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 여행 일지, 셋째날
2024.9.20.
Day3
이날 아침에도 눈을 뜨자마자 주섬주섬 레깅스와 반팔티, 그리고 바람막이 잠바를 걸치며 뚜벅뚜벅 밖을 나섰다. 전날처럼 도로를 가로질러 러닝을 하려다가 구글 지도를 보니 공원으로 보이는 초록색 구역이 눈에 띄었다. 이왕 뛰는 거 런던의 한 아무개 공원에서 뛰면 낭만적일 것 같다는 생각으로 공원을 몇 바퀴 뛰었다. 몇 바퀴씩이나 뛴 이유는 공원이 작기도 했고, 러너들을 위한 공원이라기보다 잠깐 들러서 앉았다 쉬는 공원이라서 성큼성큼 발을 내딛기가 어려웠다. 오히려 공원보다 일상적인 보도 위에서 달리는 러너들이 더 많이 보였다.
얼만큼 많이 뛰냐보다는 그저 런던의 서늘한 아침 공기를 맞으며 낯선 분위기를 즐기는 게 목적이었기 때문에 30분 정도 짧게 걸었다 뛰었다를 반복하며 민박집으로 돌아갔다. 항상 러닝은 나가서 다리를 헛둘헛둘 움직였다는 시작에 의의를 두는 편이다.
또 다른 여행이 시작됐다. 버킹엄 궁전으로 떠나기 전, H와 함께 Vauxhall 역 앞에 있는 Sainsbury's local market에서 샌드위치와 에그타르트를 사 갔다. 11시에 궁전에서 근위병 교대식이 예정되어 있었는데, 궁전 근처에 있는 공원에서 간단하게 아침을 먹기로 했다.
셋째 날 런던의 아침은 영국의 정석을 보여줬다. 구름들은 빈틈없이 하늘을 가득 채워 파란색도, 회색도 아닌 애매한 색깔을 띠었고, 쌀쌀한 바람은 바닥에 떨어진 낙엽을 쓸어갔다.
날씨 덕분이었을까. Green Park 지하철역에 내려 걷다가 공원 입구 바로 옆에서 테이크아웃 전문 커피 가게가 눈에 띄었다. 우리의 간이 피크닉에 행복을 더해줄 따뜻한 커피를 한 잔씩 샀다.
근위병 교대식 전까지 1시간 정도가 남아있어 여유로운 마음을 갖고 아침을 먹었다. 한국에서 상상할 수 없는 공원의 풍경이었다. 유럽에 오면 그 어떤 유명한 관광지 탐방보다 이런 공원에서 여유를 즐기는 내 모습을 어렴풋이 상상해 봤었다.
넓은 초록색 잔디 위에 드문드문 놓여 있는 벤치와 나무 테이블. 무심하게 툭 샌드위치와 커피를 놓고 먹는 우리들. 물론 마음속은 들떠 있었지만. 아침이라 껌뻑껌뻑 둔해진 몸의 감각을 노곤하게 깨울 수 있었다.
아침을 다 먹어갈 때쯤, 공원길을 분주히 달려가는 사람들이 많이 보였다. 정확히는 관광객들이었다. 가만 생각을 해보니 11시 맞춰서 궁전을 가야 할 게 아니라, 30분 정도 일찍 가서 대기하고 있어야 가까이에서 볼 수 있었다. 조금 전의 여유는 사라지고, 급하게 쓰레기를 치우며 뛰어가는 관광객들을 따라갔다.
버킹엄 궁전에 다다를수록 인파가 커졌다. 횡단보도에는 경찰들이 교통을 통제하고 있었다. 횡단보도를 건너면 바로 궁전이었기에 최대한 가까이 가서 볼 열정을 갖고 준비하고 있었다. 그때, 경찰이 오늘 근위병 교대식을 안 한다는 제스처를 취하고 있었고, 관광객들은 실망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이다.
혹시 몰라 궁전 입구에 가까이 갔다. 궁전 앞에서 굳건히 서서 대기하고 있어야 할 사람들이 등을 돌리며 앞을 떠났다.
창살 틈으로 보이는 오프라인 공지사항이었다.
'오늘 근위병 교대식이 취소되었습니다.'
