루 있는 벽화와 문양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정제된 화려함이었다.
성당 한 편에서 오디오 가이드를 무료로 대여할 수 있었다. 어렸을 때는 이게 그렇게나 싫었다. 역사 공부는 학교에서도 충분한데, 여행까지 와서 공부하고 싶지 않았던 어린아이의 억울함 때문이었을까. 항상 열심히 듣고 있는 가족들을 보면 언제 나가냐고 달달 볶기 일쑤였다. 사실 작년 스위스 여행을 다니면서도 마지막에 갔던 취리히 성당이 제일 따분해서 이번에도 내가 금방 지루해지면 어떡하지 살짝 걱정이 되었다.
무슨 마법이 나한테 뿌려졌나. 오디오 가이드를 들으면서 성당을 걷는데, 나도 모르게 성당 속 이야기에 쏙 빠져든 것이다. 오히려 안 들었으면 '예쁘다-'하고 스쳐갔을 곳들을 가이드 덕분에 자세히 들여다보고 감상할 수 있었다. 이날 이후로 '성당이 거기서 거기지 뭐.'라는 나의 부끄러운 생각이 처참히 깨지게 되었다.
성당 중앙에 사람들이 모여들길래 우리도 무슨 행사를 하고 있나 해서 기웃거렸다. 그때, 신부로 보이는 사람이 제단 앞에 섰다! 알고 보니 곧 미사 시간이었다. 우리는 그냥 구경하고 있었을 뿐인데 운 좋게 미사를 볼 수 있게 되어 신이 났다. 직원이 건네주는 미사 순서표를 받으며 자리에 앉았다.
주위 사람들 눈치를 살펴 가며 일어났다가 앉기를 반복했던 것 같다. 순서표에 신부가 할 말씀들이 써져 있었지만, 그 외 추가적으로 말씀하신 게 훨씬 많고 라틴어로 읊어서 내용 자체를 알아들을 수는 없었다. 그래도 세인트폴 대성당에서 미사를 들을 수 있다는 경험 자체로 지루하지 않았다. 아, 뒤로 갈수록 '음... 이제 곧 끝나려나?' 생각은 들었다.
미사가 끝난 후, 이어서 못 본 성당 곳곳을 꼼꼼히 둘려봤다. 한 군데라도 놓치지 않고 싶었다.
1시간 반 정도 지났을까. 다 봤구나 싶을 때쯤 H와 자연스레 성당 안에서 마주쳤다. H도 성당에 (어쩌면 나보다도) 상당히 몰입하고 감동한 게 보였다. 성당 위쪽으로는 런던 전망을 볼 수 있다고 들어서 올라가 보기로 했다.
올라가기 전 들러본 기념품 숍에서 런던의 마스코트 인형, 패딩턴이 보였다. 빨간색이 영국에서는 참 낭만적으로 보이는 것 같다.
성당 위로 오르기 위해서 나선 모양의 계단을 계속해서 빙글 빙글 걸어가야 했다. 힘차게 발을 내딛다 보면 노력한 만큼의 보상이 따라온다.
이곳을 올라온 순간, 과거에서 현재로 돌아온 기분이었다. 런던 도시가 두 눈을 꽉 채웠다.
도로 위 빨간 2층 버스가 장난감처럼 윙- 지나가는데 너무 런던스러워서 사진을 찍은 뒤 곧바로 스토리에 'I'm at London!'이라고 올렸다. 기분이 딱 그랬다. '나 런던이야!' 외치고 싶은 기분. 바람은 얼마나 시원한지, 머리칼이 날카롭게 흩날릴 정도였다. 이곳에서 처음으로 H랑 셀카를 찍었다. (앞으로 H와 얼마나 많은 셀카를 남길지 모르는 채!) 너무 신이 나서 입이 귀에 걸린 우리 둘의 모습이 너무 웃기고 귀여웠다.
여기서 더 올라갈 수 있다길래 기대되는 마음으로 계단을 오르려고 했는데...
