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의 바다에게
2024.11.1. 금요일
Day 1
낯선 타지에서 혼자 처음 떠나보는 여행. 혼자서 국내로 여행 간 것도 2024년 1월이 처음이었는데, 이제는 영국이라는 해외에서 혼자만의 발자취를 남기게 되었다. 그동안 영국 근교 여행을 많이 갔다 왔기 때문일까, 긴장감 따위는 없었다. 아침에 눈을 뜨고 주섬주섬 옷을 입고 화장하면서, 그리고 기숙사 엘리베이터에 타기까지 차분한 설렘이 마음속에 가득 자리 잡고 있었다.
아침에 배가 안 고픈 편인데, 이날은 기차 안에서 빵을 우물우물 먹으며 고독을 즐기고 싶었다. 항상 셰필드 역에 들어서자마자 보이는 빵집이 있다. 빵 냄새를 맡으면 먹지 않아도 기분이 좋아진다. 항상 여행 가기 전 치르는 의식 같은 것이다. 노릇노릇 구워진 버터 냄새는 신호였다. 새로운 여정으로 향하는 신호음. 오늘만큼은 냄새를 입으로도 즐기고 싶었다. 뺑오 쇼콜라 한 개와 따뜻한 커피를 움켜쥔 채 기차에 올라탔다.
요크에서 한 번 갈아타야 했다. 한 달 전에 학교 버스를 통해서 갔던 요크 당일치기 여행이 생각났다. 그래도 두 번째 만남이라고, 속으로 엄청 반가웠다.
반가움도 잠시, 발걸음이 급해졌다. 탔던 기차가 조금씩 지연되어서 갈아타야 할 기차 출발 시간에 임박하게 된 것이다. 머릿속으로는 기차를 잡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마음은 급하지 않았다. 옥스퍼드 여행에서 기차에게 뒤통수를 맞은 이후로 이번에 놓쳐도 다음 기차를 타야겠다는 태평함이 생겼다. 아니나 다를까, 기차는 이미 출발했다. 처음에는 플랫폼에 기차가 보여 아직 안 출발했나 기대감에 차 들어가려고 했지만 역무원이 1시간 뒤에 출발할 기차라며 아직 못 들어간다고 말했다. 머쓱해진 상태로 뒤통수를 긁적이며 손님 대기실 안에 들어갔다. 오히려 마음이 편안해졌다. 가방에서 책을 꺼내 아무도 없는 대기실 안에서 여유롭게 독서를 즐겼다.
마침내 기차를 탈 수 있었다. 빈 좌석에 앉아 들뜬 마음으로 기차선로 위에서 흘러갔다. 약간의 우여곡절을 넘어 드디어 스카버러에 도착했다는 표지판이 보였다. 소도시라는 이미지가 머리에 새겨졌기 때문일까, 지브리 애니메이션에 들어온 것 같았다.
가보고 싶은 장소를 계획표에 세우기는 했지만, 딱히 '어디에 방문해서 무엇을 해야겠다!'라는 결심은 없었다. 그저 이 도시의 풍경을 눈에 담고, 공기를 코로 들이키며 낯선 장소에서의 낯선 여행객이 되고 싶었다. 스카버러를 여행지로 선택한 유일무이한 이유. 영국 동쪽 바다를 보기 위해서였다. 도시 거리를 거닐면서 바다 쪽으로 걸어갔다. 그동안 바다 쪽 지역은 제주도, 부산, 여수나 일본이나 대만과 같은 아시아 위주로 갔었는데, 서양 바다 지역은 거의 처음이었다. (어렸을 적 같던 해외는 기억에 흐릿하게 남아 있기 때문에...)
1년 전쯤 혼자 남해가 보고 싶어서 떠난 여수 여행이 떠올랐다. 건물 모양도, 길거리 분위기도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바다는 언제쯤 나올까 생각하던 때 지도가 오른쪽으로 꺾으라고 지시했다. 오른쪽으로 몸을 돌린 순간, 멀리서 파란 들판이 희미하게 보였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걸음 속도가 빨라졌다. 어느 순간부터 길거리 풍경에서 벗어나 대자연의 아름다움이 눈을 꽉 채웠다.