그래도 아주 멀리서 근위병이 각목처럼 서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비록 근위병 무리들을 볼 수 없어지만, 영국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 중 한 장을 영접할 수 있어서 좋았다. 조금 허탈하기는 했지만, 6개월 동안 영국에 있으면서 런던은 반드시 또 올 장소였기에, 곧 다가올 다음을 기약하며 우리도 궁전 입구를 등지고 걸어갔다.
어쨌거나 우리는 지금 버킹엄 궁전 앞이었다! 영국 왕실의 관저라니. 외관만으로 옛날 영국 귀족들과 왕족들이 드나들었을 모습이 상상이 갔다. 그리고 동시에 어렸을 때 왔던 기억이 희미하지만 떠올랐다. 어릴 때 누볐던 런던 관광지들은 부모님이 가자고 해서 찍고 가는 장소였는데, 어른이 되어서 직접 내 발로 찾아가니 뿌듯함과 기쁨이 배로 찾아오는 것 같다.
궁전 바로 앞에 있던 조각상. 버킹엄 궁전의 외관도 그렇고, 전체적으로 영국 특유의 차분한 벽돌 사이 이런 황금빛 장식들이 왕실 분위기를 강조해 주는 것 같았다.
아무래도 버킹엄 궁전에 대한 애정이 다른 곳들에 비해 작았나 보다. 막연하게 궁전 안으로 들어갈 수 있지 않을까 해서 매표소로 갔는데, 이미 예약이 마감되었다고 한다. 들어갈 수 있다고 하더라도 인터넷에 찾아보니 티켓값이 사악했다. 역시 궁전이라 이건가. 버킹엄 궁전은 평소에는 일반인들의 출입을 금한다고 한다. 다만 국왕이 휴가를 떠나는 7~9월 동안에는 관람이 가능하다. 지금 딱 9월인데. 이렇게 들어가기 힘든 관광지인 줄 몰랐다.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았지만 실망스럽지는 않았다. 못 보면 어떤가.
궁전 주위에 있는 기념품 가게들을 구경하며 붕 뜬 시간을 자연스레 채웠다.
기념품 가게도 전부 비슷해서 질려갈 때쯤, 길 한복판에 놓인 빨간 전화 부스를 발견했다. 포착하고 싶었던 런던의 이미지 중 하나! 새빨간 공중전화박스다. 이제는 전화의 기능보다 관광객들의 사진 찍기용으로 역할이 바뀌었지만, 그래서 더더욱 전화박스가 없어지지 않았으면 한다.
우중충하기로 유명한 런던의 상징색이 빨간색이라니. 그런데 빨간색은 그 어떤 도시보다도 런던이 가장 잘 어울린다. 태생이 어두운 아이가 밝아지고 싶어서 빨간색 옷만 입다가 이제 빨간색 하면 그 아이가 떠오르는 모습 같달까. 전화박스를 보자마자 나와 H는 눈을 반짝거리며 화보를 찍기로 결심했다. 우리 앞에 먼저 멋진 포스로 사진을 찍고 있는 관광객들이 보여서 그들이 끝나고 자연스럽게 들어갈 타이밍을 기다렸다.
그 어떤 장소보다 신명 나게 사진을 찍었다. 지금이 아니면 이 빨간색 전화박스 앞에서 찍을 일이 없을 사람들처럼 서로가 최선을 다해서 사진을 찍어줬다. 사람들이 많이 지나다니는 길 한복판에서 찍어서 어색했지만, 그래도 인증샷은 언제나 뿌듯한 법이니까! 조금 부끄러운 나와 달리 H는 멋들어지게 팔과 다리를 쭉쭉 뻗으며 포즈를 잡아서 그 대비가 재미있었다.
H가 영국에 오면 꼭 가보고 싶었던 차 가게가 있다고 말해서 방문한 곳. Whittard of Chelsea다. 교환 생활을 하면서 정말 애정하던 티 브랜드 중 하나이다. 원래는 Covent Garden 지점을 가려고 했지만 마침 근처에 있길래 들렀다.