아까 걸어 올라갔던 계단의 20배로 좁은 계단 길이 눈앞에 펼쳐졌다. 게다가 구멍이 송송 뚫린 계단이었다. 평소에도 구멍 뚫린 계단만 보면 오금이 저리는데... 더 좁고 가파른 계단에 겁이 났다. 그래도 올라가서 전망을 누려야지, 다짐하며 발을 내디뎠는데... 몸이 본능적으로 올라가기를 거부했다. 다른 여행객들도 겁이 나는지 주저하거나 '이건 미쳤어!'라고 말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결국 나는 H만 보낸 채 아까 있던 전망에 머무르기로 했다. 기다리는 동안 한 바퀴 빙 둘러보면서 런던 시내 위를 날듯이 구경했다.
그래도 H 덕분에 성당 최고 높이에 있는 전망을 H가 찍은 사진을 통해서 구경할 수 있었다. H는 고소 공포증이 없는데도 너무 높아서 무서웠다며, 내가 안 가길 잘했다고 말했다. 휴, 다행이야. 어쩐지, 발이 다급하게 거부하더라고.
출구 표지판만 쫓다 보니 어느새 성당 밖으로 나오게 되었다. 아까 들어올 때와 달리 출구에서 바라본 성당 건물이 훨씬 거대하게 보였다.
아쉬워할 새도 없이 다음 여정을 떠났다. 우리의 목적지는 'Borough Market'이었다. 걷는 것에 개의치 않는 우리는 뚜벅뚜벅 걸어가며 런던과 어울리지 않는 따사로운 풍경을 구경했다.
아침에는 쌀쌀했는데, 해가 번쩍 뜬 낮에는 상당히 따뜻해서 겉옷을 벗을 수밖에 없었다.
마켓으로 가는 길에 다리를 하나 건너야 했는데 상당히 낯이 익었다. 그때 머릿속을 스쳐간 어린 시절 기억이 나면서 H에게 썰을 들려줬다. 10살, 영국 New Malden에서 1년 살던 당시, 언니랑 엄마랑 런던을 놀러 갔다. 그때 이 다리를 지나가다가 어린 집시 둘이 우리 모녀에게(정확히는 엄마에게) 말을 걸어왔고, 불쌍한 표정으로 부탁을 했다. 굶고 있는 가족들이 있는데, 한 번만 도와달라고. 어리고 순수했던(?) 나는 그들을 도와주고 싶은 마음에 엄마한테 주라고 등 떠밀었다. 언니도 나와 같은 마음이었는지 합세해서 엄마한테 주면 안 되냐고 말했다. 유일하게 엄마만이 의심스러운 마음을 가졌지만, 우리의 기세에 결국 돈을 그들에게 쥐여줬다. 나중에 찾아보니 우리가 건넌 다리에서 동정심을 이용해 돈을 떼어먹는 집시들이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엄마는 처음부터 의심이 갔는데 나랑 언니가 너무 단호하게 말해서 줄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부디 그때 그 아이들은 정말 진심이었기를 바라는 수밖에... 몇 기억 안 나는 10살 영국 생활 중 기억나는 에피소드여서 22살이 되어 다시 마주한 런던 다리는 친숙했다.
도착 표지판을 보자마자 배가 꼬르륵거렸다. 맛있는 먹거리들을 먹을 수 있다는 기쁨이 컸다.
한국에서는 느껴볼 수 없는 시장의 정겨움이었다. 하늘마저 푸르니 시장의 활기가 더 통통 튀었다.
벽돌집처럼 쌓아진 브라우니와 귀엽게 방긋거리는 진저브레드 쿠키들. 큼직하게 잘려 있는 치즈 조각들. 눈으로 맛볼 수 있는 즐거움이 시장의 매력 중 하나인 것 같다.
하지만 음식은 눈보다 입으로 직접 즐기는 게 최고인 법이다. 우리는 짧은 고민 끝에 고기 파이를 하나 사서 나눠 먹기로 했다. 손으로 조심조심 반으로 갈랐다. 안에는 녹진하고 진한 갈색의 소스가 큼직한 고깃덩어리와 함께 흘러나왔다. 어렸을 때는 파이에 고기가 들어 있는 게 문화 충격이었는데, 달달한 파이에서는 맛볼 수 없는 고기 파이만의 묵직함이 맛있었다. H와 함께 반쪽씩 파이를 나눠 먹는 순간을 셀카로도 찍었는데, 왜인지 모르게 그냥 그 순간이 재미있어서 피식 웃음이 났다.
