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의 땅 ( 고흥떡 이야기 일곱 번째)

용서와 희생이라는 이름으로

by 진주

모내기하는 날

출렁거리는 긴 못줄에 맞춰 "줄이요!" 하고 외치자, 맞은편에서도 "줄이요!" 화답하며 못줄을 놓았다.

고개 숙이고 모내기하던 일꾼들이 일제히 고개 들고 허리도 폈다.

다시 팽팽하게 잡아당긴, 어른 손바닥만 한 간격마다 빨간 꽃들이 주렁주렁 달린 못줄을 논 가장자리에 박았다. 빨간 꽃이 너울거리는 못줄 자리에 맞춰 모를 심자, 넓은 논은 자로 잰 듯 반듯한 초록 물결로 가득 채워졌다. 찰랑이는 물이 가득 찬 논에는 모 뭉치를 군데군데 던져 놓기 바빴고, "줄이요!" 하는 외침은 해 질 녘까지 이어졌다.



지난겨울 집 앞 논을 사고 싶은데 돈이 부족했다.

늘 푼돈이 아쉬웠다. 학교 준비물이 필요할 때마다 옆에서 장사하시던 당숙모께 돈을 빌려 쓰곤 했다.

아버지께서는 읍내에서 다른 사업을 하셨기에 우리 학비나 집안의 큰 일은 해결해 주셨지만, 자질구레한 푼돈은 할머니와 어머니께서 함께 해결하셔야 했다.

집 앞 냇가만 건너면 감 밭이 있었다.

처음으로 봄을 알리는 산수유가 옅은 연둣빛 노란색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웅크리고 땅바닥에서 겨울을 나던 보리도 봄 햇살에 얼었던 몸을 풀고 봄바람에 조금씩 일렁였다.

감 밭 문도 활짝 열렸다.

한쪽에 심어 놓은 노지 딸기도 모진 겨울을 잘 견디고, 노랗게 마른 잎 사이로 파릇한 새 잎을 틔웠다.




푸르던 보리가 누렇게 익어갈 무렵이면, 논에는 코 뜰 새 없이 바쁜 농사철이 시작되었다. 이맘때면 감 밭의 노지 딸기도 울긋불긋 탐스럽게 익어갔다.

토요일만 되면 절구통 위에 걸어둔 감 밭 열쇠를 들고 집을 나섰다.

검붉게 익은 딸기가 파란 잎새 사이사이로 탐스럽게 드러났지만, 바쁜 농사철이라 그곳까지는 손길이 미치지 못했다. 지금처럼 먹을 것을 찾아 냉장고 문을 열듯, 토요일이면 감 밭 문을 열고 딸기밭에서 실컷 배불리 따 먹었다. 그러고 나서 가져간 작은 함지박에 담기 시작했다.

한창 익어갈 무렵이면 제법 큰 함지박에 가득 따서 시장에 내다 팔아 용돈으로 썼다.

그리고 봄과 가을에는 누에를 쳐서 목돈을 마련하기도 했다.

뽕잎을 먹고 자란 누에는 한 번씩 잠을 자고 일어날 때마다 눈에 띄게 쑥쑥 자랐다.

나중에는 뽕나무 가지를 통째로 베어 와서 뜰 방에 가득 쌓아두고 뽕잎을 따서 먹였다.

방 안에 들어서면 뽕잎 갉아먹는 사그락거리는 소리가 제법 크게 들렸다. 순식간에 잎이 다 뜯어 먹히고 줄기만 남은 뽕나무 가지 위에서 누에는 고개를 쳐들고 있었다.

마지막 잠을 자고 나면 누에는 스스로 몸을 감싸며 고치를 짓기 시작했다. 고치를 다 만들고 나면 그 안에서 번데기로 변해갔다.




여름에는 새 또랑 밭에서 나는 참외나 수박을 팔아 돈을 벌었고, 가을에는 할아버지께서 심어 놓으신 감나무에서 제법 많은 감이 열려 목돈을 마련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조금씩 모은 목돈은 아버지 사업 자금으로 들어가기 일쑤였다.

다들 가난한 시골 살림에 어머니들은 목돈을 만질 기회가 드물었지만, 아홉 명, 열한 명씩 모여 돈을 모으는'계'라는 조직이 있었다. 어머니께서는 계주가 되어 동네 어머니들을 모아 한 달에 한 번씩 돈을 걷어 제비 뽑기로 그달의 목돈을 한 사람이 모두 가져가는 방식으로 운영했다.

이웃 어머니들은 처음으로 목돈을 손에 쥐게 되자 더욱 열심히 남의 집 밭 김을 매고 모내기철에는 이 집 저 집 다니며 품삯을 모았다. 또, 푸성귀를 뜯어 장에 내다 팔아 곗돈을 마련하기도 했다.



눈발이 흩날리는 제법 추운 날씨에, 집 앞 논을 팔려고 하자 요즘 말로 부동산 중개인(거간꾼)이 거래를 성사시키려고 우리 집을 찾아왔다. 공떡이 사면 제일 좋것소 바로 옆에 있는 서마지기랑 합치면 모내기할 때도 좋겠는디 하며 넌지시 밑밥을 던지고 가셨다.

어머니도 틈틈이 모아둔 돈으로 물대기도 수월한 사실 몇 년 전에 우리 논이기도 했던 논을 다시 사고 싶었다. 아무리 계산해도 돈이 부족했다. 할머니께서 그동안 틈틈이 짜 두셨던 삼베 몇 필을 장롱 속에서 꺼내놓으시며 장에 내다 팔아 보태라고 하셨다. 얼마나 고맙던지 어깨춤이 저절로 올라갔다.