차를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가게 내부만 구경하려고 했는데, 차에 적힌 다양한 이름과 향이 좋아서 자연스레 시음을 했다. 기존에 차라고 하면 쓰고 텁텁한 맛만 떠올라서 피했는데, 이곳에서 시음해 본 차들은 적당히 달면서 상큼했다. 나에게 맞는 차가 있을 수도 있구나, 생각이 들었지만 아직까지 티백을 두고서 마실 자신은 없었다. Whittard는 체인점이었기 때문에 나중에 차에 대한 입덕부정기를 지나고 나면 사야겠다는 마음으로 가장 마음에 들었던 차를 찍어갔다. (이후 셰필드에서 한국인들에게 전부 이 브랜드를 추천하며 나 역시 팬이 되었다는 건 안 비밀이다.)
가게를 나와서 걷다가 어느 순간 깨달았다. 아침과 달리 하늘이 맑게 개었다! 마침 산책하기 딱 좋은 공원이 우리를 반기고 있었다.
그렇게 자연스레 공원 산책로를 따라 걸으며 H와 다가올 셰필드 학교생활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조각상을 보면서 서로가 들을 수업 시간표를 공유했던 기억이 아직도 난다. 시간표를 공유한 이유는 평일에 언제 시간을 내서 여행을 다닐 수 있을까에 대한 행복한 고민 때문이었다.
- 수업이 일찍 끝나는 날에는 에든버러로 떠나는 거야!
- 방학 시즌에는 유럽을 갔다 올까?
모든 게 자연스러웠다. 서로의 부푼 마음을 들으면서 천천히 걷게 된 발걸음도, 어느 순간 맑아진 날씨도, 의식의 흐름에 따라 주고받는 대화들도.
그렇게 분수대 앞에 동그랗게 놓인 벤치들 중 하나를 골라 앉았다. 높이 떠오른 해, 런던 낮의 정점을 만끽하며 잠시 머리를 식혔다.
2시에 예약해놓은 내셔널 갤러리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Hyde Park에서 버스를 타고 갤러리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지도를 보며 갤러리를 찾아갔는데, 방향 키가 엉뚱한 곳으로 우리를 안내해 줬다. 갤러리 입구가 아닌 갤러리 건물의 뒤쪽으로 도착했다. 길을 헤매던 와중 있어서는 안 될 가게를 마주한 것처럼 깜짝 놀랐다. 한국의 컴포즈 커피가 한적한 런던 거리에 자리하고 있었다. 주말이면 슬리퍼를 질질 끌고 컴포즈 커피에 가서 커다란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사 마시곤 했는데, 벌써 그게 그리워진 추억이 되었다는 게 신기했다. 추억인 동시에 되돌아갈 일상이기도 했지만. 반가운 마음에 한 장 찍었다.
그렇게 빙빙 돌다가 겨우 입구를 발견했다. 예약한 2시보다 몇 분 정도 늦었지만 별문제 없이 들어갈 수 있었다. 내셔널 갤러리도 어렸을 적 구경했던 기억이 난다. 그때는 그림 보는 게 뭐가 재미있다고 심심해서 답답한 마음을 꾹꾹 누르며 엄마를 따라다녔던 기억만 난다. 작년 가족들과 스위스 여행을 갔을 때도 가장 재미없었던 하루가 취리히에서 성당을 보고 미술관을 봤던 날이었는데, 내셔널 갤러리에서 무료한 시간을 보내지는 않을까 살짝 걱정이 됐다.
H와 처음 가는 갤러리. 워낙 넓은 공간이었기 때문에 시간을 정해두고 각자 감상한 다음 0층에서 만나기로 했다. 이 루틴은 앞으로 가게 될 대부분의 미술관과 박물관에서 이어졌다.
내 걱정은 완전히 예상을 빗나갔다. 화려한 갤러리 건물 안에서 혼자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며 그림들을 구경했는데, 그 모든 리듬이 힐링이 되었다. 그림에 대한 지식도, 화가에 대한 지식도 전혀 없는 바보 일반인이지만, 슥슥 그림들을 지나치면서 나만의 감상에 젖어드는 시간이 평온했다. 고개는 벽 쪽으로, 발걸음은 앞으로. 그러다가 발이 고개와 평행해지는 시간이 찾아오기도 했다. 마음에 드는 작품을 발견했을 때다. 좋아하는 그림은 이유가 없었다. 그냥 눈이 끌려서가 다였다. 전에는 모든 미술 작품들이 비슷하다고 생각해서 재미없었다. 사람마다 가진 그림체가 다르다는 사실을 내 따분함을 핑계로 인정하지 못했다. 이날 이후로 그림은 지문과도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늘 아래 같은 그림체는 없는 것이고, 그걸 비교하고 새롭게 감상하는 재미가 있었다. 어떤 기법을 사용했는지, 화가의 의도는 무엇이었는지 간파하는 힘은 없지만, 새로운 그림을 감상하는 재미만으로 갤러리와 친해지게 되었다.
