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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씨 Jul 18. 2022

엄마가 울었다.

힘들게 말을 꺼냈다. “엄마, 요양원으로 가자. 그냥 호텔이야. 세끼 맛있는 거 잘 먹여주고, 간호사도 있고, 빨래도 해주고, 산책도 시켜주고, 목욕도 시켜준대. 친구들도 있으니까 심심하지도 않을 거고.” 엄마는 담담히 묻는다. “왜 내가 가야 되는데?”  이미 자책하고 있으니 궁색한 대답을 만들어댄다. “지난번에 엄마 혼자 집에 두고 서울 다녀왔잖아. 걱정돼서 한 잠도 못 잤어. 내가 엄마 옆에 24시간 붙어 있을 수 없잖아. 엄마가 넘어지거나 또 무슨 일이 나면, 내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잖아. 지난번에 엄마가 혼자 밖에 나가서 내가 얼마나 놀랬는지 알아?  큰 일 날 뻔했다고.”  엄마는 또 담담히 대답한다. “나 혼자 잘 지낼 수 있으니 걱정 안 해도 돼. 너 맘대로 돌아다녀.” 나는 화가 나서 대들듯 말했다, “그건 엄마 생각이고. 자식 입장에선 늘 불안하다고.”


거짓이다. 엄마가 귀찮은 거다. 하루도 거르지 않고 끼니때마다 밥 차려 먹여야 하고, 자기가 뭘 먹었는지 잊고 또 먹는 엄마를 위해 늘 식탁에 과일과 떡을 준비해야 하고, 다리 힘 빠질까 봐 매일 부축해서 산책시켜야 하고, 아무 일 없는지, 아살아있는지, 수시로 들여다봐야 한다. 난 아무 데도 갈 수 없고 늘 불안하다. 엄마가 갑자기 어떻게 될까 봐. 이런 정신적, 육체적 압박에서 벗어나고 싶다.


우연히 한 요양원을 알게 되었다. 작년에 오픈해서 시설도 서비스도 깨끗하고 훌륭했다. 무엇보다 누나 집 근처여서 자주 찾아갈 수도 있으니 마음이 놓였다. 좋은 요양원은 보통 오래 대기해야 함을 알고 있었기에 그럴 각오로 전화를 했다. “아직 방이 좀 있어요. 그런데 다음 달 지나면 장담을 못 합니다.”


갑자기 마음이 분주해져서 입소 절차도 알아보고 누나하고도 의논했다. 평생, 그리고 작년 엄마가 죽을 뻔했던 시절 엄마를 돌봤기에, 늙고 치매 증세 있는 엄마를 돌보는 게 얼마나 힘든지,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잘 아는 누나는 말한다. “네가 살아야지. 잘 결정했어. 엄마도 엄마 생각만 하지 말고 자식들 생각 좀 하면 좋겠구먼. 그리 모셔라.”


“엄마. 내가 말했던 요양원으로 가자. 아주 좋은 호텔식이야. 내가 해주는 것보다 훨씬 맛있는 밥 세끼 다 해주고, 엄마 좋아하는 목욕 시켜주고, 빨래해주고, 산책시켜주고. 간호사가 늘 엄마 봐줄 거고, 게다가 1인 1실이야. 엄마는 다른 사람하고 같이 있는 거 싫어하잖아.” 엄마는 또 담담하게 말한다. “그건 좋네. 근데 왜 내가 가야 돼?”


분명 필연은 아니다. 엄마를 위한 이유가 반이면 나머지 반은 내가 편하려는 것이다. “엄마 그러니까 잘 들어봐.” 이런저런 이유를 만들어대니 엄마가 말한다. “상황에 맞춰해야지. 네가 결정하면 그렇게 하마.”


너무 순순히 가겠다고 해서 다행이라 여겼다. 그러나, 다음 날 또 묻는다. “내가 왜 가야 돼?” 그럼 나는 진실과 거짓을 섞어 엄마를 설득하면서, 죄책감을 느낀다. 그리고, 또 다음날 똑 같이 묻는다. “내가 왜 가야 돼?” 그럼 나는 엄마가 요양원에 가야 하는 더 많은 이유들을 만들어 말하면서 더 큰 죄책감을 느낀다.


“엄마, 작년에 엄마 아팠을 때 누나가 얼마나 고생했는지 알아? 먹지도 못하고, 걷지도 못하고, 앉지도 못해서 누나가 먹어주고, 앉혀주고, 부축해서 걷고. 엄마가 밤새 열 번도 넘게 화장실을 간다고 해서, 누나가 엄마 침대 아래 누워 잤다고. 잠을 자기 뭘 자. 화장실 가겠다고 할 때마다 누나가 엄마 부축해서 다녀오고. 누나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엄마는 알아?”


엄마는 한 숨을 쉰다. 깊은 한 숨을.


“내가 엄마 돌보느라 아무 데도 못 가잖아.” “가면 되지. 나 혼자 잘 지낼 수 있어.” “그건 엄마 생각이고 내가 걱정돼서 엄마를 혼자 둘 수 없잖아.” 엄마는 또 깊은 한 숨을 쉰다.


며칠 전부터 엄마가 밥을 안 먹는다. 먹고 나면 “내가 뭘 먹었나?" 하시면서 또 먹고 또 먹어, 너무 먹어 나는 웃으면서 엄마를 용가리라고 불렀다. 정상이 아니다. “엄마 변비 생기면 말해. 약 사다 줄테니까.” 엄마는 자존심이 상했다. “아무 문제없어.” 배고파서 먹는 건 아니다. 먹고 돌아서면 자신이 먹었다는 사실을 잊는다. 그리고, 쓸쓸하고 무료하고 불안하니, 먹고 또 먹는다.


그런 엄마가 밥을 차려 주어도 “지금 먹고 싶지 않다.” 한마디 하곤 침대로 들어간다. 그리곤, 표정이 슬퍼졌고, 또 묻는다. “내가 왜 가야 돼?”


엄마를 모시고 병원에 다녀왔다. 요양원에 입소하려면 법정 전염병이 없음을 입증해야 하니까. 모처럼 외출한 김에 엄마한테 냉면을 사주고 잘 걷지 못하는 엄마를 부축해서 분위기 좋은 카페에서 달콤한 커피와 달콤한 빵을 사드렸다. “엄마, 좋지?” 엄마가 눈물을 삼키며 대답한다. “내가 왜 가야 돼?  난 네가 어딜 가든지 같이 갈래. 나 보내지 마.”


내가 엄마한테 무슨 짓을 하는 건가. 가슴이 먹먹하고 엄마한테 미안하고 눈물이 난다. 항복했다. “엄마. 요양원 안 가도 되니까 이젠 걱정하지 마.” 집에 와서는 엄마는 내가 차려준 밥을 잘 먹고 내 말에 웃기도 하신다.


늙고 병든 부모를 모시는 것에 누가 힘들지 않다고 말하겠는가. 그런 부모가 너무 오래 살까 봐 걱정한다면 그런 자식들을 누가 비난할 수 있단 말인가. 그래서 결국 부모가 돌아가시면 큰 짐을 벗어 안도의 한숨 쉬는 자식들이 불효자들인가. 내 누나가 그랬을 것이고, 내가 지금 그렇다. 인간의 모순이다. 엄마가 아플까 봐, 죽을까 봐 조마조마하다. 엄마가 너무 오래 살아 내가 너무 힘들까 봐 역시 조마조마하다. 그게 인간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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