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스카버러 Scarborough 여행일지 2화

회색빛의 바다를 보니 '역시, 영국이야'

by 윤슬

포장을 하려고 가는데 생각보다 가는 길이 어두컴컴해서 살짝 무서웠다. 신호등이 없는 횡단보도도 있어서 중간에 차에 치이지는 않을까 조심조심 건넜다. 아까 봤던 파란 다리가 다시 보였다. 밤이 되니 파란색은 없어지고 은은한 초록색 조명이 다리를 비추고 있었다.

20241101_172001.jpg?type=w386
20241101_172114.jpg?type=w773


나초를 먹었던 스카버러 비치에 다시 왔는데 깜짝 놀랐다. 아까 건조했던 모래사장이 바다에 덮인 것이다. 밀물을 적나라하게 목격했다. 자연의 이치지만 내가 아까 앉아서 나초 먹었던 자리가 바다로 덮였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사람들도 거의 없었다. 반짝거리는 불빛은 파도가 그려내는 포말을 비췄다. 밤바다의 소리는 낮과 달랐다. 파도의 움직임에 적막한 분위기가 한 층 짙어졌다.

20241101_172411.jpg?type=w773


'맞다! 포장해야지.'


머리를 부여잡고 다시 원래 목적을 이루기 위해 성큼성큼 걸었다. 반짝거리는 불빛들 속으로 가니 사람들이 바글바글했다. 정신없이 지도를 보다 보니 도착했다. 스카버러에서 현지인들도, 여행객들도 모두 맛있다고 칭찬한 피시 앤 칩스 식당이었다. 한국 바다에 가면 회를 무조건 먹듯이 영국 바다에 가면 반드시 피시 앤 칩스를 먹어야 했다.


구글 리뷰를 보면서 무엇을 먹을지 미리 계산을 했다. Cod는 대구살인데 지난번 런던에서 Cod를 먹었던 기억이 나 이번에는 Haddock을 먹기로 했다. 결제하고 나서 보니 사람들이 소스를 별도로 주문하길래 나도 추가로 완두콩 소스를 주문했다. 소스가 2000원 가까이하길래 조금 비싸다는 생각이 스쳤다.


주문을 하고 기다리는데 속으로 놀랐다. 주방에서 10살쯤 되어 보이는 꼬마 남자아이가 나오더니 감자를 튀기기 시작했다. 가족이 운영하는 식당 같았다.


'나는 저 나이 때 뭐 했지.'


미디어에서나 이렇게 밖에서 꼬마 아이들이 어른도 힘들어할 사회생활을 하고 있는 모습을 보면 내 어릴 때를 떠오르게 된다. 어릴 때부터 부모님을 의젓하게 돕는 모습을 보며 무표정한 얼굴 뒤로 흐뭇하게 미소를 지었다.

20241101_173834.jpg?type=w386
20241101_174359.jpg?type=w773


아주머니 직원이 완성된 피시 앤 칩스를 포장해서 봉투에 넣어서 주셨는데 두 팔이 가득 찼다. 내 생각보다 훨씬 봉투가 거대해서 당황했다.


'이게 맞아?'


땡큐를 외치고 나왔다. 봉투를 두 팔로 안은 채 뚜벅뚜벅 걸어갔다. 너무 커서 이걸 다 먹을 수 있을까 걱정되기 시작했다.


숙소까지 가는 길이 꽤나 험난했다. 중간에 길을 잘못 들어가기도 했고, 마트에서 맥주 사고 나올 때도 어두운 골목길을 지나가야 했다.

20241101_175531.jpg?type=w773


누구도 없는 나만의 공간에 들어왔을 때 긴장이 탁 풀렸다. 재빠르게 편안한 잠옷으로 갈아입었다. 엄마들이 등짝을 찰싹 치겠지만, 침대 위에 음식을 세팅했다. 혼자 독차지하는 방 덕분에 남는 수건을 쟁반으로 삼아 펼쳤다. 아니나 다를까, 피시의 크기는 컸고, 칩스는 많았다. 나니아 연대기를 보면서 먹기 시작했다. 혼자서 즐기는 음식과 맥주는 낭만적이었다. 작년에도 혼자 여수로 떠났을 때 맛있는 안주와 소주를 혼자 마셨는데, 그때 기억이 떠올랐다.