2시간 정도 내셔널 갤러리를 거닐었던 것 같다. 나는 H와 다시 만났고, 그제야 우리가 점심을 놓쳤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분명 아침으로 먹었던 샌드위치 말고 먹은 게 없었는데 배가 꺼지지 않았다. 그래도 아직 열정적으로 향할 여정이 많이 남았기에 갤러리 식당에서 간단하게 배를 채우기로 했다. 다만... 가격은 전혀 간단하지 않았다. 샐러드에 구운 연어 하나 올렸을 뿐인데 n만 원대로 나왔던 기억이 난다. 어쩐지 식당 안에 어르신들이 많더니...! 그래도 맛있게 먹었다.
내셔널 갤러리 앞에는 런던의 유명한 광장, 트래펄가 광장이 자리하고 있다. 나에게는 어렸을 때 기억이 선명하게 나는 광장이기도 하다. 영국에 살았을 당시가 2011년이었기에 2012 런던 올림픽을 1년 앞두고 광장 앞에서 커다란 카운트다운 타이머가 있었던 게 기억이 난다. 그리고 그 어린아이의 시점에 이 기다란 조각상이 얼마나 커 보였을까. 원래 드넓은 돌바닥이 깔린 광장이 펼쳐져야 하는데, 슬프게도 이날 광장에서 공연 행사가 있는지 펜스로 광장을 전부 막아놨다. 추억을 다시 느끼고 싶었는데 제대로 볼 수가 없어서 너무 아쉬웠다. 런던은 정말이지 변수가 많은 도시인 것 같다.
다음 행선지인 빅벤을 보기 위해 시내를 쭉 걸어갔다. 가는 길에 한국 대사관을 발견했다. 반가운 태극기가 작게 휘날리고 있었다.
영국에 오고 들른 첫 서점이었다. 다음 날 유명한 런던 서점을 방문하기 전 워밍업이었달까. 사실은 그냥 큰 서점이 눈에 띄길래 책 냄새에 이끌러 들어온 곳이다. (그래서 서점 이름은 기억이 안 난다.)
문학 강국이라 그런가, 서점에 다양한 카테고리가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LGBTQ 장르를 한군데 모아둔 공간이 있다는 게 신기했다. 단순히 BL 만화 모음집이 아닌, LGBTQ 소재를 다룬 책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어렸을 때 이런 소설을 절대로 쉽게 접할 수 없었는데, 지금 아이들은 친숙하게 접할 수 있겠구나. 최근에 재미있게 봤던 넷플릭스 영국 드라마 <하트스토퍼> 원작도 대문짝만하게 전시하고 있었다.
서점 안에서 유일하게 찍은 사진. <하이큐> 만화의 영어 버전이었다. 제일 좋아하고 여러 번 본 애니 중 하나가 <하이큐>이기도 하고, 여태까지 일본어나 한국어로 된 만화만 보다가 오히려 영어로 된 만화책을 접하니 낯설게 느껴져 사진을 찍었던 것 같다.
그렇게 또 어슬렁 어슬렁 런던의 오후 거리를 걸어 다녔다. 목적지는 정해져 있었지만, 가는 과정은 자유로웠다. 시간이 오래 걸려도, 중간에 다른 길로 새도 되는 자유여행의 묘미였다.
드디어 빅벤의 모습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12년 만에 다시 마주한 빅벤. 2017년에 빅벤이 보수 공사를 했다고 하는데, 그래서인지 오히려 더 반짝거리고 새것처럼 보였다. 내 기억 속 빅벤은 애니메이션 <크리스마스의 악몽>에 나올 것 같은 어둡고 신비로운 분위기의 시계탑이었는데, 지금은 황금빛을 띄는 신비로운 시계탑으로 바뀌었다.
