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점심은 뭘 먹을까. 매일 아침 내 몸에게 묻는 질문이다. 이건 마치 스무고개와 같은 거다. 내 질문에 몸이 정답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이건 어때라고 물을 때마다 몸이, 그러니까 뇌가 Yes/No로 답할 뿐이다. 동네에서 선택할 수 있는 식당은 극히 제한적이니 질문은 그리 어렵지 않다. 순대국밥? 아니란다. 순대국밥을 머리에 떠 올리는 순간 뇌가 반응한다. 그것을 먹었을 때 내 몸이 느끼는 만족감을 뇌가 인지하고 즉시 표현하는 거다. 아니다고 대답한다. 상상의 즐거움이 없다는 건 오늘 내 몸은 순대국밥을 원하지 않는 거다. 짜장면을 떠 올리면 또다시 몸이 거부한다. 콩국수? 몸이 기뻐한다. 그럼 오늘 점심은 콩국수로 정한다. 이것이 내가 점심 메뉴를 결정하는 방식인데 대단히 민주적인 배려다. 이것이 네가 원하는 거냐고 내 몸에게 묻고는 긍정적인 대답이 있어야 내 행동을 결정하는 거니까. 나 혼자만의 문제이니 민주적이라 함은 억지스러우면, 그럼 본능적이라고 할까 아니면 과학적이라고 할까.
이런 과정이 신기하다. 음식을 먹은 후에 선택에 대한 평가를 하는 것은 자연스럽고 쉬운 일이다. 그런데 아직 먹은 것도 아닌데, 그저 생각만 했을 뿐인데, 실제 먹는 것과 똑 같이, 아니 어쩌면 더 정확하게 그런 결정의 옳고 그름이 확인된다니. 이런 과정은 실패가 없다. 실패하는 건 내가 감히 몸의 대답을 무시한 결정을 하거나, 혹은 몸이 애매하게 답할 때이다. 사실 이런 경우도 몸의 잘 못이 아니다. 내가 제시한 보기들에 대해 계속 확신을 주지 않을 때는 점심을 걸러야 한다. 그것이 내 몸과 뇌가 말하는 거다. 오늘은 점심을 먹지 않은 게 좋겠다는 강력한 신호. 그럼에도 무리하여 적당한 메뉴룰 선택하면 결과는 뻔하다. 조금만 먹다가 죄다 남기고 식사의 즐거움은 없고 찜찜함만 남는다. 몸과 뇌의 명령에 반항 없이 순종해야 했다.
저녁밥은 주로 집에서 해결하는데 냉장고에 있는 여러 가지 후보들을 하나씩 떠올리는 건 동일하다. 냉동칸에서 한 달째 얼어있는 육개장을 생각하지만 몸은 아무 반응이 없다. 며칠 전 사놓은 연어가 있으니 고민이다. 뇌는 그다지 긍정적이지 않았지만 연어는 몸에 좋은 것이란 지식이 있고 조금 더 놔두면 버려야 할 수도 있으니 결국 연어를 꺼내어 저녁을 차려보지만, 결과는 뻔하다. 한두 점 먹으면 그것으로 끝이다. 몸이 허락하지 않았으되 그저 객관적 사실을 기억하는 뇌의 속삭임에 속은 거다. 이런 과정이 배달음식을 시킬 때도 동일함은 새삼 말할 필요도 없다.
간혹 첫눈에 반할 수밖에 없는 여인을 본다. 감성이, 그러니까 뇌와 몸이 난장을 부리는 거다. 그러나 이건 점심 메뉴를 선택하는 것과 다르다. 여인 역시 자신의 뇌와 몸의 명령을 따를 것이니 내겐 아무 가능성도 없다. 그저 내 본능적 감성의 어쩔 수 없는 한계를 확인할 뿐이다. 그러나 만일 몇십 년 전, 그러니까 나도 젊음을 가졌던 날이라면, 뇌와 몸이 난장부리게 만드는 여인에게 날 투척했을 것이나, 그러나 그 결과가 항상 행복했던 것은 아니니, 역시 혼자만의 결정이 아닌 것들은 죄다 점심 메뉴를 선택하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
늙어가니 새벽에 눈이 떠진다. 여섯 시. 고민해야 한다. 지금 일어나도 피곤하지 않겠느냐고 몸에게 묻는다. 하루가 힘찰 것이냐고, 아니면 좀 더 자는 게 좋겠느냐고 묻는 거다. 생각만 해도 기분이 좋아지는 기억들이 있다. 순수했던 시절 날 설레게 만든 소녀, 몽골의 초원과 쏟아지는 별들. 파리의 센 강과 그 도시의 흐린 잿빛. 강아지들, 그중에서도 막내 장군이. 행복한 기억들이라고 몸이 인정하는 것들이다. 그러나, 생각만 해도 벌써 숨이 막히고 고통스러운 기억들도 있다. 그럼 머리를 흔들어야 한다. 내 삶의 모든 기억들은, 난 종종 잊어버렸어도, 내 몸은 하나도 놓치지 않고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