20241101_184422.jpg?type=w386
20241101_185325.jpg?type=w386


먹다가 배불러서 남은 음식은 아까 나초가 담겨 있던 플라스틱 용기에 담았는데, 영화를 보다 보니 입이 심심해서 꺼내서 다시 먹었다. 다 못 먹고 가져갈 줄 알았던 튀김은 그렇게 내 배 속으로 다 들어갔다. 침대 위를 깔끔하게 정리한 뒤 불을 끄고 침대에 누웠다. 노곤노곤. 피곤하지만 행복한 기분으로 천천히 눈을 감았다.




2024.11.2. 토요일

Day 2


핸드폰 알람이 울리면서 눈이 떠졌다. 기숙사 방이 아닌 호텔 방 천장과 침대가 한눈에 들어왔다. 정신이 몽롱한 상태에서 실감이 났다.


'스카버러에 왔구나!'


하지만 4시간 뒤에는 이곳에 없다. 11시 48분에 기차표를 끊었기 때문에 간단하게 아침을 먹고 돌아다니다가 다시 셰필드로 떠날 계획이었다. 침대에서 일어나 샤워를 한 뒤 아침을 먹자마자 바로 떠날 수 있게 대충 짐을 가방에 다시 넣었다. 가지고 온 짐이라고는 검은 등딱지밖에 없어서 금방 정리할 수 있었다.


방문을 조심히 닫고 내려갔다. 내려가는 길에 마음에 드는 그림이 보여서 사진을 찍었다. 내가 스카버러에 왔음을 증명해 주는 사진 같았달까.


조식을 먹는 방에 들어갔다. 내가 제일 마지막으로 들어온 손님 같은지 다들 먼저 앉아서 식사하고 있었다. 그때 내 이름이 적힌 식탁이 보였다. 주인아주머니는 다가와 메뉴를 물어봤고 나는 과일 요거트에 블랙커피, 그리고 연어 브런치를 먹고 싶다고 말했다.

20241102_094114.jpg?type=w386
20241102_092333.jpg?type=w386


음식 하나하나가 전부 정갈했다. 내가 너무나도 사랑하는 브런치 구성이기도 했다. 상큼한 과일에 요거트를 먼저 먹으면서 빈속을 채웠다. 거기에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면서 정신을 깨웠다.

20241102_090157.jpg?type=w386
20241102_090541.jpg?type=w386


메인 음식이 나왔다. 버터가 스며든 구운 토스트에 스크램블, 그리고 훈제 연어가 국수 모양으로 올려져 있었다. 식탁에 앉는 순간부터 따뜻하게 대접받는 기분이 들었다. 주인아주머니의 친절한 미소와 깔끔하고 예쁜 음식들. 물론 맛도 있었다. 호텔의 세련됨과 가정집의 따뜻함이 어우러진 숙소는 계속해서 기억에 남을 것 같다.

20241102_091054.jpg?type=w386
20241102_091103.jpg?type=w386


비록 숫기가 없어서 다른 손님들처럼 아주머니에게 말을 걸진 못 했지만, 나중에 스카버러에 다시 온다면 이 숙소에 머무를 것이다. 언젠가 꼭 반복의 낭만을 이루겠다!


체크아웃을 하려 가방을 챙기고 내려갔다. 체크아웃이라고 적힌 접시 위에 열쇠를 놓고 주인아저씨가 있어 감사하다는 인사를 짧게 건네고 나갔다.


어제 저녁을 포장하려고 갔던 어두컴컴한 길을 밝을 때 보니 감회가 새로웠다. 날씨는 어제와 달리 뭉게구름이 잔뜩 피어 있었다. 항상 여행을 가면 두 가지 날씨를 골고루 경험하게 된다. 미치도록 맑은 날씨와 뭉게뭉게 가라앉는 흐린 날씨. 날씨에 따라 여행 풍경을 다양하게 볼 수 있어서 나는 오히려 좋다고 생각한다.