말로는 형용할 수 없는 기쁨을 느꼈다. 눈동자를 가득 채우는 파란 물결에 가슴이 두근댔다. 긴장되는 두근거림이 아니라 기쁨의 두근거림. 오랜만에 느끼는 꽉 차는 설렘이었다. 입 밖으로 리액션이 잘 안 나오는 성격인데 혼자서 '우와'를 연신 중얼거렸다. 사진도 계속해서 찍었다. 눈으로 바라보는 바다를 완벽하게 담아내지 못해서 아쉬웠지만 말이다. 헤드셋도 두 손으로 빼내 목에 걸었다. 그 순간 나의 음악은 바다의 움직임이었다.
내리막길을 따라 걸어갔다. 한 칸씩 내려갈 때마다 길목에 벤치가 드문드문 자리 잡고 있었다. 스카버러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원하면 벤치에 앉아 파도를 하염없이 바라볼 수 있겠지. 고민이 생기거나 마음이 심란할 때 터벅터벅 걸어와 벤치에 앉아 있는 내 모습을 상상했다. (나중에 스카버러 한 달 사기를 해봐야 하나...) 영국의 동해 바다는 독보적인 색깔을 지니고 있었다. 한국의 남해 바다, 동해 바다와는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매섭고 차가우면서 회색빛이 돈다. 바다에 회색이 보이기보다는 바다가 풍기는 분위기가 회색을 띠었다. 오른쪽 사진은 계단을 걷다가 예고도 없이 이어지는 바다가 신비로워서 찍었다. 지금 당장 미친 사람이 된다면 뛰어 내려가 입수하지 않을까. 쓸데없는 상상을 또 해봤다.
바다를 실컷 구경한 뒤 뒤를 돌아봤다. 바다 뒤로는 높은 언덕과 절벽이 보였다. 그 가운데 스카버러 성도 있었다. 바다에 몰입한 나머지 스카버러 성에 대한 관심이 식었지만, 그래도 여기까지 왔는데 구경하기로 했다. 표지판을 따라 천천히 올라갔다.
누군가에게 쫓기는 사람처럼 몇 걸음 가면 뒤를 돌아보고, 몇 걸음 가면 고개를 다시 돌렸다. 높은 곳에서 바라보는 바다를 보고 싶어서. 가까이서 봤을 때는 소용돌이 소리를 내는 파도 소리와 움직임에 거칠다고 생각했는데, 멀리서 보는 바다는 차분했다. 파도가 느긋하게 육지로 이동하는 것처럼 보였다.
성의 입구가 보였다. 이제는 성에 집중할 차례였다. 급하게 핸드폰 뮤직 앱에 들어가 듣고 있던 노래를 바꿨다.
RADWIMPS(feat. Toaka) - すずめ
유적지나 오래된 성, 황량한 자연 속에 들어갈 때 듣기 좋은 곡이다. 이 곡을 듣고 거닐면 미지의 세계로 잘못 들어온 모험심이 넘치는 주인공이 된 것만 같다. 천천히 한 발씩 내디뎠다.
스카버러 성 안을 들어가려면 돈을 내야 했다. 돈을 내서 성 안을 거닐고 싶다는 욕심은 없어서 미련 없이 포기했다.
미련이 남은 사람처럼 성을 멀리서 찍었다. 멀리서 바라본 성도 운치 있었다.
그래도 성 옆 잔해들은 입장하지 않고도 가까이서 구경할 수 있었다. 가파르고 좁은 길목을 올라가야 했다. 위에서 다른 여행객 남녀가 내려가고 있어 밑에서 기다렸다 올라갔다. 속으로는 마음껏 사진을 찍을 수 있겠다는 작은 환호성을 질렀다. 스카버러의 꼭대기에서 스카버러를 구경했다. 360도로 돌면 바다가 보이다가 스카버러 마을이 보였다. 영상으로 파노라마 시야를 남겼다. '히히' 거리면서 혼자서 방방 뛰었다.
벽돌로 쌓인 성의 잔해를 배경으로 사진을 남겼다. 영화 <나니아 연대기 2>에서 딱 페벤시 남매들이 이런 폐허에서 모험을 시작했는데! 당장이라도 판타지 영화 속으로 들어가고 싶었다. 혼자서 사진 찍기도 생각보다 재밌었다. 이날 남긴 사진들이 다 마음에 들었다.