우리의 눈길을 끈 다음 코스는 과일 음료수였다. 한 가지 과일로만 하지 않고 여러 가지 과일, 야채들을 섞어서 갈아놓는 가게여서 시도해 보고 싶었다. 작년에 대만에서 마셨던 아보카도 주스를 맛있게 먹었던 기억이 나서 아보카도가 들어간 그린 주스를 마셨다. H는 시트러스를 너무 사랑한다고 고백하며 레몬주스를 주문했다. 각자의 취향이 담긴 잔을 들며 찰칵! 찍었다.
Borough Market에서 유명한 음식들이 몇 개 있었기에 이번에는 음식을 정해놓고 찾기 시작했다. 바로 Oyster. 생굴이었다. H의 친한 언니가 강력하게 추천해줬다길래 우리는 곧바로 해산물이 있는 길목으로 들어섰다.
한국의 수산 시장과는 달리 해양 생물체들이 그림처럼 보였다. 한국의 해산물들은 팔딱팔딱 야생적인 그림체가 느껴진다면, 유럽은 한 편의 정물화 같달까... 같은 생선인데 전혀 다른 색깔을 띠는 게 신기했다.
사람들이 길게 줄 선 Oyster 가게를 보고 따라서 줄을 섰다. 줄은 빠르게 줄어들었고, 우리는 어떻게 시킬지 긴급회의를 진행했다.
굴 네 조각을 시키기로 결정! 그리고 동시에 직원에게 주문했다.
이렇게 생생한 굴 시식은 처음이었다. 바닷가에서 채굴하자마자 굴 껍데기를 까서 먹는 기분이 났다. H가 레몬즙을 뿌려주는데 군침이 돌았다. 포크로 굴을 찍어서 호로록 먹는데, 비린내 하나 없이 목 속으로 빠르게 미끄러져 내려갔다. 굴 향이 오히려 세지 않아서 좋았다. Borough Market을 다시 가게 된다면 이곳 Oyster는 다시 먹어보고 싶을 정도로 맛있었다.
무심코 마켓 거리를 지나가다가 H가 걸음을 멈췄다.
"저기 봐봐! 무슨 대회에서 1등 한 피쉬앤칩스래!"
영국이 갖고 있는 유일한(?) 자부심이 깃든 음식. 피시 앤 칩스. 그중에 으뜸이라는 광고 문구가 우리들의 눈을 사로잡았다. 그렇게 뜻밖의 첫 피시 앤 칩스를 버로우 마켓에서 하게 되었다. 길게 늘어진 줄을 보며 '이건 먹어야겠다!'는 확신이 들었다.
따끈따끈한 온열 조명 아래에 데워지고 있는 생선튀김들이 침을 꼴깍 삼키게 만들었다.
가게 옆으로 간이 식탁과 벤치가 좁게 배치되어 있었다. 하지만 이미 손님들로 가득 차 있어서 자리가 비워지기만을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벤치에 일행으로 보이는 두 명이 일어서자마자 우리들의 레이더에 탁 포착되었고, 잽싸게 앉았다. 다행히 우리들의 피시 앤 칩스는 따뜻했다.
솔직히 말해서 영국의 피시 앤 칩스는 비슷한 것 같다... (6개월 동안 영국에 있으면서 제일 맛있었던 피시 앤 칩스는 바닷가 근처 지역 스카버러에서 먹었던 피시 앤 칩스다.) 일단 맛없기가 힘들다고 생각한다. 생선을 튀겼으니 말이다! 감자튀김도 당연히 맛있었다! 창의적인 맛이 없어서 감흥이 없을 뿐이다. 이미 알고 있는 맛이었달까. 어떤 소스와 곁들여 먹느냐도 중요한 것 같다. 그래도 사람들이 바글거리는 분주함 속, 다른 손님들과 다닥다닥 벤치 위에 앉아 상자 하나를 들고 H와 피시 앤 칩스를 나눠 먹은 기억은 창의적인 순간이 아닐까. 그래서 지금까지도 생생히 머릿속에서 재생되는 게 아닐까 싶다.