20241102_100106.jpg?type=w386
20241102_100722.jpg?type=w773
20241102_100838.jpg?type=w386
20241102_100904.jpg?type=w386


반나절 만에, 이제는 보기만 해도 반가운 파란 교량. 교량을 지나치면 곧바로 바다였다. 스카버러 비치 근처 카페에서 바다 멍을 때리기로 했다.

20241102_101040.jpg?type=w773


근데 예상하지 못한 변수가 등장했다. 내가 바다를 미치도록 좋아한다는 변수. 저녁과 밤에 들어왔던 밀물이 전부 쓸려 나가 축축한 모래만이 남았다. 아침 바다는 '비치'보다는 '갯벌'에 가까웠다. 아침 공기의 서늘함과 영국 바다의 매서움이 합쳐지니 또 새로웠다. 파랗고 맑은 바다를 볼 때는 눈부셨는데, 무채색이 가미된 바다를 보니 가슴이 오히려 뻥 뚫렸다. 파도가 치는 쪽으로 더 가까이 갔다. 가만히 서서 10분은 멍을 때렸던 것 같다. 이때 들었던 도영의 <나의 바다에게>가 아직까지도 선명히 기억에 남는다. '바다'가 들어간 노래를 연속으로 재생했다.

20241102_101346.jpg?type=w773


배가 부르기도 했고, 카페에 들어가면 시원한 파도 소리와 바람 소리를 감상할 수 없었기 때문에 어제 점심을 먹었던 돌 턱에 걸터앉았다. 혼자서 바다만 보고 있는데도 심심하지 않았다. 바다를 볼 때만큼은 아무 생각이 안 들었다. 머리가 뻥 시원해지는 기분. 가지고 있던 걱정들이 사소해지고, 목적이 없는 용기가 샘 솟아난다. 바다가 안겨주는 그 용기가 고마워서 바다를 유독 좋아하는 것 같다.

20241102_102159.jpg?type=w773


시간은 어느새 11시를 향하고 있었다. 스카버러의 바다와 작별 인사를 하며 언덕을 올라갔다. 이곳의 집들을 구경하는 재미도 있었다. 스카버러의 일상이 담긴 풍경은 관광지와는 전혀 다른 매력이었다.

20241102_110107.jpg?type=w386
20241102_112116.jpg?type=w386


1박 2일이었지만 이틀은 있었던 것 같다. 도시가 크지 않아서 다 못 본 것에 대한 아쉬움은 없었지만, 내가 살면서 다시 이 낯선 지역에 올 수 있을까 생각이 들었다. 다시 못 볼 수 있다는 기약 없는 이별의 아쉬움이 컸던 것 같다. 안녕 스카버러!

20241102_113946.jpg?type=w773


막상 셰필드 역에 내려 익숙한 분수대를 보니 역시 집이 최고인 건가 싶었다. 어느새 나의 집은 셰필드가 되었다. 모든 몸의 감각과 정신이 편안해지는 기분. 그 안락함을 한국에서만 느꼈었는데. 새삼스럽게 나에게 또 하나의 집이 생겼음을 느꼈다.

20241102_143650.jpg?type=w773


북쪽 영국의 바다를 제대로 즐기고 왔다.


영국의 바다야, 너의 파도는 차분하고 날카로웠어. 흐린 날씨 아래에서는 더욱 그 서늘한 매력이 살아났지. 정말 영국과 잘 어울리는 색깔과 움직임이었달까. 첫째 날은 맑은 눈송이가 떠오르는 바다였다면 둘째 날은 시니컬한 눈의 여왕이 물들인 바다였어. 무한히 펼쳐질 것 같은 너의 모습을 보니 눈물이 글썽거리더라고. 가슴이 두근거릴 정도로 벅차오르는 감정을 줘서 고마워. 언젠가, 반드시 다시 올게! 그때까지 스카버러에서 얻은 용기를 갖고 열심히 살아갈게. 안녕.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