다시 조심조심 내려갔다. 의도하지 않았지만 어떻게 걷다가 보니 성의 출구에 도착했다. 처음에 도착했던 바다로 다시 가면 숙소와 멀어졌기 때문에 숙소에서 가까운 바다로 걸어가기로 했다. 파란색만 계속 본 눈을 잠시 쉬고, 초록색과 갈색으로 메운 등산 길을 계속해서 밟았다.
햇살이 정면으로 비춰 나무를 그림자처럼 보이게 만드는 풍경은 아름다웠다. 나뭇가지들 틈으로 보이는 바다와 빨간 지붕들은 도착하기 전 보여주는 예고편이 되었다.
중간에 주민들만 다닐 것 같은 길이 보였다. 이 길로 가면 집들만 구경하게 되니 사진만 찍고 직진했다.
20분 정도 걸었을까, 다시 바다가 보였다. 이번에는 또 느낌이 달랐다. 처음 봤을 때는 '광활하다'는 단어가 바로 떠올랐다면, 이번에는 사람들이 북적북적 거릴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항구도 보이고 집도 빼곡하게 늘어섰다.
헤드폰을 또 잠깐 뺐는데, 쿵짝대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화려한 형형색색의 간판들도 보였다. 작은 카니발이 바다 앞에 자리하고 있었다. 놀이 기구도 있었고 놀이동산 하면 따라오는 핫도그, 아이스크림, 솜사탕도 팔았다. 1년 전에 친구랑 놀러 갔던 월미도 놀이동산이 생각났다. 그래도 외국 아니랄까봐, 서커스를 연상하는 빨간색과 흰색 줄무늬 간판이나 영어로 쓰인 음식 메뉴들은 이국적인 분위기를 풍겼다.
놀이동산을 기준으로 왼쪽으로 걸어갔다. 계획표에 따르면 'Scarborough Sea Wall Heritage Trail' 하이킹 코스가 있어 따라가려고 했다. 하지만 생각보다 길이 멀기도 했고 배가 고프기도 해서 조금 걷다가 다시 방향을 틀어 놀이동산 쪽으로 걸어갔다. 걸어가면서 방파제가 쭉 줄지어 바다를 막고 있었다.
벤치에 앉아서 잠시 쉬었다. 내 등을 다 덮는 커다란 가방을 계속 들고 걸어가니 어깨가 살짝 뻐근했다.
카니발에 다시 도착해서 오른쪽 길을 따라 걸어갔다. 한국 바닷가 근처에는 한국어 간판으로 쓰인 무수한 횟집, 조개구이 식당들과 수산시장이 보이는데 영국 스카버러 바닷가는 전혀 달랐다. 커다란 카지노와 피시 앤 칩스 식당들, 작은 자동차 형태를 가진 배들. 스카버러 비치만의 매력이 하나씩 보였다.
이곳에 와서 첫 모래를 목격했다. 해수욕장의 딜레마이다. 모래를 밟자니 신발이 더러워질 것 같고, 그래도 바다는 가까이서 보고 싶고. 나는 밟자는 주의다. 맨발로 밟으면 더 좋지만 뒷감당을 할 자신이 없어 살금살금 신발을 신은 채로 모래사장을 밟았다. 그때 도시락을 까서 먹기 딱 좋은 장소라는 생각이 들었다.
며칠 전, 기숙사 플랫 메이트가 준비한 나초랑 토마토소스를 냉장고에 보관했다가 이번 여행 점심으로 먹기 위해 아침에 가방에 넣어서 나갔다. 나초는 눅눅해졌지만 시장과 스카버러 풍경이 반찬이었기에 맛있게 먹었다. 노래를 들으며 바다를 바라보고 도시락을 꺼내 먹는 과정 자체가 나에게 낭만이었다. 우물거리며 멍을 때리다 보면 바다 근처 사람들을 관찰하게 된다. 강아지와 뛰어노는 사람들, 아이랑 손을 잡고 파도 쪽으로 다가가는 엄마, 여러 포즈를 잡으며 인생 사진을 남기는 커플. 당나귀를 타고 다니는 가족들도 보였다. 아마 돈을 내면 체험할 수 있는 활동 같았다. 바다랑 당나귀라니. 처음 보는 조합이었다. 모험하는 사람들처럼 보여 신비로웠다.
