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 표정 없이 길을 걷고 있는 누구라도 붙잡고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왔는지 들어보면 다 소설이라고 했던가. 의미도 없고 말해 줄 것도 없고 그저 실패했다고 생각한 내 삶도 소설이었다.
지난주에 두 권의 책을 읽었다. 일본 작가 나쓰메 소세키의 ‘문'과 미국 작가 필립 로스의 ‘에브리맨 everyman’. 신기하기도 했고 혼자 웃음이 나기도 했다. 두 책 모두 내 삶과 유사한 부분이 너무 많았다고 우기는 거다. 그리고 이런 삶도 소설이 된다는 것이 나에게 의외의 위로를 준다.
소세키의 소설을 몇 권 읽었지만, 그리고 그의 소설이 주로 그렇지만, ‘문'처럼 심심하고 허무하기까지 한 소설은 처음이다. "아침이 되니 일어나 출근하고 저녁에 퇴근해서 밥 먹고 잤다"는 일기 같다. 그다음 날은 "오늘도 어제와 같았다." 어린 시절 개학 전날 한 달이 넘는 방학숙제 일기를 하루 만에 쓰는 것과 흡사했다. "오늘은 친구들하고 놀고 저녁 먹고 잤다." 그다음 날 일기는 쉽다. "오늘은 어제와 같았다." 이런 글도 소설이 되는구나.
소설에서 주인공의 동생이 형의 답답하고 한심한 삶을 묘사한다. “일요일. 엿새 동안의 어두운 정신 활동을 이날 단 하루에 따뜻하게 회복하기 위해 형은 너무 많은 희망을 24시간 안에 투입하고 있다. 그러므로 하고 싶은 일이 너무 많아 열 가지 중에서 두세 가지도 실행할 수 없다. 아니, 그 두세 가지조차 막상 실행하려고 하면 오히려 그 때문에 허비할 시간이 아깝다는 생각이 들어 그만 다시 물러나 가만히 있다 보면 어느덧 일요일은 저물어버리는 것이다.”
글의 주인공인 소스케의 삶이 너무나 이해된다. 은퇴 후 내 모습. 내가 고백하지 않았는가. ‘삶의 의미를 찾느라 삶을 낭비하다.’ 남은 시간이 너무 소중하고 아까워, 이 시간에 무엇을 해야 의미 있고 후회 없이 행복할까 생각하다가, 결국 아무것도 못했다. 그 선택이 내 얼마 안 되는 남은 시간을 허비할까 봐서. 소세키의 소설이 극히 자전적인 것이니, 대 작가의 고민도 나와 같았나 보다. 물론 소스케가 이런 삶을 선택하게 된 것은 젊은 날 관습과 도덕을 위반한 열정의 저주이나 그것 역시 나를 포함한 많은 노인들의 경험과 크게 다르지 않다.
소설은 결국 아무런 극적인 반전도 없이 끝이 난다. 소스케는 고민만 하다가 그 소중한 일요일의 시간들을 흘려보냈고, 어떤 도전도 하지 않았으며, 그런 삶을 버티지 못한다고 용기 내어 자살하지도 않았다. 내가 그렇게 살고 있으니 나는 소스케였고 소세키다. 그러니 은퇴 후의 무료한 내 삶도 소설이다. 그것이 내 삶의 유일한 의미.
자신의 삶을 바꾸고 이겨보고자 대스님을 찾는 용기를 냈지만 그게 다였다. 처음부터 끝까지 고민만 할 뿐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소스케의 삶을 소세키 자신은 이렇게 묘사한다. “두드려도 소용없다. 혼자 열고 들어오너라 하는 목소리가 들렸을 뿐이다. 그는 어떻게 해야 이 문의 빗장을 열 수 있을지를 생각했다. 그리고 그 수단과 방법을 머릿속에서 분명히 마련했다. 하지만 실제로 그것을 열 힘은 조금도 키울 수 없었다. 따라서 자신이 서 있는 장소는 이 문제를 생각하기 이전과 손톱만큼도 달라지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닫힌 문 앞에 무능하고 무력하게 남겨졌다."
이 부분에서 소스케는 변명할 수 없는 나였다. 생각은 많지만 아무 힘도 없으니 아무 도전도 할 수 없는 무기력한 늙은이. 그게 나의 삶이고 내가 쓸 수 있는 유일한 소설이다.