아니나 다를까. 빅벤 앞 도로에는 인증 사진을 남기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관광객들로 붐볐다. 우리도 질 수 없다, 포토 스팟에 사람이 비는 타이밍을 매의 눈으로 잡았다. 찍어주는 사람은 상대의 핸드폰을 넘겨받고, 동시에 사진 모델은 얼른 포즈를 잡아본다. 마치 길 가다 빅벤이 보여서 발랄하게, 또는 무심하게 사진을 찍는 게 인증 사진의 포인트다. 나중에 23살의 내가 런던에 왔음을 회상해 줄 사진이 될 것이다.
점점 해가 지고 있었다. 빅벤에서 더 걸으면 런던아이를 볼 수 있었다. 어렸을 때 런던아이를 딱 한 번 타봤는데, 기억이 흐릿해서 다시 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동시에 주위에서 굳이 런던아이를 탈 필요가 없다는 말도 들어 타야 하나 고민도 들었다. 그래도 런던의 상징들을 전부 뽕 뽑아야 하지 않을까라는 생각 끝에 우리는 런던 아이를 타기로 결심했다. 매표소에 들르기 전 템스강 너머로 보이는 빅벤과 노을 진 풍경의 조화가 예뻐서 사진을 찍었다.
그런데... 이날은 정말 변수가 넘치는 날이었다. 런던 아이 매표소에 들어가서 키오스크로 티켓을 구매하려고 보니 품절인 것이다. 심지어 9월이라서 오후 6시가 마지막 탐승 시간이었다. 분명 내 기억 속에 런던 아이는 밤에도 움직였던 것 같은데, 이렇게 빨리 마감할 줄 몰랐다. 이럴 줄 알았으면 한국에서 미리 표를 사둘 걸 그랬나 후회도 들었다.
망연자실하며 반 체념한 표정을 서로 지으며 그렇게 우리는 런던 아이를 놓아주기로 했다.
그때! H가 키오스크를 두드리며 외쳤다.
- 지금 자리가 다시 생겼어!
다시 보니 눌리지 않았던 마지막 시간대가 다시 터치할 수 있게 선명해졌다. 5만 원이 넘는 가격이었지만 그런 걸 따질 시간이 없었다. 또 품절이 뜨기 전 재빨리 각자 티켓을 결제했다. (지금 다시 생각해도 관람차 하나에 5만 원은 정말 사악한 가격이라는 생각이 든다...^!^)
기적적으로 얻은 티켓이라 그런지 미리 예약해서 들어갔던 그 어떤 관광지보다 우리는 들떠 있었다. 럭키비키를 연신 외치며 행운인이 된 순간을 만끽했다. 당당하게 티켓을 거머쥐고 대기 줄에 섰다. 곧바로 탑승할 주 알았는데 40분은 대기했었던 것 같다. 런던아이, 커다란 관람차 정도로만 생각했는데 내 생각보다 훨씬 인기 많은 친구였구나.
우리는 점점 앞을 향해 진전했고, 그럴수록 기대감에 부풀어 올랐다. 제일 무난하게 구경할 줄 알았던 런던아이였는데, 감정의 다이내믹함을 느끼게 해줄 줄은 꿈에도 몰랐다.
줄이 줄어들수록 대기 줄에 남아있는 사람들은 적어졌다. 마치 우리가 마지막 팀인 것처럼 느껴졌다. 그 예감은 맞아떨어졌다. 정말 런던아이 막차를 타게 된 것이다! 나와 H, 그리고 세 팀 정도가 함께 런던아이 마지막 시간대에, 마지막 탑승에 올라섰다. 내부는 내 생각보다 5배 정도 공간이 넓었다. 멀리서 봤을 때는 작은 캡슐 약처럼 보였는데, 10명이 조금 넘게 탔는데도 충분히 돌아다니고도 남았다.
의외였던 또 다른 점은, 런던아이는 굉장히, 아주 천천히 움직였다. 멀리서 보면 작아 보였고, 꽤 속도감 있게 움직인다고 생각했는데, 역시 직접 경험해 봐야 파악하는 법이다. 천천히 움직인 이유는 풍경을 느긋하게 감상하기 위함이었음을 이내 알아차렸다. 처음에는 탑승했다는 행위 자체에 신났다면, 점점 올라가면서 보이는 런던의 전경에 감동을 받았다. 무엇보다 일몰에 맞춰 하루의 마지막 런던아이 안에서 주황빛 풍경 지도를 볼 수 있다는 사실이 너무 뿌듯했다.