마켓에서 마지막으로 먹었던 음식은 초콜릿 딸기 퐁듀였다. SNS에서 한 번쯤 자랑하고 싶은 탐스러운 생김새였다. 이번에는 한 컵씩 사이좋게 샀다. 버로우 마켓의 대표적인 디저트라고 한다. 역시 맛없을 수 없는 달콤한 후식이었다. 마지막까지 완벽하게 즐긴 버로우 마켓. 다음에 오게 된다면 이곳에서 빵이나 식재료를 사고 싶다.
아쉬움 없이 마켓을 배웅하고 뚜벅뚜벅 여행을 이어갔다. 16분 정도 도보 거리에 다음 목적지가 있었다.
작은 터널을 지나자 템스강이 눈앞에 펼쳐졌고, 대각선 너머로 타워브리지가 보였다! 사진으로만 보던 하늘색 테두리의 다리를 보면서 비현실적인 감각과 런던에 왔다는 현실적인 실감이 동시에 들었다.
걸음을 옮겨갈수록 타워브리지가 더 크게 와닿았다. 가는 길에 잔디가 넓게 깔린 공간이 있었는데, 그곳에서 타워 브리지를 감상했다. 우리와 같은 여행객들, 현지인들이 한군데 모여 있었다. 머리 뒤 너머로는 기타를 치며 노래하는 가수가 들려왔다. 영국에 어울리지 않게 맑은 날씨까지. 모든 게 적당해서 아름답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타워브리지에 도착해서야 나와 H는 타워 브리지 위를 방문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티켓 부스를 겨우 찾아 직원에게 구매할 수 있냐고 물었지만, 이미 마감 시간이라며 더 이상 입장할 수 없다는 답변이 들려왔다. 교환 생활 동안 우리는 런던에 무조건 한 번은 더 올 마음을 먹었기에, 그때는 기필코 미리 예약해서 타워 브리지를 올라가기로 약속했다.
타워 브리지를 올라갈 수는 없지만, 건널 수는 있었다. 회색빛 하나 없는 하늘 아래 굳건히 자리 잡은 하늘색 타워브리지가 예뻤다.
사진을 실컷 찍고 다리를 벗어나자마자 의문스러운 일이 발생했다. 다리 문이 양옆으로 닫히는 것이다! 다리를 건너려던 사람들과 차가 일제히 멈췄다. 아직까지도 왜 닫혔는지 모르겠지만, 아마 금방 다시 열리지 않았을까 싶다. 물음표만 머리 위로 띄운 채 우리는 앞으로 나아갔다.
걸어가는 길에 'Tower of London'을 멀리서 구경했다. 어렸을 때 엄마와 손잡고 런던 타워 안을 구경했던 기억이 났다. 1500년대, 한때 영국의 궁전이었던 런던 타워는 외적 침입을 막기 위한 든든한 요새였다고 한다. 하지만 나에게 있어 이곳은 아름다운 성보다는, 무시무시한 감옥으로 기억에 강하게 남았다. 영국에 살았던 당시, 학교 역사 시간에 배웠던 앤 불린 처형 현장이 이곳 런던 타워라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저 성곽 아래 지하 깊숙이 지하 감옥에서 여왕이 죽었을 걸 생각하면 멀리서 보기만 해도 등이 서늘해지는 느낌이 든다.
오후에 버로우 마켓에서 음식을 폭풍 흡입했던 탓일까. 영국에 도착하고 나서 소화가 계속 잘 안됐던 탓일까. 걷는데 속이 안 좋아서 이거 큰일 났다 싶었다. H에게 말할까 말까 고민하다가 도저히 빨리 걸을 수가 없어 결국 솔직하게 컨디션이 조금 안 좋다는 김빠지는 소식을 털어놓았다. 다행히 H는 그런 나를 이해하면서 천천히 걷자고 말했다. 저녁은 숙소 근처에서 간단히 먹기로 했다.