로스의 작품은 처음이었다. 역시 대 작가라고 했는데 소설을 읽으면서 조금은 당황스러웠다. 아프고, 나이 먹으면서 더 아프고, 수술을 했고, 또 수술을 해서 결국 몸에 스탠트를 다섯 개나 넣어야 했고, 결국 심장 제세동기까지 몸에 넣었고, 그것도 모자라 왼쪽 경동맥이 막혀 혈관 내 찌꺼기를 제거하는 수술을 했고, 이번엔 다른 쪽 경동맥이 막혀 똑같은 수술을 하다가 그냥 깨어나지 못한 채 죽었다. 71세. 그리고 이것이 ‘everyman’s life’라고 말하는 소설.
암 수술을 했고, 가까운 사람들과 키우던 강아지들과 고양이들이 죽었고, 또 그런 일들이 더 일어났고, 그러면서 나는 더 늙어 결국 60이 훌쩍 넘었으니 점점 더 자주 그리고 더 크게 아플 것이고, 어느 순간 이런 것들의 반복 중에 생을 마감할 것이다. 71살이 될지 80살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삶이 우울하니 생각도 우울하고 말과 글도 죄다 우울해지는 것이 너무 싫다. 그래서 일기도 더 이상 쓰기 싫어졌다. 생각은 혼자 하는 것이니 어쩔 수 없지만 우울한 말과 글로 내 삶의 고백을 읽는 사람들마저 우울하게 만드는 짓이 싫었고 옳지 않다고 여겨졌다. 그래서 말이 줄었고 글이 멈췄다.
그런데, 로스의 소설은 처음부터 끝까지 늙고 병들고 아프고 죽어가는 이야기뿐이다. 즐겁고 욕망을 만족시키는 이야기들도 있으나 그건 틈새를 비집고 들어오는 본능일 뿐이다. 이런 무섭게 우울한 소설도 있는 거구나. 그러니까 내 우울한 삶도 소설이 되는 거구나.
‘삶에 대한 치열한 전투성이 거대한 슬픔으로 바뀌는 순간. 기나긴 저녁의 사무치는 외로움으로 느닷없이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고 싶은 순간. 때로는 농담처럼, 때로는 진담처럼, 달과 계절과 해가 얼마나 빠르게 지나가는지 모른다고, 인생이 이제는 전과 같은 속도로 움직이지 않는다고 이야기하는 순간. 그 무겁고, 무덤 같고, 바위 같은 무게는 말한다. 우리 모두 언젠가는 죽는다고.’
우리 모두는 언젠가 죽는다는 것은 당연히 내게도 일어남을 인정한다. 그러나 몇 번의 수술을 하고 몇 번의 죽을 고비를 넘기고 늙고 이혼하고 혼자가 되어 외롭고 하는 것들은, 평균적으로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일들이지만, 그러나 내게는 일어날 수 없어야 한다. 그럼 너무 잔인한 일 아닌가. I am not everyman, please.
“영감을 찾는 사람은 아마추어이고, 우리는 그냥 일어나서 일을 하러 간다.” 이 말이 소설의 큰 암시가 되었느니, 그럼 작가는, 그러니까 주인공은, 이렇게 말하려는 건가? "삶의 의미를 찾는 것은 아마추어 인생이다. 아프고 혼자가 되고 병들어도 삶의 프로들은 그냥 당하다가 죽을 뿐이다." 힘든 삶 앞에 서서 결국 죽을 때까지 그저 무능하고 무력하게 서있는 많은 사람들이 사실은 프로들이란 말인가. 치료받을 돈이 없었고, 돌봐줄 가족들이 없었고,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병듦과 죽어감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건만 그것이 프로의 삶이라니.
“자신이 퇴직 후 모든 생활을 바쳐온 일이 공허하기 짝이 없다는 느낌을 굳혀줄 뿐이었다.” 아, 작가는 결국 내게 결정타를 날린다. 인정하는 순간 무너지는 카운터 펀치를, 그저 오늘 날씨가 흐리다고 말하듯 무심코 주먹을 날리는데, 난 그 말을 맞고는 그냥 쓰러져 다시 일어나고 싶지 않다.
“물론 외롭게 살겠다고 스스로 선택한 건 그였지만, 견딜 수 없는 정도로 외롭게 살겠다는 뜻은 아니었다. 견딜 수 없는 정도로 외로운 상태의 가장 나쁜 점은 그것을 어떡하든 견디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건 내가 하려던 말이라고. 그러나 달라질 것이 하나도 없어 말하지 않았을 뿐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