겨우 돈을 맞춰서 논을 사게 되었고 거간을 해 주셨던 분께도 기분 좋아서 술과 안주값까지 넉넉하게 드렸다.

그해 모내기 철이 돌아오자 처음으로 두 마지기와 세 마지기 논을 합쳐서 못줄을 박고 보니 끝이 아시무락하게 보여 너무나 뿌듯했다. 놉들이 많아 몇 칠전부터 못밥 준비해도 신바람이 났다.

1960년대 시골 농촌은 논이 생명과 같은 귀한 재산이었다. 논이 한 두 마지기 늘어날 때마다 배가 불렀다.

그동안 아버지께서 하셨던 사업이 잘 되지 않아 팔았던 논을 다시 사게 되었으니 얼마나 기뻤을까.




그런데 몇 년 후에 읍내에서 살고 계신 아버지께서 가을걷이가 끝나고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던 초겨울에 제삿날도 아닌데 자전거를 타고 오셨다. 나중에 알고 보니 어머니께서 한 푼 두 푼 모아서 사놓은 논을 사업 자금이 부족해서 팔았던 것이다. 살아생전에 그때가 얼마나 충격적이었는지 어머니께서는 자주 말씀하셨다.

망치로 머리한대 맞은 것처럼 정신이 혼미해져 몸 져 누웠는데 천장이 빙빙 돌았다고 한다.

할머니께서 열심히 일해서 우리가 또 논을 사면 안 되겠나 하시며 위로하셨다.

겨우 기운 차리고 저녁밥을 짓고 있는데 대평 할아버지께서도 아버지 이름을 부르며 조카는 논을 팔아도 나중에 더 많은 전답을 살 것인 게 너무 걱정 마소 하시며 위로하셨다.

그러나 그 후로도 아버지께서는 집에서 가까운 큰 단지 닷 마지기 논을 또 팔았다.




우리 집에서 오랫동안 같이 살며 농사일과 과수원을 도맡아서 지었던 윤 씨 아저씨께서 공떡(고흥떡) 집에서 살고 싶어도 이제 떠날 때가 되었는갑소.

우리 집 일손을 도와주며 같이 지내고 있던 오빠 이름을 부르며 혼자서 농사지어도 충분히 할 것이요 하셨다. 졸지에 우리 집이 논을 팔자 윤 씨 아저씨께서 요즘 말로 실직자가 되어버렸던 것이다. 그 후 서울로 이사 가셔서 자주 뵐 수가 없었다.

그동안 한 가족처럼 지냈던 우리 가족들은 서운해서 밥을 먹을 때마다 이 반찬은 윤 씨 아저씨가 좋아했는데

이야기하며 그리워했다. 대평 할아버지 말씀대로 다행히 아버지께서 운영하시던 주유소, 미곡상회가 잘 되어서 집안 살림은 회복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정들었던 논길 지나칠 때마다 윤 씨 아저씨 같이 일을 도와주시는 몇 분의 아저씨들이 새참 드시던 광경이 어른 거려 얼굴 돌리며 지나쳤다.




1970년대 후반 석유파동으로 지금처럼 이자가 천정부지로 올라가던 때 정부 창고를 대출받아 지었고, 아버지께서 작은 어머니랑 함께 살고 계신 집을 짓고 계셨다

대출받은 고금리 이자를 갚는 아버지 짐을 덜어주고자 과수원과 쌀 매상으로 몫 돈이 되면 무조건 엄마는 아버지께로 보냈다. 작은어머니랑 같이 살고 있는 집을 짓고 있는데 땀 흘리며 농사지어 목돈이 되면 아버지께 보낼 수 있었을까? 그때는 우리 어머니는 그렇게 살아도 되는 줄 알았다. 무조건 희생해도 당연했고 엄마의 삶은 종갓집 모퉁이 돌이 되어 무너질만한 일이 발생해도 기둥을 받쳐 들고 살아내야만 되는 줄 알았다.

어머니 스스로도 유교문화의 지배를 받던 시절이라 종갓집 며느리는 무조건 모든 희생도 감내하며 살아야 하는 가치관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래서 종갓집 맏며느리는 곰방대만 물고 나가도 존경받는다는 옛말이 있었나 보다.




어느 날 아버지께서 어머니에게 전화를 하셨다고 한다. 나 밥 해줄 사람이 없네 밥 좀 해줄랑가? 그 말 듣고 두 말없이 칠 십 세가 조금 넘은 나이에 아버지랑 작은 어머니께서 함께 살았던 집에서 살게 되었다.

나는 지금도 나 자신이 당당하게 할 말 못 하고 감정을 삭일 때는 바보 엄마를 원망할 때가 많다.

나도 모르게 엄마를 닮았기 때문이다.

황혼기에 같이 살았어도 그 후 이십 년을 같이 사시다가 아버지께서는 92세 되시던 해 천국 가셨다.

나무 대문집을 들어설 때마다 성경에 나온 열국의 어미가 된 "사라"가 생각난다.

결국 아버지와 작은어머니께서 함께 사셨던 그 붉은 벽돌집은 우리 형제들에게 성스러운 공간, 성전과 같은 곳이 되었다. 형제들과 의견이 맞지 않아 다소 섭섭해도 어머니의 희생과 용서로 값을 치른 헤브론이 있었기에 우리 친정 집안이 화목하게 살 수 있었다.

열일곱 살에 시집와서 칠십 년 넘게 살았던 시집에서 어머니 이름으로 땅 한평 갖지 못했다.

그러나 "용서와 희생"이라는 이름으로 우리들에게 유산을 남기고 천국을 유업으로 받으신

" 바보 어머니의 땅은 하늘나라 천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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