버스를 타기 위해 정류소 근처로 향하던 중, 기이한 도시 풍경을 목격했다. 슈트를 쫙 빼입은 직장인들이 군집을 이루며 호프집 앞에서 맥주잔을 들고 서 있는 것이다!
"해피아워다!"
H가 말했다. 'Happy Hour'. 영국 직장인들의 문화 중 하나로, 퇴근하고 나면 집에 바로 가기 전에 동료들과 맥주 한 잔을 걸친다고 한다. 회식이라고 하기에는 간소하고, 우리나라 치맥처럼 직장의 스트레스를 푼다기에는 사무적인 성격도 섞인 것이,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직장인의 일상이었다. 하루 종일 관광객만 보다가 검은 양복 슈트와 하얀 와이셔츠를 속에 입은 영국인들을 보면서 영화 속 한 장면에 툭 떨어진 기분이 들었다. H는 우리도 그 틈에 들어가자고 제안했다. 배가 이미 불러있던 터라 생맥주를 마실 여력은 안됐지만, 지금이 아니면 '해피아워'라는 영화의 한 장면에 함께하지 못할 것 같아 바로 좋다고 말했다.
무심결에 들어간 호프집 안은 직장인들로 바글거렸다. 한국에서는 항상 술이 있으면 안주가 기본으로 곁들여지는데, 이곳 사람들은 오직 맥주 한 잔으로 풍류를 즐기는 게 신기했다. 오고 가는 대화가 안주로 충분한 듯 보였다.
다양하게 깔린 맥주 라인업에 정신을 못 차렸는데, H가 직원에게 맥주를 추천해달라고 말했다. 직원은 London Pride가 잘 나간다고 말하며, 우리는 반사적으로 그걸 달라고 주문했다.
맥주 이름에 맞춰서 맥주잔에도 'London Pride' 새겨져 있었다. 영국이 맥주에 얼마나 진심인지 확인할 수 있는 디테일 중 하나인 것 같다. 그렇게 커다란 맥주잔을 들고 우리는 슬쩍 영화 한 장면에 녹아들었다. 비록 영국에서 일하는 직장인은 아니었지만 가까이서 일상을 엿볼 수 있었다는 경험 자체로 직장인이 된 것만 같았다! H와 여기서 일한다면 어떨까? 상상하면서 대화를 나눴던 기억이 난다.
아쉽게도 맥주는 두 모금 정도 마시고 멈출 수밖에 없었다. 더 이상 위장이 받아주지를 않았다. 맥주 맛이 맛있었기에 더 아쉬웠었다. 런던 프라이드. 꼭 기억해서 언젠가 다시 제대로 마실 테다.
2층 빨간 버스에 탑승해서 다시 숙소가 있는 Vauxhall 역으로 향했다. 집으로 향하는 순간까지도 설레는 관광이었다. 영국 여행 시작 이후로 빨간 버스를 드디어 처음 타봤기 때문이다.
"맨 앞자리도 나중에 앉아볼 수 있으면 좋겠다."
우리는 입을 모아 말했다. 과연 이루어질 수 있을지!
음식에 지쳐버린 나는... 이날 저녁으로 무엇을 먹었는지 기억이 안 난다.
결론은 행복했다! 그리고 여행 매일매일이 행복할 것 같은 예감이 런던 여행 둘째 날 끝에 강하게 들었다. 해가 떠오르는 걸 보며 런던 거리를 달렸는데, 48시간 같은 24시간이 지나 템스강 위로 지평선에서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새로운 경험의 연속이었던 하루는 길게 느껴졌고, 더 길면 좋겠다는 아쉬움을 자아냈다.
다행히 우리에게는 내일의 런던 해가 또 떠오를 테니! 여행의 노곤노곤한 흔적이 묻은 몸을 민박집 다락방, 매트리스 위로 전부 흘러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