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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씨 Jul 16. 2022

내 탓의 고립

난 좋은 친구들하고 있을 땐 코미디언이 된다.

생각해보면 어릴 때는 늘 친구들이 많았다. 하긴 그것이 어린아이들의 특징이긴 하다. 기억이 분명한 2-30대 시절을 돌아봐도 그렇다. 늘 먼저 밥값도 술값도 내고, 말도 안 되는 농담을 즐겨해서 그랬던가. 어쩌면 그 누구에게도 뒤에서 욕하는 것을 금기처럼 싫어했기 때문일지도. 어쨌든, 의도해서 노력하지 않았어도 내게 호감을 갖는 사람이 늘 많았으니 그것은 부모에게서, 아니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성품 덕이라고 생각하련다.


화려한 인간관계가 무너지기 시작한 것은 40이 넘어서부터 였나보다. 서서히 그동안 숨겨져 있던 까칠한 성격이 드러나면서 나의 독설과 지나친 농담에 상처받은 사람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떠나는 버스와 여인을 결코 잡지 않겠다는 신념에 떠나가는 사람들을 기꺼이 환송했다. 그러다 지방으로 직장을 옮기게 되자 내 성격과 상관없이 교제의 폭과 깊이가 급속히 무너졌다. 서울이 멀다 보니 모임에 자주 나가지 못하고, 친구들도 자주 만나지 못하니, 점차 소원해지고 그러다가 연락이 끊기는 것은 자연스럽다. 그 자연스러움을 극복할 만한 적극적인 성격은 내게 없었다. 억지로 하는 일은 다 부질없다는 건 나의 소신이었다.


설상가상. 직장에 적응하지 못했다. 모든 직장이 그렇겠지만, 권력을 가진 자들의 횡포 앞에 힘없는 자들은 두 줄을 만든다. 아부하는 줄, 대드는 줄. 나는 멋있게 보이는 대드는 줄에 섰는데 그 많아 보이던 동지들이 돌아보면 다 없다. 결국, 몇 안 되는 아웃사이더들이 내 친구의 전부가 되었다. 가정이 제일 중요하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직장이 더 중요하다. 하루의 대부분 시간을 보내고, 집에 가서도 직장의 일과 생각을 단절하지 못하니까. 그러니, 직장에서 아웃사이더로 사는 것은 이미 인생이 불행하다는 말이다. 동료들은 나를 불편하게 여겼고, 궁지에 몰린 나는 어쩔 수 없이 아이들에게 모든 정성을 쏟았다. 그것이 직장에 남아있어야 하는 유일한 이유였다.


다들 잘 지내는 것 같았다. 나만 빼고. 버티는 것이 너무 힘들어 결국 명예퇴직을 했다. 나의 떠남을 슬퍼했던 건 그저 몇 명의 동료들과 그보다 조금 더 많은 아이들 뿐이었다. 사회 부적응자. 인간실격.


시간을 훌쩍 건너뛰자면, 나를 좁혀오던 죽음들이 내 고립을 완성시킨다.


키우던 고양이의 죽음은 나를 고립시킨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예상치 못한 사고로 블루가 죽고, 그 죽음이 너무 어이없고 슬퍼서 견뎌냄이 어려웠다. 고립의 시작은 아내에 대한 실망이다. 블루와 똑같은 아이를 데려오고 싶다고 하자, 그녀는 난 고양이 싫으니까 안된단다. “어차피 내가 다 키우잖아. 그리고 고양이가 주는 위로와 평안은 사람이나 강아지가 줄 수 없어.” 아내는 단순하고 단호했다. 고양이가 싫다고 화를 낸다. 내가 얼마나 아프고 힘든지는 조금도 관심이 없다. 자신이 싫어도 남편의 슬픔이 위로받을 수 있다면, 그러나 그것은 남편을 많이 사랑했을 때의 일이고, 그러나 아내는 나를 사랑하는 마음이 없었으니 내 마음 따위에는 관심이 없다. 오직 자신의 감정만이 중요할 뿐. 그때 아내와의 거리가 한 걸음 이상 멀어졌다. 내 아내는 나의 슬픔에 관심이 없다.


가깝게 지내는 후배 부부가 놀러 왔다. 같이 밥을 먹으면서 블루의 죽음을 말해주었고, 그들 역시 마음 아파했으리라. “난 요즘 아무런 의욕이 없다.” 후배의 아내가 말한다. “뭐 언제는 의욕이 있었나.“  평소 같으면 그 정도의 가벼운 농담은 아무것도 아닌 일상이겠지만, 난 지금 너무 슬퍼서 정말 아무런 의욕이 없는데, 농담이라니. 그때부터 후배 부부와 연락을 끊었다. 사람들은 내가 너무 까칠하다고 말할 것이고 객관적으로는 나도 인정하나, 난 그때 그따위 농담이 듣기 싫었다. 내 감정에 아무런 관심도 배려도 없는 사람들과 만나고 밥 먹고 웃으면서 이야기할 수 없었을 뿐이다.


