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이 빗속을 걸어갈까요

비 오는 날의 수채화

by 진주

선풍기 두 대가 부지런히 돌아고 있지만,

움직이기만 해도 땀이 줄줄 흐르더니 에어컨 바람에 끈적끈적한 몸뚱이가 금방 고실고실 해졌다.

퇴근하는 남편 저녁 밥상을 차려주고 가까운 공원 산책을 나섰다. 아스팔트 뜨거운 열기가 훅 올라왔다.


집 가까운 공원 두 바퀴 돌고 나니 연골이 금이 간 무릎도 퍽퍽하니 아팠다.

잠시 벤치에 앉아서 무릎을 실실 쓰다듬어 주었다. 마트 가서 채소라도 살 마음에 큰길로 걸어갔다. 땀이 비오 듯했지만 마트 안에 들어서자마자 에어컨 바람에 금방 시원해졌다. 요즘 비가 많이 와서 채소 값이 비싸다는 소식을 매스컴에서 자주 들었다.

직접 마트에 가보니 그동안 만만했던 가지, 호박, 부추 등 선뜻 장바구니에 담기가 부담이 되었다.

그마저도 늦은 시간이라 몇 개 남은 것이 시들시들했다. 내일 사기로 마음먹고 모기약과 생필품을 사려고 2층으로 올라갔다. 그런데 후드득후드득 빗방울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그래도 설마 했는데 1층으로 내려와 보니 굵은 장대비가 바닥을 치며 사방으로 흩어지고 있었다.

한 순간에 마트 주차장도 냇물처럼 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사람이 간사한지라 금방 더워서 난리를 쳤는데 비가 쏟아지니 마트 안이 추웠다. 계산을 마치고 밖으로 나와 패널에 앉아서 쏟아지는 빗방울을 바라보며 넋을 잃고 있었다.


언제쯤 그칠까 제법 굵은 빗방울은 멈출 줄 모르고 바람과 함께 더 세차게 내리고 있었다. 그때 핸드폰이 울렸다. 남편이었다. 지금 비가 쏟아지고 있는데 우산 가지고 오겠다고 한다. 비가 개이면 갈 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전화를 끊었다.


학교 다닐 때 가까운 곳에 사는 친구들은 갑자기 비가 쏟아지면 언니, 오빠, 동생들이 우산을 들고 복도에 서 있었다. 십리길이나 되는 거리에 갑자기 비가 쏟아지면 마중을 나오는 게 쉽지 않았다. 종례가 끝나면 책보를 허리춤에 매고 친구들과 함께 빈 도시락에서 울리는 숟가락 소리와 함께 빗속을 뛰었다.


우산을 쓰고 먼 길을 걸어올 때는 속박당한 느낌이었지만 빗방울에 몸을 맡겨 버린 그때는 고삐 풀린 망아지들처럼 자유로움

그 자체였다 물이 고인 웅덩이를 일부러 발로 차서 옆에 있는 친구들에게 물 벼락을 날렸다. 서로 웅덩이에 고인 물을 발로 차서 온몸이 흙탕물로 범벅이 된 꼬락서니를 보고 하얀 이를 드러내며 고개를 쳐들고 웃어댔다.

비 맞은 닭 무리가 되어 동네 어귀에 들어서는 우리들을 보고 새 돔 할머니께서는 아이고 강아지들아! 여름 고뿔이 들면 개도 안 물어간디 어쩌끄나 걱정해 주셨다.


쏟아지는 '이 빗속을 걸어갈까요' 유행가 가사를 흥얼거리며 쫙 쫙 쏟아지는 빗소리에 넋을 잃고 있었다. 남편 핸드폰이 또 울렸다. 어쩌고 있느냐고 비는 맞지 않은지 걱정이 된 모양이다. 빗속을 그냥 걸어가고 싶은데 했더니 미쳤냐고 했다. 조금씩 빚 방울이 잦아들자 낮 익은 반바지 차림에 남편이 성큼성큼 걸어오고 있었다. 무던히도 젊은 시절 싸우고 살았지만 지금은 같이 나이 들어 서로 아픈 곳을 하소연하며 동반자가 되어간다.


서로 주름진 얼굴 보며 살아내느라 애쓴 흔적을 만져주기라도 하듯 일주일에 두세 번씩 마스크 팩을 부쳐준다. 우산을 두 개 가지고 왔지만 짐이 되고 말았다.

언제 비가 왔느냐 할 정도로 활짝 개어서 아스팔트에 빗물이 흘러간 흔적만 있었다.

이제 더위가 한 풀 꺾이겠지

keyword