점심을 다 먹고 시간을 봤더니 2시였다. 2시에 숙소 체크인인데 너무 여유를 부렸다. 빈 도시락통을 가방에 넣고 모래사장에서 벗어났다.
숙소는 바다 앞에 있지 않았다. 스카버러 비치에서 20분 정도 걸어가야 했다. 숙소와 해수욕장 사이 반드시 지나쳐야 했던 파란색 교량이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아쉽게도 스카버러에는 한인 민박집이 없었다. 이곳에 머무른 지 3시간밖에 안됐지만 한국인은 한 명도 못 봤다. 영국에서 아는 도시라고는 런던밖에 없던 내가 스카버러라는 지역을 찾은 것도 신기했다. 무작정 동해 바다로 가자고 해서 구글 지도를 확대하다가 발견한 지역이었다. 그리고 이름이 마음에 들었다. 'Sky'를 떠오르게 해서 파랗게 탁 트일 것 같았달까...
어쨌든 이번에는 혼자서 제대로 쉬어보자는 의미에서 호텔을 예약했다. 대도시가 아니라 숙소비도 비교적 저렴했다. 무엇보다 브런치 조식이 있다는 사실에 바로잡은 방이었다. 영국 가정 집 사이 자연스럽게 호텔이 위치했다. 밖에서 봤을 때는 평범한 가정 집 같아 보였다. 투명한 유리문 옆에 있는 초인종을 눌렀다. 주인아주머니가 문에서 나오셨다. 나한테 어디서 왔냐고 물어보길래 "I'm from South Korea."라고 말했다. 그동안 이 집에 머무른 아시아인이 많지 않았겠지. 유니크한 사람이 된 것 같아 뿌듯했다.
아주머니 인상이 따뜻하셔서 잠깐 올라온 긴장감을 바로 풀 수 있었다. 현관문과 침실 문을 열고 닫는 열쇠를 가지러 오겠다며 잠시 기다리라고 하셨다. 그 틈에 천천히 집 안을 살폈다. 노란색과 연한 주황색 빛깔이 퍼져 있었다. 복도 왼쪽으로 방이 두 개 보였다. 하나는 투숙객들이 머무르다 쉴 수 있는 로비였고, 다른 하나는 내일 조식을 먹을 식당이었다. 가정집 분위기에 호텔에서 제공하는 서비스들이 다 있어서 신기했다.
주인아주머니가 숙소 안내사항을 설명해 주신 뒤 방으로 안내했다. 내 방은 세 층 정도 올라가야 했다. 방 안은 깔끔했다. 한 명이 머무르기에 충분히 여유로운 공간이었다. 침대 위 놓인 두 개의 수건 세트, 두 개 베개가 전부 내 거라는 생각에 기뻤다.
무엇보다 이 과자들과 커피가 전부 내 거라니! 허기가 져서 과자를 몇 개 까서 먹었다. 특히 오트 크럼블 쿠키가 생각 외로 너무 맛있어서 나중에 셰필드 가서 사야겠다는 생각으로 사진을 찍었다.
나의 이상적인 계획에 의하면 짐을 풀고 근처 카페에서 책을 읽으며 오후의 여유를 부리려고 했지만, 계획은 망상이 되었다. 푹신한 침대에 눕자마자 몸이 푹 꺼졌고 피곤함이 밀려왔다. 과자를 야금야금 먹으면서 핸드폰으로 인스타그램 스토리를 업로드했다. 유튜브도 보면서 잠시 도파민 세계를 즐겼다.
시간을 보니 어느새 다섯 시 반이었다. 아차 싶어서 옆 창문을 보는데 흰색 커튼 뒤로 비추던 하늘색 풍경이 캄캄해졌다. 영국의 해는 스카버러에서도 자비가 없었다. 저녁으로 먹을 피시 앤 칩스는 포기할 수 없었다.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가죽 재킷을 입었다. 밤의 스카버러를 즐길 준비가 완료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