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앙상해진 나무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온건한 사람을 이야기할 때 나무로 비유하곤 하잖습니까? 그러나 아무리 굵고 단단한 기둥을 가져도 가지가 하늘을 죄다 가리는 법 없습니다. 이파리를 뻗는다 한들 그늘엔 군데군데 구멍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사이로 볕이 들어온다고 화내는 사람 보신 적 있으신가요. 그 자체로 온전하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인간은 왜 '꽉 찬 무언가'를 완벽이라 여기며 갈망합니까? 나는 도통 알 수가 없습니다. 그저 녹빛이 그리울 뿐입니다.
-23년 12월의 일기
저번 글에서 말이라는 것이 얼마나 와해되기 쉬우며 연약한지 투정을 부렸습니다. 오늘은 그저 글이라는 표현 수단을 예찬하고 싶습니다. 저는 그늘이 지구를 전부 가리지 못한다는 이유로 나무를 탓하는 사람이 되고 싶진 않거든요. 불만은 프롤로그 하나로 족합니다.
이것을 눌러 읽는 당신이라면 적어도 글에 관심이 있는 사람일 테지요. 눈앞에서 움직이는 영상이 무덤보다 많은 요즘인데, 가내수공업으로 뇌에서 상상을 뽑아내야 하는 수고로움을 감수하는 사람이라면 당신은 사랑을 아는 거예요.
어쩌면 이것을 마지막으로 저의 흔적을 접할 일 없을지 모르지만 저는 여러분을 사랑합니다. 단지 저와 같은 것을 애정한다는 이유에서 아낍니다.
그나저나 다들 읽는 걸 왜 좋아하시나요? 질문한 김에 먼저 답변하자면, 기어 들어갈 틈이 있어서 좋아합니다. 사실 저는 영상을 선호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거기엔 죄다 정해진 것들 뿐이에요. 영화를 봐도 조명 색깔, 벽지 모양, 하물며 주인공 집 안 창가 화분의 꽃 종류도 고정되어 있습니다. 장면에 끼어들 틈이 없어요.
그러나 글에는 감히 넘나들 여지가 생깁니다. '은은하게 빛나는 생일 초'라는 짧은 단어의 조합 속에서도, 백 명이 읽는다면 백 개의 생일 초가 만들어져요. 사람들이 읽을수록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생일 초도 늘어 가겠죠. 분홍색, 빨간색, 파란색, 초록색, 무지개색 초가 머릿속에서 빛날 것입니다. 같은 글을 읽어도 다른 감상이 나오는 이유가 이것이 아닐까요. 나의 촛불과 당신의 촛불이 다르기에 호기심이 생깁니다.
네 초는 무슨 모양이니. 무슨 색깔이니. 얼마나 크니. 혹시 몇 개야?
글을 쓰는 건 작가지만 장면을 완성하는 것은 독자입니다. 감상을 나누며 풍성하고 또렷하게 만들어가는 것도, 간혹 몇 개는 부수거나 없애곤 새로 장만해 오는 것도 그들의 능력이죠. 창작은 혼자서도 할 수 있지만 같이 하면 더 즐거우니까요. 다시 말하지만, 내 생일 초를 온갖 능력을 다 써서 묘사하고 나서도 이걸 볼 당신의 촛불이 문득 궁금해지는 것이 소통의 부싯돌입니다.
쓴다면 나누고 싶어요. 읽는다면 쓰고 싶어요. 독자와 작가의 경계라는 건 없다고 믿습니다. 누구나 글 안팎으로 들락날락할 수 있으니 저라고, 당신이라고 못 쓸 건 뭔가요. 제게는 아직 대면 소통에 있어 부적응자처럼 보일 면모가 상당 부분 있지만, 글은 몇 자고 써 내려가고 싶습니다. 방금도 중편 소설을 고치며 주인공 방에 산세베리아 한 그루를 넣어주고 오는 길이었거든요.
오늘 읽은 책이 있다면 주인공 방에 화분이 있던가요. 없었다면 하나 만들어주세요. 어울리는 걸로요. 독자는 뭐든 할 수 있잖아요. 네? 그 이는 풀떼기에 물 주는 데 시간을 쓸 것 같지 않다고요? 그럼 시든 거라도 하나 넣어 주세요. 식물이 어울리지 않는 공간은 없으니까요. 비록 죽은 것이라 해도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