가깝게 지내는 제자 가족이 있다, 아니 었다. 그 아이는 목사의 아내가 되었는데, 어린 시절 엄마를 버린 아빠에 대한 결핍을 보상받겠다고 나를 아빠라고 불렀고, 목사인 그 아이의 남편은 나를 진짜 장인처럼 존중해주었고, 그 딸은 할아버지 보고 싶다며 자주 전화도 하고 집으로 찾아오기도 한다. 아빠로서 할아버지로서 나는 최대한 퍼주고 베풀었다. 그 아이들은 나의 블루를 매우 예뻐했고 결국 길고양이 새끼를 입양했다. 그리고 곧 블루가 죽었다. 블루의 죽음을 설명했음에도 불구하고, 내 가짜 딸은 전화를 해서는 자기네 고양이가 너무 귀엽다고 자랑을 했고, 난 더 이상 그 아이들의 아빠와 할아버지가 되고 싶지 않았다. 타인의 불행 앞에서 자신의 행복을 자랑하는 사람과 더 이상 관계를 지속하고 싶지 않았다.


그전부터 고립은 시작되었나 보다. 아내는 화가 날 때마다 말한다. “당신같이 성격 이상한 사람은 세상에 없을 거야. 당신하고 같이 살 수 있는 여자는 세상에 없어. 당신 하고 결혼해서 내 인생이 망가졌어.” 변명하고 따지기 전에 이런 말을 들으면 나는 아내로부터 멀어질 수밖에 없었다. 아내와의 고립.


큰 아들은 나와 인연을 끊었다. 말해주지 않으니 이유를 확신할 수 없으나, 내가 좋은 아버지가 되지 못했음을 넘어 아들에겐 매우 나쁜 아버지였으리라. 키우고 먹이고 공부시키고 결혼까지 시켰더니 아버지가 싫단다. 억울하기도 하지만 아들을 변호하자면 내가 결코 좋은 아버지가 아니었음을 인정한다. 첫째 사내애라서 힘이 들어갔던 건가. 나의 악한 본능이 드러난 건가. 아들이 내 기준에 어긋날 때 잔인하게 야단치고 때리기도 했다. 좋은 아빠 노릇한 순간들도 많았겠지만, 뭔가 삶이 힘든 아들은 아빠와의 나빴던 기억들만 떠올려 힘든가 보다. 아들이 나를 싫어하는 이유는 그것으로도 충분하다. 아들은 이유가 더 있었다. 고등학교 때 미국으로 유학 보낸 것이 자신을 버린 거라고 했다. 아들이 귀찮으니 버렸다고. 억울하지만 아들은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고 그것이 맞을 수도 있으니 아무 변명은 못한다. 어쨌든, 그렇게 두 아들 중 첫째로부터 고립되었다.


예전 직장에 친하게 지내던 후배 동료들이 있었다. 어찌하다 네 명이 죽이 맞아 10년 이상 같이 골프도 치고 여행도 다니면서 친하게 지냈다. 한 아우가 말한다. “우리가 이렇게 오래 친하게 지낼 수 있는 건 다 큰 형님 때문이지.” 내가 나이가 제일 많아, 직장에서 김 선생님이라 부르다가도, 우리끼리 만나면 죄다 형님이다. 골프 칠 때 자기들 돈을 너무 딴다고 동네 형님이란다. 어느 동네에나 어린 동생들 괴롭히고 돈 뜯어가는 동네 형님이 있기도 하니까.


친한 친구가 혈액암으로 버티다 결국 죽어 난 그놈의 빈소에서 삼일을 지냈다. 발인 날이 아우들과 골프 치는 날이었지만 발인과 화장까지 같이 있어야 했으므로 갈 수 없었다. 동생들은 형님이 없으면 재미없으니 조금 늦게라도 꼭 오란다. 거짓이다. 죽은 자가 나와 어떤 관계인지 잘 알고 있었으나, 역시 나의 슬픔보다는 자신들의 놀이가 더 중요했을 뿐이다. 그리고 몇 달 후, 다음 골프모임을 준비하던 중, 지난 모임에 나오지 못했으니 벌금을 내고 다시 이번 회비를 내란다. 그것이 우리의 규칙이었으나, 정나미가 떨어져 10년 넘게 친하게 지내던 후배들과 절연했다. 놈들은 형님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해 죄송하다고 편지를 보내고 돌아가면서 전화를 해댔지만 답장하지 않았고 전화를 받지도 않았다.  난 이미 마음이 떠났다.


그래서 내게 남은 것이 무엇인가. 귀한 인연들과의 결별이고 더 깊은 외로운 고립뿐이다. 내게 유익은커녕 불행뿐이지만 그것이 내 삶의 방식이고 선택이다. 아니 어쩔 수 없는 감정의 흐름이었다. 후회하지 않는다. 나의 의지적 선택이 아니었다고 항의하련다. 진심이 결여된 친분, 언제라도 실망하고 떠날 가벼운 인연, 그냥 내 까칠한 성격을 이해하고 받아줄 마음이 없는 타인들, 그리고 불가항력적으로 보낸 사랑하는 친구들. 그렇게 난 고립된다.


그럼 어찌할 것인가. 혼자 독거함이 귀결이다. 옳고 그름이 질문이 아니고 그렇게 될 수밖에 없음이 나의 운명이었다. 그나마 덜 불행할 삶을 선택하지 못한 더 불행한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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