핸드폰 카메라를 들고 우리는 서로를 찍어주기도, 셀카를 찍기도, 노을이 반짝이는 풍경을 있는 그대로 찍기도 했다. 물론 눈에 꼭꼭 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약간의 좌충우돌과 극적인 감정이 오갔기에 더욱 잊을 수 없었던 런던 아이였다. 30분 동안 주황빛 태양 아래 템스강과 빅벤을 질리도록 본 희귀한 시간이었다.
런던 아이에 내리자마자 해는 지평선 너머로 자취를 조금씩 감췄다. 분명 파란 하늘 아래 빅벤에서 포즈를 잡았는데, 어느새 퇴근하는 사람들과 회색빛 하늘로 빅벤은 저녁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해는 뚝 떨어졌고, 스위치를 아래로 내린 듯 하늘은 깜깜해졌다. 마지막으로 야경을 즐기기 위해 런던 아이를 멀리서 볼 수 있는 장소로 거침없이 걸어갔다. 이날 정말 무지막지하게 걸어서 발바닥이 아렸다. 그래도 뚜벅이에 지지 않는 우리는 형형색으로 은은하게 빛나는 런던 아이의 밤 모습을 감상할 수 있었다. 나중에 알려주기를, H는 야경 거리를 함께 걸으면서 앞으로도 나와의 여행이 즐거울 것 같다는 예감(됐다! 이거다!)이 들었다고 한다. 신기한 건, 나도 이 순간에 H와 여행 스타일이 참 잘 맞는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작은 순간들에 기뻐하고, 계획이 틀어지면 무던하게 넘어가고, 행운을 속속들이 찾아내는 공통점이 이 여행을 편안하게 만들고 있는지도 모르겠다'라고 말이다.
그래도 둘 다 인간인지라 2만 보 걸은 대가로 몸이 흘러내리기 일보 직전이었다. 숙소 아래 운영하던 잉글리시 브렉퍼스트 식당이 저녁이 되면 케밥 음식점으로 바뀐다는 사실을 둘째 날 아침 식사를 하면서 깨달았다. 그렇게 우리는 셋째 날 저녁으로 이 케밥 음식점에 들어갔다. 손님은 우리밖에 없었고, 터키 현지인으로 보이는(아닐 수도 있지만) 사람들이 주문을 받았다. 그렇게 아직까지도 회자되는 케밥 사건이 여기서 발생했다.
메뉴판을 보고 가격이 생각보다 나가서 의아했지만, 어쨌든 1인 1메뉴를 시키면 되겠거니 생각하고 각자 먹고 싶은 케밥 메뉴를 골랐다. 노곤해진 몸을 의자에 기대며 기다리던 중, 종업원이 다시 오더니 우리가 시킨 메뉴를 재차 확인했다. 소통이 잘 안됐나 싶어서 확신에 찬 눈빛으로 맞다고 전했다. 그런데 또다시 오면서 메뉴를 확인하는 것이다. 나와 H는 마주 보며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럼에도 별생각은 없었다. 그저 종업원이 우리 말을 처음에 헷갈렸나 보다 가볍게 생각했을 뿐이다.
주방에서 종업원이 들고 온 접시를 보고서 모든 이상한 퍼즐 조각들이 맞춰졌다. 접시 크기... 그리고 음식의 양... 전부 거대했다. 크다는 말로는 부족한 충격이었다. 사진에서 보이는 것보다 3배는 더 컸다. 여자 두 명이 태연하게 이런 메뉴를 2개 시켰으니, 종업원 입장에서는 얼마나 의심스러웠을까.
난생 첫 케밥이었는데, 그날 바로 케밥에 질려버렸다. 그래도 엄청 맛있었다. 맛은 분명히 있었는데... 먹어도 먹어도 줄어들지 않아서 먹으면서 피식 웃었다. 정말 서로 '허허허' 하면서 먹었다. 다 떨어진 체력으로 공허한 눈빛으로 천천히 포크질을 하면서... 케밥으로 보름달이 된 배를 두드리며 민박집 다락방 매트리스에 누운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